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30일 월요일

[긴글] 한국민주주의의 허약한 정치구조적 기반



2008년 1학기. 최장집 교수님 [국가론] 기말페이퍼

한국민주주의의 허약한 정치구조적 기반
  
박성진 (박사과정) 


Ⅰ. 문제: 강력한 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 

1. 촛불정국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

현재 목도하고 있는 백일을 갓 넘긴 이명박정부의 초상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체제수준의 위기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운위될 정도로 현 정부의 정당성과 작동능력에 있어 심각한 훼손이 발생했다. 이것의 직접적 요인은 누구나 동의하듯 절차적, 내용적 기본을 갖추지 못한채 이뤄진 정부의 쇠고기합의와 이에 대응해 그 항의의 크기와 정도를 증대시켜온 시민들의 촛불집회이다. 대체로 그것은 광범한 시민들에 삶(여기서는 건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부정책의 내용과 과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 분노와 그리고 항의의 직접행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단지 ‘쇠고기’라는 먹거리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이란 단일 요인만으로, 불과 백일 전 선거에서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보냈던 동일한 시민들의 상당수가 거리로 몰려나와 “정권퇴진 구호”까지 서슴없이 외치게 된 현 사태를 설명할 순 없다. 그렇다면 사태를 여기까지 밀고 온 추동력은 무엇인가? 

이번 사태에 대해 이미 방송과 신문지면, 그리고 토론회 등을 통해 많은 논평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설명은 이명박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현 대통령의 대기업 CEO출신이란 배경, 국정운영과 기업운영간의 차이의 몰이해, 잇따른 페쇄적, 상층편향적 인적구성 그리고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과 행동거지 등의 개인적 스타일 등이 주로 지적된다. 다른 이들은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이슈에 주목한다. 쇠고기 이슈는 한 마디로 인체에 치명적인 광우병의 위험이 완전히 통제, 제거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를 들여오겠다는 정부의 결정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그것이 파괴적일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발표대로 그 확률이 극히 미미하다 할지라도, 늘 접하게 되는 먹거리에서 자신들과 가족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확산된 데 있다. 아울러 그것이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쉽게 그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많은 시민들의 직접 집단행동에 나서게 된 중요한 요인이다. 광우병쇠고기 의 위험과 불안 앞에는 돈의 힘을 빌려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극소수의 상층계급들을 제외한다면, 시민들 간의 연령, 지역, 성별, 소득에 있어 차이를 거의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은 보편적 성격을 갖는 이슈라는 설명이다. 

다른 사람들은 쇠고기이슈는 촉발요인에 불과하며 그것이 전부는 아님을 강조한다. 다른 이슈들 예컨대 대운하, 수도·의료 민영화 등 현 정부에서 계획되고 집행이 예정된 정책들이 하나같이 서민들의 불안과 우려를 자극했고 이것이 쇠고기 이슈를 기폭제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보다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춘 설명도 있다. IMF외환위기 이후 두 차례의 민주정부 동안 집권그룹들에 의해 언표화된 말과 달리 한국의 정치경제는 사실상 시장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로 지도되었고, 그로인해 시민들의 삶은 시장의 무자비함에 온전히 노출, 방치되어왔다. 그 결과는 중산층의 붕괴, 저소득층과 비정규직의 급증, 극소수 상층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노동인구의 소득과 고용불안 등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이다. 나아가 그것은 자살, 이혼, 강력범죄의 급증 등 사회해체 현상에 직면할 정도로 악화되어왔다. 유의미한 “정치적 제약” 없이 그리고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마저 생략된 채 지난 10년 민주정부들에 의한 사회경제정책의 문제들의 누적된 결과가 역설적으로 이명박정부의 집권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런 해석은 “민주파의 덫”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지난 10년 실제 진행돼 온 것은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근본주의적 정책과 그 결과였다는 점에서, 기실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의 문제의 핵심의 근원은 “더 많은 시장”에 있었는데, 새로 집권한 보수세력들이 이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채 “잃어버린 10년” “좌파정권 종식” 운운하며, 또 다시 “더 많은 시장”을 강조하며 과격하게 실행하니, 다수의 서민대중이 감내할 수 있는 어떤 임계점을 건드렸고 폭발했다는 것이다. 이상의 언급된 요인들 중 어떤 것이 보다 더 중차대한지 혹은 근본적인지 굳이 분간할 필요성은 크지 않다. 왜냐면 이들 모두가 현 사태의 한 측면들을 설명하고 있어서 뿐 아니라, 이번 사태는 이 모든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의 결과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난 6월10일 시청 앞에 운집한 수십만의 물리적으로 헤아리기 불가능한 ‘촛불’과 그 구성의 다채로움은 이명박대통령과 주변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혹은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단일의 지도(指導)나 특정의 이념과 이해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현재의 촛불집회라는 사태의 요인이 간명치 않고 복합적이라는 것, 그것이 어쩌면 여태껏 집권세력과 일부 보수신문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자충수를 남발하고 우왕좌왕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 글은 기존에 제시된 많은 해석들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그것이 작동하는 한국정치의 구조라는 정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거시적, 구조적인 설명을 제시하는데 있다. 이글은 기본적으로 이번 촛불집회를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의 결과이고, 그러한 현상을 표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규정한 최장집 교수의 이해와 맥을 같이한다(최장집 2008c, 1). 글은 문제를 정의하는 전반부와 대안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후반부로 구성된다. 먼저 전반부에서는 이번 촛불집회가 어떻게 절차적 수준에서의 한국 민주주의 작동의 문제로 설명될수 있나를 다룬후, 이에 대한 최장집의 구조적인 설명을 살펴본다.


