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브룩스의 스필버그의 링컨 리뷰

데이비드 브룩스의 Why We Love Politics 를 읽고 쓰다.

역시 데이비드 브룩스다. 정치와 리더십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쉽게 요약해 낼 수 있을까? 이 칼럼을 찬찬히 뜯어보면 왜 한국의 리더들, 특히 진보파 리더들이 계속해서 실패하는지, 또 그들이 어느 지점에서 실패하고 있는지를 잘 알게 된다. 노무현, 안철수, 심상정, 혹은 손학규가 말이다. 

민주당 선거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현직정부와 그 실적에 대한 대다수 시민들의 평가가 극도로 낮다면 (*나는 2012년이 2007년에 이어 그렇다고 생각한다) 유권자로서 시민의 과제와 선택은 단순하고 쉬워진다. 일단 악당을 쫓아내는데 전념하면 되기 때문이다(kicking the rascals out). 이는 선거가 '전망적 판단'이 아니라 '회고적 평결'을 중심으로 치러지게 됨을 의미한다. 유권자는 돌멩이(투표용지) 하나를 가지고 두 마리 새(나쁜 놈 심판하기와 좋은 놈 선택하기)중 무엇을 잡아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저 한 마리에 집중하면 된다.

2012년 11월 16일 금요일

안철수의 대안적 경로

정치메모 (2012년 10월 21일)

1. 18대 대선 - 좋은 선거의 가능성

- 꽤 오랫동안 한국 시민들 䶜년 뭔가 좋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란 믿음 가져
- 이는 학계와 언론 일각에서 제기했던 녝년 체제론’의 영향. 그것은 2012년 두 선거가 한국 유권자의 기존 정치적 정렬을 완전히 바꾸는 선거가 될 것을 전제하는 것
- 그러나 총선, 대선이 같은 해 있다는 사실 빼곤, 그런 믿음과 예측에 합리적 근거는 없음. 지난 총선 결과는 별일이 없다면 다가올 대선도 보통의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
- 중대선거 또는 승패를 떠나 유권자를 위해 ‘좋은’선거 치르는 것 정치하는 사람들의 책무
- 좋은 선거란 한국사회와 시민들의 삶과 관련해 ‘큰’문제가 주요 후보들 간 중요하게 다뤄지는, 그 과정에서 유권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내는 선거라 말할 수 있을 것 (※ BBK공방으로 일관한 17대 대선은 민주화이후 가장 나쁜 선거)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MB 없는 선거에 대하여

그냥 빠르게 몇 가지만 적어보자.

1) 한겨레가 "MB실종"이란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 전달하는데는 실패했다. 야지놓느라 바빠서 말이다.
2) 나는 "MB없는선거"야 말로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그것은 이번 대선이 훗날 학문적으로 참조될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될 것 같다. ('철수있는선거' 보다 더 말이다.)
3) "MB없는선거"의 핵심은, 그러나 한겨레 기사처럼 레임덕 대통령의 정치적 존재감 상실에 있지않다. 늘 그랬다. 그래서 "MB는 왜 저리도 무기력(무능)한가"는 빗나간 질문이다.

2012년 10월 9일 화요일

왜 정당 없는 선거는 시민의 이익에 복무하지 못하나?

안철수 후보가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드리는 방안  으로 기초단체장 정당공천 폐지를 언급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페북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잘 알지 못할 때, 또는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확신이 없을때 (정치리더에겐 의외로 자주 있는 일인데) 말하지 않는 것도 덕목이자 능력이다."
그러나 후배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제가 정치쪽은 잘몰라서요... 시군구의회 정당 공천을 폐지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건가요?
아래는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2012년 9월 18일 화요일

[챙겨두기] 2012년 9월 18일

한국적 보수......  김진 "박정희 독재 어떻게 볼 것인가"  in 중앙일보

인용가능..... 박용진 "모바일 투표, 한국 정치 새장을 열었다" in 뉴시스

정치사회학......  장은주 "민주당 시민적 권력을 위해 복무하라"  in 프레시안

이태리정치 정상화하기...... Paola Subacch Normalizing Italy in Project Sysdicate

대선 캠페인에서 이벤트의 영향 Ed Kilgore Events and Fundamentals in Washington Monthly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 EXTARACTIVE ELITE......  Molinas Theory of Spain's Political Class