2. 절차적 민주주의 관점에 입각한 한 해석

이 글은 이번 광범한 사람들의 자발적 촛불집회를 “한국 민주주의의 작동방식과 내용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가지며, 이를 위한 “시민들의 느슨하지만 강렬한 연대 혹은 직접행동”으로 해석한다. 어쩌면 혹자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민주주의”란 단어를 빌리는 이런 시도에 대해 소위 “밥 먹여주지 않는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유권자들의 뿌리 깊은 회의와 불신을 간과한 게 아닌가라는 비판을 제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번 사태가 갖는 폭발성과 보편성의 추동력은 한국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깊이 관련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짐작하는 것과 달리 소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관념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보다 여기서 한국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항의라 말할 때의 민주주의는 순전히 그것의 절차적 수준과 그 질에 국한된다. 민주화이후 심지어 그 이전시기에도 한국시민들에 있어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간의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한국의 시민들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준에서는 조금의 퇴보도 간과하지 않고 행동으로 나선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7년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와 이어진 노동계의 총파업이다. 물론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개정된 내용 역시 광범한 저항의 중요한 요인이었음에는 분명하지만, 노동계에 단기적 승리나마 안겨줄 수 있었던 핵심적 요인은 총파업에 대한 중산층들의 유례없는 지지였고, 이는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에 자행된 ”날치기”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에 영향받은 바 크다. 지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건 역시 동일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대다수 시민들에게 보수 야당들의 과반연합에 의한 다수의 폭정(tyranny of majority)으로 비춰졌고, 이에 대한 항의와 심판은 결국 당시 급조된 정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의회과반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번 사태가 민주주의의 문제라는 것이 비단 촛불집회 전반에 걸쳐 목격되는 경찰의 폭력과잉진압과 현 정권의 무리한 공안적 행태들에서 시민들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체취를 느껴서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의혹을 확신으로 전환시키는 한 상징에 가까운 것이다. 그보다는 시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이 최소한의 형식과 요건마저 갖추지 못한 채 결정되고 그러한 결정이후에도 끊임없이 미봉책과 속임수로 모면하려는 현 집권세력들의 한국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한 항의로 이해될 수 있다. 인수위시절부터 지속된 이명박정부의 행태가 시민들에게 각인시킨 한 가지 사실은, 현 정부에서 이뤄지는 중요한 의사결정의 당사자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 관료, 그리고 경찰-이 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민의 이익과 이해를 위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대의제 민주주의 절차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주권자인 시민들의 이해와 요구가 철저히 배제되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번 사태의 폭발성과 보편성의 핵심요인이라 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이번 촛불집회는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한국 시민들의 인식에 있어 두 가지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먼저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시민들의 이해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 단계 더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시민들은 대체로 최소요건의 절차 즉,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 내지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 명백한 하자(날치기)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직접행동에 나서는 정도의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선거를 통해 정당하게 집권한 정부라 할지라도 그것의 권력행사와 주요 정책결정이 선거 뿐 아니라 선거간의 일상적인 정치과정에서도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책임지고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특기할만 하다. 

여기에는 아마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첫째는 다음 선거에서의, 그것이 대통령이던 국회의원이던, 투표를 통해 현 정부를 심판할 기회가 너무도 멀리 있다는 절박함이다. 둘째는 행정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의회의 구성과 내용에 대한 실망이다. 알다시피 대선에 연이은 총선을 통해 집권여당이 과반을 차지하게 되었고, 제1야당인 민주당이 그간 보여준 무력함으로 인해 시민들은 그들을 의미 있는 정치적 반대세력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이 민주주의 작동에 대한 내용에 시민들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고, 이는 그 자체로 한국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학습하게 된 계기이자 성과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이번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더불어 이를 촉발시킨 이슈의 내용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간 정부와 여당 그리고 관료들이 관장사항으로 치부되었던 먹거리, 의료, 환경, 민영화 등의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한국유권자들이 처음으로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소위 “민생이슈”들이다. 한국유권자들의 삶과 관련된 구체적 이슈에 대한 정치적 반응은 다시 이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기존 정당을 자극하거나 혹은 새로운 정당을 출현시킬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역시 긍정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점은 “사회경제적 이슈를 매개로한 민주주의 작동방식에 대한 항의”가 대의제민주주의가 아닌 무언가, 즉 실질적 견지에서 체제수준의 변화에 대한 요구로 혼동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현 수준에서 볼 때 시민들 “다수”가 대의제민주주의, 자본주의경제체제, 심지어 신자유주의 혹은 무역개방 그 자체에 반대한다고 판단할 근거는 많지 않다. 따라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초점을 맞춘 보다 정치적인 해석은 이번 촛불집회를 대의제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의 예상되는 파괴적 결과에 대한 항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한국정치와 민주주의의 구조적 기반: 구조적 포퓰리즘