On Totalitarianism by George Orwell

"Totalitarianism, however, does not so much promise an age of faith as an age of schizophrenia. A society becomes totalitarian when its structure becomes flagrantly artificial: that is, when its ruling class has lost its function but succeeds in clinging to power by force or fraud. Such a society, no matter how long it persists, can never afford to become either tolerant or intellectually stable. It can never permit either the truthful recording of facts or the emotional sincerity that literary creation demands. But to be corrupted by totalitarianism one does not have to live in a totalitarian country. The mere prevalence of certain ideas can spread a kind of poison that makes one subject after another impossible for literary purposes. Wherever there is an enforced orthodoxy — or even two orthodoxies, as often happens — good writing stops. This was well illustrated by the Spanish civil war. To many English intellectuals the war was a deeply moving experience, but not an experience about which they could write sincerely. There were only two things that you were allowed to say, and both of them were palpable lies: as a result, the war produced acres of print but almost nothing worth reading." - George Orwell in "The Prevention of Literature" (1946)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문재인의 쉬운 승리에 대하여

문재인 후보가 결선 없이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에 대한 호불호를 잠시 미뤄두자. 

그래도 역사와 전통의 제1야당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13개 모든 지역 경선에서 승리하고, 합계 득표율 56.5%를 기록한 것은, 사실상 대중 정치 입문 1년차인 문재인 후보와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다. 나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있다고 말해지는 그의 치명적 매력을 감안한다하더라도 그렇다. 뭔가 자연스럽지도 정상적이지 않다.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너느님들'의 세계

조국님이 말하셨다.

맑은 - 영혼 - 눈빛 - 담판 - 양보 - 감동 - 승리 라구. 참 예쁜 단어들이 모여, 말씀하신 분 외모만큼, 말끔히 늘어섰다. 그런데 나는 아주 조금 미심스럽다. 맑은 영혼은 어떻게 아는 걸까? 머리 뒤 쪽으로 어슴프레한 빛이라도 나는 걸까? 나는 왜 볼 수 없을까? 동화 속 임금님처럼 내 영혼이 충분히 맑지 못해서일까? 내가 너무나 탁한 영혼의 소유자이기에, 안철수와 정운찬이 또 문재인과 임태희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걸까? 그런데 영혼을 보는 능력은 어떻게 갖게되는 걸까? 타고 나는 건가? 배우는 건가? 타고 나는 거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을까? 못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가진 사람들을 믿고 따르면 되나?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디서 누구에게? ‘수정처럼 맑은 영혼’이란 이름을 가진 인디언 추장님은 아실까? 이렇게 믿지 않고 따지는 것 자체가 영혼 타락의 증거는 아닐까? 아~~.

2012년 9월 9일 일요일

희희낙락 하며 걸어 나가 MB정부

정치리더들과 그 집합으로서의 정당은 결국 선거의 견지에서 평가되고 기록된다. 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거나,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정치’ 아닌 일을 하는게 모두를 위해 좋다.

노무현 정부는 실패했다. 이는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그렇게 쉽게, 그렇게 크게 이겼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 DJ정부에 대해 평가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여타 정부와 큰 차이 없는 국정실패의 모습들에도,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다. 그건 작은게 아니다.

2012년 9월 6일 목요일

[챙겨두기] 클린턴 연설에 대하여

정책광 사령관? Ezra Klein Bill Clinton: wonk-in-chief in WP

보수는 정책을 싫어해.....  Sullivan Why is There no Republican Bill Clinton in The Daily Beast

클린턴과 오바마의 역할분담.. Bill Clinton Does President Obama's Dirty Work in The Atlantic

정책을 말하라 Ezra Klein For politicians, talking policy works in WP

보수의 평가..... The Clinton Speech and the “Campaign of Ideas”

[인물] 리쳐드 홉스태터 Richard Hofstadter

논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가 리쳐드 홉스태터 (Richard Hofstadter)

"The paranoid style in American politics."

"Status anxiety."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Third parties are like bees: Once they have stung they die."

2012년 9월 5일 수요일

최장집 칼럼 해제 Part 2 - 최장집 프로포절

[전편 줄거리]

Part1은 왜 최장집이 ‘다른’ 얘기를 하는지를 다뤘다. 모두들 “누구냐”에 집중하는 대선 한 가운데서, 그가 선거 ‘이후’를 말하는 것은, 한국 대통령들의 거듭된 실패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통령 ‘개인들’의 실패가 아니라 대통령 ‘제도’의 실패였고, 개성적이기 보다는 구조적 현상이었다. 나아가 제도로서 대통령의 필연적 실패의 동학을 ‘캠프정부’로 요약했다. 그것은 캠프정부-당정간 척력과 분리-무책임정치-정당(정치) 약화와 불신- 다음 캠프정부로 이어지는 악의 순환(vicious circle)이며, 한국정치가 빠져있는 하나의 덫(trap)이었다.