이번 촛불집회를 한국의 대의제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치 않는 것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로 이해할 때 앞서 소개한 대통령 개인, 개별이슈, 현 정부의 성격에 초점을 맞춘 개별적, 미시적 설명들은 그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문제를 대의제민주주의의 작동의 문제로 이해할 때, 그 원인은 더 이상 개별적인 것이기 보다는 한국정치구조와 제도의 근원적인 수준에서 발생하며, 비단 이명박정부만의 문제가 아닌 민주화이후 정부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이며 거시적인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그 제도들은 심각한 작동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나? 그리고 그것의 핵심내용은 무엇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 지난달 비평에 발표된 최장집의 설명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깊다(최장집 2008b)

그는 해당글의 서두에서 이번 사태의 중심에 “정당과 정당체제가 제대로 제도화 되지 못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며, 그것이 “리더십스타일이나 인적구성과 같은 개인적 구성요소들 보다는 더 큰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그가 구조적 측면에 집중하는 것은 “개인수준의 요소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요소이자 민주주의 제도가 작동하는 기반인 구조적 문제가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가 말하는 “정당정치를 약화시키는 구조적인 요인”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민주화이후 한국정치를 움직인 이슈의 문제이다. 둘째는 한국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있어 권위주의이다. 셋째는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구조의 문제이다. 먼저 이슈의 문제를 살펴보자. 그가 그간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이슈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정당의 제도화와 정치발전에 부정적 효과를 갖는 중심요인이자 제약요인으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 한국정치를 움직이며, 정당의 제도화와 정당간 갈등 및 경쟁을 포괄하는 “근본적” 두 이슈는 민족문제와 노동문제였다. 문제는 두 이슈가 제도정치에서 다뤄지는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그간 한국정치에서 민족문제는 과도하게 정치화 된 반면에, 노동문제는 거의 정치화되지 조차 못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두 이슈는 그 내제된 성격과 그것이 불러오는 정치경쟁과 갈등의 양상에서 큰 차이를 갖는다. 민족문제는 “나눌 수 없는 갈등”, 노동문제는 “나눌 수 있는 갈등”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전자의 이슈는 나눌 수 없는 이념적 열정과 가치관의 충돌을 핵심으로 하기에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영합적(zero-sum) 갈등을 만든다. 이와는 달리 후자는 기본적으로 나눌 수 있는 물질적 분배의 크기를 중심 내용으로 하기에 타협가능한 정합적(positive-sum) 갈등이 형성될 수 있는 이슈이다. 최장집은 민주화이후 한국정치에서 민족문제 즉 “남북문제‘, ‘대미관계‘를 둘러싼 갈등은 필요이상으로 격화돼 이데올로기적 적대를 조장하는 정치적 소재로 사용된 반면에, 보통사람들의 삶에 직결된 노동이슈는 제도내 정당정치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못해왔음을 강조한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노동문제가 한국의 생산체제가 자본주의체제에 기반하는한 제거될 수 없는 중심적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이 제도정치에서 다뤄지지 못한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사회경제적 문제가 다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경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슈는 관료와 테크노크라트들의 관장사항으로 전락해버리고, 이념적 극한대립을 야기하기 쉬운 민족문제가 정치의 중심에 위치할 때, 한국정치와 정당의 끊임없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

두 번째 측면은 정책결정의 행태적 측면에서 권위주의이다. 그가 볼 때 민주화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와 제도들이 작동하는 방식 즉 행태에서 민주화는 큰 진척을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그에게 쇠고기협상파동은 “한국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권위주의가 만들어 낸 결과”에 다름 아니다. 문제를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은 앞서 말했듯 비단 이번 쇠고기협상, 혹은 보수파 이명박 정부에 국한한 현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지난 정부에서 나타난 수많은 거대정책(mega-project)들, 예컨대 행정수도이전, 다양한 형태의 신도시 건설, 한미FTA, 의 입안과 집행 역시 이번 쇠고기협상과 거의 동일한 패턴을 가진 것이었고, 따라서 그는 그것을 “민주화에도 변하지 않는 특성”으로 이해한다. 그가 설명하는 정책결정과 집행에 있어 권위주의적 패턴은 소위 “박정희식 발전(성장)모델”을 이념혐으로 하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모습을 갖는다. 먼저 어떤 방식을 통해 하나의 권력이 수립되고, 최고결정권자는 소수의 테크노크라트들과 함께 국익(공익)을 정의하고, 이에 기반해 정책화, 프로그램화하여 일방적으로 발표한다. 이후 그 정책은 ”국익“으로 정의되기에 모든 국가, 준국가 기구들은 동원되어 홍보, 집행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 내 침해당하는 부분이익 혹은 반대의 목소리는 공권력과 주류언론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공격에 의해 억압되거나 규탄된다. 최초의 권력이 어떻게 수립되는가, 즉 쿠데타인지 선거인지를 제외한다면 이러한 내용을 갖는 방식이 권위주의의 그것과 어떤 의미있는 차이를 갖지 못한다. 민주주의체제하에서 권위주의적 작동방식의 승패는, 특정정부 혹은 리더에 대한 시민들이 얼만큼의 신뢰와 충성을 갖는지, 보수언론 혹은 공권력의 지원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혹은 해당정책이슈가 사회간 갈등라인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이런 방식이 민주주의체제하에서는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시기 만큼의 효율성을 이뤄내기 쉽지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셋째, 권력구조와 제도, 즉 강력한 국가와 대통령제의 문제이다. 대의제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선출해 통치를 위임하는 정치체제이다. 따라서 선거의 승리는 흔히 통치에 대한 국민적위임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최장집은 “통치의 권한부여‘ (authorization)과 ”국민적 위임“ (mandate)의 의미를 구분하며, 현 정부가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국민적 위임을 당연시 여기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인식은 한국의 강력한 국가와 대통령제가 만들어내는 조건에 영향 받은 바 크다. 한국에서 제도적, 헌법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잘 발달된 관료행정체제와 접맥돼 강력한 통치자로서의 인식이 확산돼있다. 여기에다 약한 입법부와 강한 집행부라는 권위주의시기 만들어진 권력구조는 민주화이후에도 여전히 크게 변화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이런 조건은 정치과정과 사회로부터의 정치적 제약이나 권력부서간의 상호견제와 균형에 구속되지 않는 대통령, 그의 권력행사와 권력관념을 만든다. 문제는 강력한 국가기구와 대통령 그리고 집행부의 압도적 우위라는 조건은 지난 노무현정부시기 열린우리당과 현정부 초기 한나라당에서 나타나듯이, 정당의 능력과 기능 그리고 대안적 리더쉽의 형성을 크게 제약하여 결국 정당의 자생력은 필연적으로 상실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 같은 성격을 갖는 제도적으로 강력한 대통령과 제도화의 수준에서 극도로 불안정한 허약한 정당체제가 만날 때 만들어진 특징적 현상을 “구조적 포퓰리즘”으로 개념화했다. 그것이 구조적인 것은 “강력한 대통령과 강력한 국가, 다원적 자율적 구조를 발전시키지 못한 채 국가헤게모니에 압도당하는 허약한 시민사회, 그리고 이에 기초해있는 허약한 정당체제”가 특징을 이루는 조건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때, 포퓰리즘적 행태는 항상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포퓰리즘인 것은 정치과정에 있어 사회의 이익과 요구의 투입의 기능을 수행하는 정당과 시민사회의 결사체들이 허약하고 중간매개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대통령이란 최고권력과 시민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형태로든, 투입의 방향에서든 산출의 방향에서든, 끊임없이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이렇게 이해할 때, 이번 쇠고기협상 뿐 아니라 지난 정부에서 결정된 한미FTA는 결국 시민사회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힘의 균형, 공론장에서 이성적 토론, 정당에 의한 정치적 경쟁 등 대의제민주주의가 내장한 의미있는 견제력이 부재하거나 작동않는 상태에서 역사적, 제도적으로 형성된 강력한 대통령과 국가권력이 결합할 때, 즉 구조적 포퓰리즘하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이번 쇠고기 협상 혹은 지난정부의 한미FTA 이외의 것이 되기 어렵다.

Ⅱ. 대안을 위한 사전적 탐색: Levy, Lowi, 최장집의 논의를 중심으로 국가-시민사회 비교적 관점에 위치시키기

앞서 이글의 전반부에서 이명박정부가 집권초기에 봉착한 소위 촛불집회정국이 한국의 정치와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강력한 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 혹은 구조적 포퓰리즘으로 요약될수 있는 한국정치와 민주주의의 구조적 조건의 결과임을 보았다. 이글의 후반부에서는 문제에 대한 대안마련을 위한 사전적 탐색을 위해 국가-시민사회의 관계, 정책결정과정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최장집, 레비(J. Levi)와 로위(T. Lowi)의 논의를 리뷰한다. 리뷰의 문제의식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먼저 한국의 국가-시민사회의 문제를 한국적 상황으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비교적 관점에 위치시켜 이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둘째, 이를 통해 한국의 국가-시민사회의 관계가 지향해야할 변화의 방향과 이니셔티브를 포착하는 것이다.