[Part2 시작]

사실 최장집의 이런 묘사와 설명이 그 자체로 새로울 것은 없다. 우리는 사실 다 알고 있으면서 못 본척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방안의 코키리다. 그러나 그것이 코키리인만큼 우리는 이미 충분한 상식화된 해법(conventional wisdom)을 갖느다. 기자나 전문가들이 “이미 답은 다 나와있다. 문제는 ~” 으로 시작되는 내용들이 그것이다. 먼저 대표적인 상식화된 해법을 살펴본다. 그리고 왜 그것이 해법이 되지 못해는지 논의해 본다. 그리고 최장집의 새로운 제안, 프로포절을 검토해 본다.

2012년 9월 3일 월요일

[정치분석] 최장집 칼럼 해제 Part 1


이 글은 경향신문 8월 28일자 최장집 칼럼 [책임정치를 위하여]의 해제다. 칼럼을 ‘풀겠다’ 나선 것은 그 글이 별 반향 없이 묻혀서는 안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느 칼럼처럼 ‘박근혜 지지 표방’으로 오독되어선 안된다. 최장집의 모든 글이 주목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실 최장집처럼 한 분야에서 ‘대가’로 평가되는 씨니어 연구자들은 한 가지 화두를 얘기하고 또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끔 빼먹어도 된다. 또 비슷한 주제라면 슬쩍 훑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다. 왜 그런가? 세 가지 까닭이다. 첫째, 뭔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둘째, 뭔가 ‘새로운’ 얘기를 하고 있다. 셋째, 그러면서도 뭔가 ‘긴요한’ 얘기를 한다. 덫붙여, 씨니어 연구자의 글은 자주 형식과 내용에서 불친절하다. 좀처럼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는다. 요점은 종종 감춰지고 맥락은 자주 생략된다. 필자가 감히 안내를 자청하고 나선 이유다.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생각] 조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조금씩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감과 촉을 살려 가고 있다. 그럴려구 노력하고 있다. 시간이 걸릴꺼다. 문제는 그 수준과 형태가 무엇이 되었든, 뭔가 정리해 내놓는 결과물의 견지에서 볼 때, 자꾸 다른 영역(사회 문화)을 지분거리고 있다는 거다. 또 나의 영역(정치)을 다루더라도, 자꾸 비본질적 접근에 머문다는 거다.

오늘도 그렇다. 엊그제 부터 얼마전 경향에 실린 최장집 선생님의 "책임정치를 위하여" 칼럼 리뷰를 하나 쓰려고 했다. 써야 했다. 그런데 계속 딴짓만 하다, 엉뚱하게 정희진의 "그들이 화학적 거세를 선호하는 이유'라는 칼럼에 대한 독후감을 써버렸다. 

돌아가야 한다. 현대민주주의에서 정치리더와 정당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또 합리적 개인들의 (의도와)행위, 그 집합적 결과 사이의 관계, 그리고 개인들의 행동과 상호작용을 지도하는 '룰과 권력의 체계'이자 '매개변수'로서의 "조직"에 더 집중해야 한다. 정치는 조직의 문제다.

정희진의 "그들이 화학적 거세를 선호하는 이유"를 읽고

한 사회의 지배적 상식에 반론을, 그것도 효과적으로 제기하기란 힘든 일이다. 트라우마적 사건이 일어나고, 여론과 그 분노가 정해진 곳을 향해 내달릴 땐 더욱 그렇다. 해당 문제에 대한 전문지식만으론 부족하다. 여론에 굴복 또는 타협하지 않을 용기도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을 지혜와 끈기도 요구한다. 오늘 한겨레 정희진의 글이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을 통해서 나는 해당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해를 갖게 되었다.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논쟁] 정당 vs. 인물


최장집 "책임정치를 위하여"
한겨레 성한용 "대통령 선거의 몇 가지 상식"
한겨레 신진욱 "정당정치, 위기인가 기회인가?"

[읽어야 할 읽으면 좋을] 2012년 8월30일

1. 참 많이 듣던 레퍼토리. 시간나면 이런 것 모아봐야 할듯

이해찬 "모바일 경선은 세계 유례없는 정치혁신"

[읽고 생각하다] 이북 코스프레

페북 지인 중 한명이 링크한 8.15 행사에 관한 기사를 읽고 쓰다.
내가 기사를 읽고 페북에 남긴 반응과 여기에 대한 링크자의 댓글은 다음과 같다.
우와. 아직도 이런 걸 하고 있다니. 일단 놀랍고 그 생명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그런데 개콘 출품할 것도 아니고, 이런 "이북 코스프레"를 얘들이 왜 하고 있는 거지
이북 코스프레라고 할 것까지야.. 평화통일.. 진보진영의 대단합의 장 정도로 이해하심이 ^^;;
그리고 댓글에 대해 다시 쓰다.