1.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의 부활
이번 촛불집회는 여러모로 지난시기 운동, 특히 87년 6월항쟁과 비교할 때 특기할만한 것으로 간주된다. 특정 조직과 단체가 주도하지 않는 자발성, 광범한 연령, 계층이 참가한다는 참여의 보편성과 광범함, 항의와 의사표현 방식에 있어 비폭력성과 첨단성 등이 지적되었다. 이런 요소들에 주목한 다양한 학자들이 “디지털 민주주의”, “직접(참여)민주주의”, “제4의결사체” 등의 별칭의 헌사로 이어졌다. 이런 시민들의 인상적이고 전례없는 움직임은 기존 제도정치권의 무력함과 곧잘 비교된다. 여야당 할 것 없이 한국의 제도정당들은 현정국의 거리에서, 의회에서 제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 사태에 대한 정치적 대안과 이를 위한 이니셔티브는 고사하고 의미있는 발언과 논평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집권여당은 청와대의, 야당은 거리의 움직임을 간신히 뒤쫒으며 이를 수습하느라 급급하다. 한국민주주의와 정치의 구조적 조건이 가능케 한, 의미 있는 정치적 제약과 사회적 합의로부터 벗어난 강력한 국가의 광폭함은, 다시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제도정치로부터 부활된 거리의 정치로 쏠리게 한다. “제2의민주화”, “부활된 거리의 정치”, “다시 운동인가”의 표제들이 진보, 개혁적 논의에 넘쳐난다.

먼저 시민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전적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시민사회 역시 민중, 시민 등의 개념과 아울러 민주화운동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민사회의 부활”로 일컬어졌던 현상의 한국판이었다. 그것은 민주화이행기 권위주의하에서 억압되고 탄압되던 시민권과 자율적 집단들이,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봉기와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민주화이행기 통해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정치공간과 이슈들을 회복하여, 다시 부활하게 된 시민사회를 의미한다. 최장집은 올해 초 열린 시민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지난 민주화 20년의 변화를 살펴보았다(최장집 2008a). 그는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민주화시기 “강력한 국가 대 강력한 시민사회”, 민주화이후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 최근 “국가에 선별적으로 흡수된 시민사회”에 묘사했는데, 그의 핵심은 결국 민주화이전과 이후에도 강력한 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의 지속이 민주화이후 보편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국가에 반하는 강력한 시민사회 내지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라는 규정은 당시 폭발적으로 분출된 “운동”에 영향받은 바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운동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는 국가에 대해 자율성을 갖는 사회적 영역을 지치한다. 그것은 공적권력이 행사되는 국가영역과도, 가족, 시장과 같은 사적영역과도 위계적으로 구별되는 국가와 사적영역 사이의 중간층위의 영역이다. 여기에 여러 수준 형태의 자율적 이익결사체, 공익적 기구들, 운동, 그리고 정당이 포함된다(최장집 2008a). 여기서 정당이 시민사회에 들어가느냐 아니냐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정의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필립 슈미터의 네 가지 요건중 하나인 국가권력을 찬탈하려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위배된다는 점에서, 정치사회를 구분해 위치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정당이 사적이익과 공적이익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해, 사적이익들이 공적문제로 전환하는 기능을 핵심으로 한다 할 때, 시민사회의 논의에서 배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문제는 한국의 시민사회, 그리고 그 담론 역시, “시민사회의 부활”이라는 민주화이행기의 강력한 운동의 분출에 크게 압도당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사회”란 단어가 민주화이후 운동이 점차 약해지면서 “시민운동” 이상의 적극적 의미를 갖지 못한채 그 사용빈도가 확연히 감소되어 온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는 한국에서 시민사회가 주로 “운동”에 국한해 협소하게 사용되어왔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촛불집회 정국에서 다시 주목받고 운위되곤 하는 “시민사회” 역시 이 같은 기존의 협소한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이번 촛불집회를 강력한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 그리고 강력한 대통령제라는 한국민주주의의 구조적 조건이 만들어 낸 작동방식의 문제로 이해할 때, 대안 혹은 해결은 구조적 조건들을 변화시키는 이외의 것이기는 어렵다. 그것은 결국 강력한 국가를 약화시키는 한편, 허약한 시민사회를 강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시민사회의 강화가 단순히 협소하게 운동으로서만 한정되어선 안 된다. 운동의 강력함은,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던 그것은 제도화되지 않은 시민들의 직접적 힘의 분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 직접적으로 강력한 시민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글에서 말하는 강한 시민사회는 보편적 기준에서 다양한 이익결사체와, 지역적, 사회적 중간매개 조직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 강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문제는 어떤 국가-시민사회의 관계를 만들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2. 시민사회 - 돈 많은 삼촌