‎^^ 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애들에게 조금 가혹하게 구는 것 같아서 맘에 걸리지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예나 지금이나 이쪽 친구들의 남북문제(통일) 고민이 '주체적'인 게 아니잖아요? 저쪽의 논리와 이해를 그대로 가져와 학습하는 것에 불과하지. 지금 달라졌다면, 저야 당장 반박할 근거는 없지만, 그쪽 어른들(통진당 NL)의 최근 모습과 발언을 보면 별로 그럴것 같지도 않습니다. 

둘째, 대학생들이 공적,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저는 지지합니다. 다만 그 문제영역으로 남북문제(통일)는 적절하지 않다고 봐요. 제가 볼 때 남북문제는 정치적으론 혹시나 발생할 불행한 파국을 막는 현상유지와 관리, 사회경제적으론 관여의 증대 이상의 고민이 나오기 힘들다고 봐요. 이는 현실에서 다소 미흡하나마 DJ의 햇볕정책으로 실제 구현된 것이고, 약간 개선점은 있겠지만, 이를 훌쩍 뛰어넘는 어떤 접근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통일운동 그룹의 남북문제에 대한 예의 감상적, 이상적 접근이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불어 모든 정치이슈들이 대중의 정치참여가 필요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제가 남북문제를 국제정치/외교의 이슈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급적 대중보다는 전문가와 엘리트의 손에 맡겨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셋째, 개인적으론 민주화이후 한국의 왼쪽 진영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고 퇴행을 거듭하는 주요 원인으로, 전 역사구조적 요인으로 통일운동 그룹이 민주화이후 한국의 왼쪽진영을 조직적으로 이념적으로 장악한 것, 그리고 그들의 시대착오성과 부적실성을 빼놓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통일운동을 통한 진보진영의 대단합'은 제게는 넌센스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젊을 땐 뭐든지 다 해보는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북의 사고와 문화를 흉내내는 일은 (제가 코스프레로 표현한)는 정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 친구들이 영어공부(토익과 같은 시험공부가 아니라 미국의 정론 주간지나 일간지를 읽고 토론하는 식의)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남북문제와 미국과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견을 건강하게 받아주실 것이라 믿으며...

2012년 8월 28일 화요일

[꽤긴글] 휴대폰 프라이머리

많은 이들이 충분히 지적했지만 현재 민주당 경선은 문제가 많다. 그것도 너무 많다. 모바일 프라이머리로 요약되는 현행 제도는 왜 문제인가?

먼저 그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한다. 지금과 같은 모바일 투표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라는 민주선거의 가장 기본적 원칙을 보장하지 못한다. 왜냐면 현재 장치로는 어떤 후보의 열성적 지지자가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의 휴대폰을 확보해 대리투표 하는 행위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첨예한 이해가 걸린 '정치의 세계'에서 유인은 존재하는데 막지 못한다는 것은 장려된다는 것이다. 과거 부정선거의 대명사인 독재시절 ‘고무신’ 선거도 결국 유권자를 투표장에 데려다 놓는데 머물렀지, 인주가 어디에 찍힐지 확정치는 못했다. 얼마전 국민들의 지탄과 조롱을 받은 통진당의 내부경선을 ‘태블릿 떼기’라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민주당의 그것은 ‘휴대폰 떼기’이다. 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둘 다 부정(이 허락된)선거다. 투표에 한정할 때, 물리적 출석 없는 참여는 민주적 참여가 아니다.

2012년 8월 27일 월요일

[읽고생각하기] 두 백치미

황진미의 멘붕권하는 사회-사는게 아니무니다 를 읽었다. 재밌는 글이다. 개콘은 내가 정기적으로 시청하는 유일한 TV프로다. 이 코너는 개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박소영이 가장 좋다. 행동거지와 대사 하나하나 다 좋다. 황진미 설명대로 캐릭터의 재미는 ‘적반하장’에서 나온다. 그러나 박소영 캐릭터의 요체는 사실 ‘소통불가-백치’다. 백치니 말이 안통하고 말이 안통하니 우기는 거다.