좋은 시민사회가 좋은 정치 나아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데 별다른 이견이 있을 순 없다. 활력있는 시민사회는 민주정치 뿐 아니라 경제적 실적, 그리고 민주화/시장경제로의 이행에 필수적인 요인으로 다뤄지고 있다. 민주정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기여를 레비의 논의를 옮겨본다(Levi 1999, 1-3).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시민사회의 역할은 국가권력의 견제이다. 활력 있는 시민사회는 권력을 분산시켜, 시민들이 전제정에 맞서도록 하는 필수적인 보루를 제공한다. 또한 시민결사체들은 사회내 존재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코자 하는 국가의 욕망을 제어한다. 두 번째로 정책결정과정에 기여하는 바도 크다. 다양한 결사체들과 경쟁하는 이익들은 정책입안자들에게 더 많은 정보와 다양한 관점들을 제공한다. 국가의 정책이 (이익들간) 협의와 타협의 산물이 될 때, 그 정책의 정당성은 높아지고, 그 집행에 있어 순응도 역시 높아진다. 아울러 다양한 형태의 준공적 기구와 사회제도들은 국가의 부담, 소위 정부의 민주적 과부하를 감소시킨다. 세 번째로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적 가치의 학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시민적, 정치적 결사체의 참여를 통해 시민들은 타협과 주고받는 기술을 습득한다. 나아가 그것은 시민스스로의 시민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증대시키고 이는 다시 더욱 적극적인 정치적, 결사체적 활동에 나서게 만든다. 넷째, 좋은 시민사회는 좋은 경제에도 필수적인데, 활력 있고 잘 조직된 시민사회는 국가의 정책 이니셔티브가 시장적, 사회적, 지역적 결사체들의 이해와 잘 조응케 만들어 국가지시의 과도함을 제어한다. 다섯째, 시민사회는 단순히 국가행위에 저항하는데 그치지 않고, 공적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 대안적 기제를 제공한다. 중간매개 결사체들로의 공적책임의 이양은 중앙집권적 관료체계에서 나타나는 집단행동과 무임승차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는 기업활동에도 기여한다. 활력 있는 시민사회가 가져오는 신뢰와 호혜성의 증대는 기업의 거래비용을 낮추고, 내외적 유연성을 증대시킨다(Levy 1999, 2-3). 

그러나 이글이 주로 의존하는 레비의 논의의 핵심은 코헨과 로저스(Cohen & Rogers) 푸트남(Putnam), 겔너(Gellner)등 주류 시민사회 이론가의 논의에 더해, 시민사회의 덕(virtue)을 추가하는데 있기 보다는 하나의 맹점을 지적하는데 있다. 그의 논의는 1980, 90년대 프랑스 경제정책 결정과정에서 발견되는 국가-시민사회의 관계의 변환(transformation)과 정치적 시도를 경험적 대상으로 한다. 그가 요약하는 시민사회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 연구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참여, 시민적 개입과 대중동원의 덕성을 찬양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좋은 시민사회가 존재하게 되었는가의 이해에 있어 피동적(passive)이며 운명적(fatalistic) 입장을 갖는다. 즉 “모든 사람들이 좋은 시민사회를 사랑하지만 아무도 어떻게 그것을 건설할 수 있는지 예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Levy 1999, 4).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는 “돈 많은 삼촌”이다. 있으면 참으로 좋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운에 달려있다. 그가 보기에 시민사회에 대한 지배적 접근은 무엇보다도 시민사회를 재건설, 재형성, 혹은 규제할 수 있는 “정치의 가능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것의 피동적, 운명적, 그리고 반정치적 관점은 다음의 3가지 관점에 기초한 것이다. 첫째, 어떤 나라의 사회적 자본의 저량(stock)은 운명적(pre-determined)이며 불변한다. 즉 시민사회는 유전되어 온 것이지, 구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푸트남의 북부와 남부 이태리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한 공동체는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형성할 수 없고,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 힘에 의해 축복(혹은 저주) 받는다. 둘째, 시민사회는 단순하게 이분적(binary) 변수로 묘사된다. 셋째, 시민사회는 국가와 대체로 영합적(zero-sum)적 관계를 갖는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논의의 핵심은 “정치는 시민사회를 만들거나 영향을 끼칠 수 없고, 먼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반정치적, 반국가적인 지배적 이해에 도전하는데 있다. 그리고 1980, 1990년대 프랑스의 경제정책결정에서 변환과정은 이런 관점을 평가할 좋은 기회가 된다. 왜냐하면 그 시기 지시경제(dirigisme)로 압축되는 경제발전 모델은 독일을 이념형으로 한 결사체적 자유주의(associational liberalism)로의 대전환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기 때문이며, 그 핵심은 경제정책결정의 권한을 대폭적으로 사회적, 지역적, 시장적 결사체에 이양하는데 있다.
이글의 목적과 관련해 그의 논의는 두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한국과 유사한 국가-시민사회 관계를 지니는 프랑스의 시민사회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시도와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의 논의의 비교의 준거가 되는, 독일의 연방제, 북유럽의 코포라티즘, 일본의 경험은 프랑스 뿐 아니라 한국에도 중요한 참고지점이다.

3. 국가-시민사회의 다양성과 정치의 중요성

그의 경험적 논의의 결론은 다소 그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일는지 모른다. 왜냐면 결론적으로 그가 지시경제의 결사체적 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실패가 시민사회론자들의 주장처럼 숙명 혹은 먼 역사적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1980, 1990년대의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었음을 비교적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를 통해 시장적, 사회적, 지역적 다양한 결사체와 제도들은 결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정치적인 과정과 기획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 또 재형성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프랑스의 포스트-지시경제형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험난한 과제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시민사회론이 갖는 숙명론적 시각은 사회적, 지역적 제도들의 가소성과, 그것의 객관적 힘과 주관적 행태를 변모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시민사회를 재생하고 동원하는데 있어 국가와 정치의 역할을 개념화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하기에 그의 결론은, 국가가 필연적으로 시민사회의 적도 아니며, 그것의 제거가 시민사회를 되돌리는 데 적절한 처방이 되지도 못한다. 그보다는 국가의 적극적 보조적(supportive) 역할에 의해서 시민사회의 재생과 활성화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민사회를 재건설하는 것은 몰-국가적(state-free) 혹은 반국가적 과정이 아니며, 철저하게 의식적인 국가와 정치의 능력과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독일 연방주의>
레비에 따르면 독일은 특히 지방분권의 측면에서 프랑스가 지향한 결사체적 자유주의의 이념형적 모델이었다. 주지하다지피 독일의 주(Lander)와 주단위 공적, 사적 결사체들은 여러 공공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있어 막강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어, 지방분권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레비는 전후 독일의 상황은 시민사회 지배적 관점과 달리 축복받은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이후 지정학적, 민주적, 선거적 요인들과 정치의 고도의 계산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밝힌다. 독일의 경험에서 그는 독일의 주는 독일 정치와 정책결정과정에서 중요한 힘(forces)이 되었고, 그것은 역사로부터 출현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과정은 단순히 국가의 철수가 아니라 공격적인 국가지원의 변환을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즉 불길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주가 강력한 경제적 행위자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데 있다는 것이다.

<북유럽 코로라티즘>
두 번째 비교의 사례는 북유럽의 코포라티즘이다. 그것은 국가가 비국가 행위자에게로 준공적 기능들을 이양하는 메커니즘으로 요약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노조, 사용자 단체들은 인플레 억제, 노동훈련, 해고조절, 신기술 도입, 복지국가 개혁, 건강-안전-노동입법의 수립과 집행 등의 다양한 준공적 권위를 수행한다. 이에 고무된 스트릭과 칼은 이것을 국가와 시장 규제를 대체하는 진정한 사적이익정부(private interest government)로 묘사하기도 했다. 레비는 이러한 코포라티즘 역시 결코 자기발생적(self-generating)인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데, 무엇보다도 자율적결차체들의 형성에 국가의 개입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코포라티즘적 제도를 상징하는 중앙임금교섭의 안착은 결국 국가가 사회적 파트너들에게 임금자제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복지프로그램, 제도적 자원(법적, 조직적, 행정적)의 지원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독일의 장인제도의 역사적 기원역시, 국가가 독점적으로 특정의 조직에서 배타적 권한과 지원을 부여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독일의 장인제도는 정교한 국가의 노력과 디자인에 의해 조직되고 유지되어 온 것이다. 저자기 보기에 프랑스의 전환의 실패는 국가가 법적, 재정적, 정책적 자원을 지원하여 그런 실행에 책임 있는 조직을 키우기 위해 헌신하기 보다는, 단순히 경제적 규제로부터 철수하고, 그 빈공간을 기업과 노동조직 채워주기를 기다렸다는데 있다.