2012년 8월 25일 토요일

[생각] 아! 민주당

2010년 1월 15일 난 티스토리 블로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난 지금 민주당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뿐 아니라, 말해야 하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 역시 느낀다.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면 잘 안된다. 머릿속엔 하고 싶은 말들이 떠도는데 왜 글로 이어지진 않을까?
누구나 민주당을 말한다. 민주당이 갑자기 한국정치의 핵심문제로 부상한듯 하다. 진보적 성향의 언론들과 교수들, 논평가들 목청에 핏대를 세우며 민주당의 1에서 10까지 문제를 지적한다.

어쩌면 그들의 말, 조언, 충고들은 대체로 틀리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 그렇게 이것저것 온갖 얘기 가져다 하는데, 몇개라도 얻어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난 사실 그들이 민주당의 문제를 지적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들 자신들이 민주당의 문제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민주당, 그리고 현 지도부와 주요 인사들은 사실 언제나 그들에겐 열심히 반응해 왔다. 그들의 공식적, 비공식적 조언과 충고를 과도하게 집착해 왔다. 사실 민주당은 그들이 이끄는데로 왔다. 즉 그들의 충고에 따라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다들 자기가 말한 그대로 안 했다고 아우성이다. 그 입들을 다물게 할 수 없을까?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이야기 꺼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 그러면 잘 말할 수 있나? 그런 이야기를 잘 전달할 지식과 재주,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 의지를 가졌나? 잘모르겠다.
한 가지 확신은 내가 지금 민주당에 관한 것을 정리하고 뭔가를 쓰지 않는다면, 다른 작업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 왜 이렇게 됐지.....

2012년 8월 말 난 여전히 동일한 화두와 거의 동일한 수준과 방식으로 씨름하고 있다.

2012년 8월 24일 금요일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서평] 현대민주주의,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작성일: 2009.6.21>

리뷰 - 절반의 인민주권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역, 후마니타스, 2008)


현대 민주주의,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샤츠슈나이더의 1960년작 『절반의 인민주권』은 매우 짧은 책이지만, 누구나 손꼽는 정치학의 고전이다. 그러나 이 책을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갈등과 정치, 이익집단과 정당, 균열과 정당체제, 인민주권과 민주주의 등 정치학의 핵심 주제들을 망라하고 있어서다. 따라서 본 서평은 『절반의 인민주권』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밝히는데 우선 집중한다. 그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저자가 서문 첫 문장에서 밝힌, 정치조직에 관한 이론을 수립하려는 목적의 책이 왜 『절반의 인민주권』이란 제목으로 나왔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당시 미국 민주주의를 ‘이론의 위기’로 진단하고, 인민의 주권을 활용하는 방식의 변화를 역설한 저자의 진단과 해법이 이 제목에 축약되어 있으며,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해 매우 큰 시사를 갖기 때문이다.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짧은글] 독도방문 설명하기

나는 이번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즉흥적 결정의 소산으로 본다. 한번 언급하였듯이, 한국 대통령의 임기말 독도사랑은 그 자체로 특별할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갈 수 있는 곳도 크게 제한되는, 천덕꾸러기 레임덕 대통령에게 독도는 큰 반대 없이 뭔가 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제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할지라도, 과장된 수사난 비정치적 반일 제스쳐가 아닌 대통령의 물리적 방문으로 표현된 사랑은 평범한 일은 아니다. 쉬운 결정도 아니다.

[짦은글] 박종우 보도와 한국언론과 군중주의

지금 한국사회를 휩쓰는 이 기운을 군중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한국 언론과 기자들에게 '네티즌(의 의견)'은 여론 집약을 위한 여러 원천 중 하나(그것도 신뢰도에서 많이 떨어지는)가 아니라 여론의 전부가 돼 버린 듯하다. ‘디지털취재부’ 등의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순전히 네티즌들의 의견만으로 구성되는 황당한 기사가 크게 늘었다. 또 그런 종류의 기사의 범주도 연애, 스포츠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활용면에서도 단지 시민들의 의견 스케치를 넘어, 파워트위터리안이나 네티즌 투표의 형식을 빌어 기사 자체의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이르렀다.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짧은글] 코칭의 실패

이번 올림픽을 관전하며 여러번 맞닥뜨린 흥미로운 현상이 있는데 바로 코칭의 실패이다. 경기에 나선 선수들, 대부분 어렸던 친구들은 참 분투했다. 많은 이들이 환경적 제약과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 성취를 이뤘다. 그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열광하고 성원했다. 그들의 목에 걸린 메달의 색깔과 갯수에, 또는 흔히 말해지듯 국가로 돌려진 영광에, 우리가 그런 것은 아니다. 평범한 우리네들과 달리, 스스로를 물리적, 정신적 극한으로 밀어 붙여, 기어이 넘어 서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 설령 넘지 못하더라도, 인간 한계를 향한 그들의 도전과 좌절에 우리는 감탄하고 숙연해졌다.

문제는 그들을 지도하고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 어른들이다. 이 글은 선수들의 기대 이상의 선전에 가려진 코치(칭)의 분명한 실패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코치는, 구체적 직무로서 코치직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이들로 한정되기 보다는, 한 선수의 재능과 노력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와 보상으로 이어지는데 협력하는 모든 사람과 제도로 넓게 정의한다. 그래서 코치는 선수와 팀을 구성하는 코칭 스태프 뿐 아니라, 관련 협회와 단체 그리고 전문가 그룹 나아가 정부부처에 이르는 관련된 사회적 제도와 메커니즘 전반을 의미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끝나지 않는 1초’로 운위된 펜싱 신아람 논란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또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이 사건을 사태로 만든 것은 틀린 ‘판정’ 이 아니다. 그것은 틀린 ‘어필’이다.

물론 당시 경기에서 심판의 판단, 또 이를 돕는 기계장치와 그 운용자의 실수 내지 오류는 존재했다. 또 그것의 직접적 피해자로 신아람 선수가 갖는 부당함 내지 억울함에 공감하고 편들게 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그러나 모든 스포츠 경기(어쩌면 경쟁 일반에서)에서 그것을 관장하는 인간과 기계의 오류와 실수는, 그것이 시스템적이거나 명백한 의도와 계획의 산물이 아닌 다음에는(또 그렇더라도 명백하게 입증되기 전까지는), 경기의 일부이다. 최고의 인력과 자원이 동원된다는 올림픽에서도 그렇다. 그 역시 사람이 주관 하는 것이며, 첨단장비의 도움을 받더라도 (심지어 받았기 때문에) 실수와 오류의 완전한 제거는 불가능 하다. 문제가 없게 사전에 노력하고, 그래도 일어난다면 사후에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따라 교정하거나(수영 박태환의 사례), 또는 장기적으로 끊임없이 개선(비디오 판독 도입 확산)해 나갈 따름이다.

이처럼 스포츠 세계에서 실수/오류와의 공존의 불가피성을 받아 들일 때, 신아람 사태가 판정이 아니라 어필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제목도 ‘신아람 오심’ 보다는 ‘신아람 점거/눈물의 시위’가 보다 정확할 것이다. 불편해도 말이다. 사태를 이렇게 달리 보는 것의 함의는 크다. 먼저 한국 네티즌의 ‘공공의 적’이 된 82년생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판은 더 이상 사태의 원인제공자가 아니다. 경기장 시계도 그렇다. 그것은 신아람 선수, 보다 정확하게는 부당한 판정에 직면해 그녀가 선택한 항의의 방법, 즉 경기장을 떠나기를 거부하고(점거) 눈물로 호소하는 행위에 있다. 필자는 올림픽 일반, 문제가 된 펜싱에서 부당한 판정에 대한 공식적 항의의 요건과 절차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신아람 선수의 그것이 공식적인 것도 정상적인 것도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사태가 판정이 아닌 항의(의 방식)의 문제라는 주장이 “모든게 신아람 선수의 잘못이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분명한 오류들과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닥치고’ 승복하는 것은 그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쳐온 이들에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희박한 가능성에도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정해진 규정과 절차를 따라서 이뤄져야 했다. 그녀가 선택한 방식, 즉 경기장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눈물로 호소하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억울한 이들이 자주 선택하는 원초적 방식이며, 또 어떤 면에서 매우 ‘한국적인’ 방식이지만, 스포츠에 어울리는 것으로 보긴 어렵다. 그것은 그 성격과 양식에서 결국 정치적 시위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치적 시위를 어필의 정당한 방식으로 용인한다면, 전체 올림픽은 커녕 축구 한 게임조차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행위, 항의를 위해 선택한 표현양식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다. 아니 더 큰 잘못과 책임은 신아람 선수가 아니라 그녀의(를 위한) 코치(칭)에 있다. 코치의 역할은 결국 선수의 재능과 노력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와 보상으로 최대한 연결되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한 코치의 책무는 평시에는 경기력 향상을 지도하는 것이며, 올림픽과 같은 시합기간에는 선수의 퍼포먼스와 결과에 영향을 끼칠 다양한 외부적 요인들을 통제해서 선수들을 보호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신아람 사태는 이 지점에서 코칭이 완전히 실패한 것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경기에서, 시합을 통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 넣은 것으로 신아람 선수의 역할은 끝난 것이며, 그러해야 했다. 판정과 관련되어 이후 발생한 모든 과정은 온전히 코치와 지원조직의 몫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그녀를 경기장에 방치했다. 그녀가 억울하고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전세계가 시청하도록 했다. 냉정히 말한다며 그들은 원하는 결과(판정번복)를 얻기 위해 퇴장거부(점거와 경기진행 방해)라는 정치적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것도 눈물 흘리는 어린 여자선수를 맨 앞에 내세우는 감정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신아람 선수가 원하고 선택한 것이라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코치의 책무로 선수의 보호를 말할 때, 거기에는 ‘선수 그 자신’으로부터의 보호도 들어간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는 극한의 경쟁에 노출된 나이 어린 선수들이 결과를 위해 과정을 또 현재를 위해 미래를 기꺼이 희생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선수 그 자신으로부터 선수를 보호 하는 것 코치에게 주어진 가장 어렵고 중요한 역할 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코치들 또 코치들의 코치들(협회와 유관조직)이 했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먼저 빠르게 사태파악을 한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방식으로 할수 있는 최선의 어필을 해야 했다. 그 가능성이 설령 크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코치는 무엇보다 선수를 위로하고 안정시켜야 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 경기(3-4위전, 단체전)가 남아 있다는 것을, 나아가 이번 경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다음 선수권, 올림픽), 어쩌면 경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인생)을 일러주고 설득해야 했다. 이건 사실 뭐 특별한 얘기도 비법도 아니다.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대부분의 선수와 코치가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그날 경기장에서 1차 코칭의 실패의 효과는 경기장에 머물지 않았다. 처음의 파장과 책임을 면하기 위한 코치들의 절박한 그러나 다시 부적절한 행동들이 이어졌다. 특별상과 특별메달 논란이 그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그리고 더 큰 코칭의 실패로 이어졌다. 미디어와 전문가 그리고 오피니언 리더들은 그날 “뭔 일이 일어 났는지”를 대중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코치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어린 친구가 서럽게 우는 그 장면에만 집중 했고 흥분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과도한 흥분에 휩싸였다. 경기장 밖에서의 2차 코칭의 실패는 우리 네티즌들이 온라인 국경을 넘어 행사된 폭력이다

어제 축구 대표팀 박종우 선수의 메달 보류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시간이 꽤 흐른 시점에서 신아람 사건을 다시 들추고, 글을 쓰게 된 것도 이 소식 때문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 역시 동일한 문제, 즉 코칭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들의 온정적/희망적 보도와 달리, 해당 문제에 있어 IOC와 각종 세계 경기단체들의 기본원칙과 대응은 분명하고도 확고하다. 제기된 이슈의 정당성과 보편성과 무관하게, 경기장으로 정치적 이슈를 가져오려는 어떠한 시도는 금지되며, 그 위반에 대해선 무관용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확립된 것으로 선수라면 가져야 되는 상식이고, 또 국제대회에 나서는 선수들에게 코치들이 제일 먼저 숙지시켜야 하는 교양 중의 교양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한일전에 걸린 이해관계는 너무 컸다. 두 국가 모두 불가능하다 여겼던 올림픽 메달을 두고 다퉜고, 한일간의 오래된 역사적 라이벌 의식이 더해졌다. 선수들이 감정적으로 동요될 가능성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코치들은 이런 경기외적 영향과 기운, 그리고 그것이 선수들의 내면에 끼칠 동요 양자 모두를 적절히 통제하고 선수들을 보호해야 했다. 게다가 당일 대통령의 ‘생뚱맞은’ 독도 방문까지 있었다. 아마 이 소식은 선수들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코치들, 선수단, 협회는 이런 모든 상황이 선수들의 우발적 충동적 행동으로 이어질수 있음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했다. 박종우 사건은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경기장에서 코칭은 또 실패했다. 그리고 그 잘못과 책임에 벗어나기 위해, 미디어와 전문가 즉 코치의 코치들은 엉뚱하게 IOC 또는 일본을 비난한다. 독도가 우리땅이 아니더냐고 한다. 일본의 고자질 때문이라 한다. 2차 코칭의 실패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네티즌들은 또 다시 전투에 소집된다.

2012년 7월 31일 화요일

[짧은글] 펜싱오심 논란과 네티즌 원정대

옳지않다.

아무리 그것이 온라인 공간에 한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떼지어 몰려다니며 개인을 공격하는 행위는, 원래 그녀의 잘못과 무관하게 폭력이다.

그녀가 잘못이 있다면 그 처벌은 정해진 절차와 기준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이번 펜싱 판정이 주장처럼 명백한 오심이라면, 그녀는 유형, 무형의 그리고 공식적, 비공식적 처벌을 올림픽 위원회나 협회, 그리고 심판 공동체와 팬을 포함한 펜싱계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하고, 옳다고 믿는 '법 앞에 평등', '죄형 법정주의', '무죄추정의 원칙', '자기변호의 권리'는 특별한 종류의 범인이나 사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은 공적 사법시스템 안에서만 준수되어야 하는 규범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과 이웃한 평범한 사람들이 종종 저지르는 대단치 않은 잘못과 이에 대한 대응에서도 지켜져야 할 원칙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앞서 열거한 원칙들은 한 사회가 자유적이고 민주적이기 위해, 그 구성원의 잘못과 비행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서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 낸 합의이자 도덕적 규범이다. 그 핵심 요지는 한 개인의 잘못에 대해 자의적이고 사적인 징벌은, 애초의 잘못만큼, 어떠면 그 보다더 나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펜싱오심으로 촉발 된 한국 네티즌들의 원정 온라인 공격은 최근 한국 인터넷 공간에서 자주 목격되는 XX녀 사건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나는 한국의 온오프라인 공론장을 휨쓰는 XX녀 현상이 한국사회와 그 대중들이 나빠진 것의 산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나빠지게 된 걸까? 비록 가장 중심적이며 또 결정적 요인은 아닐지라도,  위와 같은 현상을 초래 한 한 요인을 특정해 보고자 하는데, 그것은 한국사회의 엘리트들의 질적, 도덕적 타락이다.

올림픽 이야기로 시작되었으니 올림픽 사례를 들어보자. 이번 올림픽을 지켜보며 발견한 가장 인상적인 사실은 경기중계가 형편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파업과 사측의 단시야적 대응으로 비롯된 MBC만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래픽이나 영상 등 기술적 측면에서 그것은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하겠다. 그러나 정작 경기를 설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캐스터와 해설은 두드러지게 나빠졌다. 경기중계 혹은 경기해설이란 것이 필요한 이유는 비-전문가인 시청자들이 화면만으로 잘 보지 못하는, 그러나 경기를 더 잘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 필요한 배경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 중계는 방송사마다 또 경기마다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말해 시청자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시청자도 지켜보고 있는 화면의 묘사에 그쳤다. 심지어 상대 선수의 이름  같은 기본적 정보도, 심지어 경기의 기본 룰조차 숙지하지 못하는 해설이 있었다. 아마도 이는 방송영업환경의 변화와 이에 따른 인력운영 재편, 결과로서 비전문적이며 최소한의 준비조차 되지 않는 캐스터들의 증가와 셀리버리티(인기인) 해설자 유행현상과 관련된 것 같다.

아무튼 시청자 보다 뛰어나지 않는 캐스터와 해설자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과도한 편파성이거나 감정적 오버이다. 필요 이상으로 소리만 지르고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 편파적 정보로 시청자를 자극하고 흥분시킨다. 무조건 상대선수를 비난하고 심판과 판정을 문제삼는다. 이런 중계들을 여러편 보고 나면, 마치 전 유럽이, 그들의 협회, 심판, 선수, 관객이 하나가 되어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게끔 공모라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일이 없지 않다. 또 그렇게 할만큼 한국이 그들에게 위협인 것도 아니다. 그냥 또 하나의 허황된 음모론인거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우리다. 우리가 문제인 거다. 우리를 오도한 형편 없이 나빠지고 또 타락한 한국의 엘리트/전문가들이 문제인 거다

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짧은글] 좋은의도가 모여 나쁜결과를 만들때

2012년 MBC 파업은 하나의 조직으로서 MBC의 운명을 결정지은 트라우마틱한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미 그 파장(ramification)이 너무나 커, 지금 운위되고 있는 김재철 사장의 진퇴 여부와 시점이나 후임자가 누가 될 것인지는 아주 사소해 보인다.

길고 긴 파업 과정이 조직 전반과 그 구성원들(조합원 비조합원 모두)에 남긴 부정적 상처는 너무나 크고 깊어, 아마 전쟁이 한 사회와 그 구성원에 남긴는 결과와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신문의 이념적 지향을 떠나서, 꽤 괜찮은 신문이었던 동아일보가 대량 해직사태를 경험한 후, 조직적으로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결국 이류신문으로 전락해버렸다는 평가를 들은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