<일본 국가주의>
레비의 논의에서 독일과 북유럽 경험은 국가가 시민사회의 적이기보다는 중요하고 권한부여적 동맹(ally)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등장한다면, 일본의 경험은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상보성(complementarity)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즉 그것은 국가-시민사회의 관계가 상쇄적 관계에 있지않고 양자의 권력이 함께 증대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프랑스와 일본 모두 국가중심적 경제계획모델의 두 사례이지만, 프랑스와 달리 일본의 산업정책이 말해주는 것은 잘 조직된 재계와 지역 파트너와 협력과 국가주의적 발전전략이 양립가능하다는 것임을 지적한다.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나? 저자가 보기 양국의 정책결정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다른데, 그것은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분할된 시민사회를 가진 반면에, 일본은 특히 재계를 중심으로 구조적, 제도적으로 강력한 시민사회라는 환경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일본재계의 결사체는 바로 수직적, 수평적으로 촘촘히 형성된 계열(Keiretsu)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국가의 의식적 정책의 산물이었음은 물론이다. 프랑스 관료들이 산업결사체들은 약화시키고, 우회하고, 무시한데 반해, 일본의 입안가들 재계 결사체와 지역파트너들을 유용한 동반자로 여겼다. 즉 일본의 광범한 국가개입, 특히 경제부문으로의, 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이 일본 재계로부터 용인되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다시 재계의 이익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며, 국가개입 자체가 공적, 사적 그리고 행정적 행위자들간의 정교하고 꾸준한 협상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레비의 논의에서 일본은 재계와 결사체간의 파트너쉽을 확충시킴으로써 경제와 사회에 개입하는 능력을 키워 온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에반스의 논의를 빌러 베버적 자율적 관료국가는 단순히 효율적 경제정책을 산출하는 것만으로 불충분하며, 그것은 반드시 사회적 이익(재계)과 긴밀한 결속을 가져야, 즉 배태(embedded)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Ⅲ 전체결론을 대신하며

결론은 글의 내용을 재요약하기 보다는 빠진 부분을 짚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번 촛불집회를 한국민주주의와 정치구조라는 구조적 조건에 집중해 접근할 때, 결국 문제의 초점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글은 레비의 논의의 중심으로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몇 가지 모델과 특히 시민사회를 재형성 하는데 있어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쳤다. 하기에 논의가 빠진 부분은 강력한 국가와 강력한 대통령제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이런 변화를 만들어갈 최초의 이니셔티브로서의 정당에 대한 논의, 그리고 이에 대한 비교적, 경험적 분석일 것이다. 


참고문헌

최장집. 2008a. "민중에서 시민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04』강의안(1/26∼2/23).
최장집. 2008b. "이명박정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나? 민주주의하에서 국가, 대통령제, 정당의 문제“, 계간 비평 19호(여름호).
최장집. 2008c. “촛불집회가 제기하는 한국민주주의의 과제”. 경향신문사 주최 긴급 시국대토론회 『촛불집회와 한국민주주의』개회사 (2008/6/16).
Levy, Jonah 1999. Tocqueville's Revenge - State, Society, and Economy in Contemporary France. Havard University Press

2008년 6월 10일 화요일

[긴글] 한국 유권자에 대한 지배적 해석 비판

<from daum blog, 작성일 2008.6.10>

한국유권자에 대한 지배적 해석 비판

그간 언론인, 정치평론가, 학자, 정치인 그리고 언론인들의 한국 시민유권자들에 대한 지배적 해석은 유권자의 비합리성과 타락을 강조한다. 이런 해석의 가장 큰 맹점은 무엇보다도 유권자들에게 매 선거 시 주어진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분명히 한국의 유권자는 변화지향적이고 개혁적인, 그러면서도 당선가능하고 능력있는 정당을 지지하지도 또 키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유권자의 잘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손에 쥔 선택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이후 한국의 유권자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현실가능한 최대치를 집단적으로 선택해왔다고 평가한다. 물론 그것은 혹자들의 기대에는 못 미치는 온건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경향은 지난 2002년 노무현대통령의 당선과 2004년 열린우리당의 의회과반으로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한 것은 작년의 이명박대통령의 당선과 지난 총선에서의 한나라당의 과반이다. 

그러나 이 같은 집합적 결과가 한국유권자의 보수성과 비합리성을 반영한다고 보긴 어렵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듯 주어진 선택지와 크게 관련된다. 먼저 유력후보 가운데 능력 있고 상대적으로 변화지향적인 그래서 한국의 시민에게 “이상적인” 후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지지는 강요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개별 유권자가 투표장에서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갈등구조를 얘기할 수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유권자는 하나의 종이돌(투표용지)을 통해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고민에 직면한다. 하나는 지난 정부(대통령이나 집권정당)의 공과를 평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좋은 정부를 선택하는 것이다. 한 가지 수단으로 두 역할을 수행해야 대의제 민주주의가 부여한 내재적인 갈등이라 할 것이다. 비단 우리 뿐 아니라 서구의 연구에서 보여주는 것은 유권자들이 대체로 첫 번째 역할에 자신의 수단을 사용하는 경향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의 연구는 후자의 목적에 사용하는 것보다 그것이 합리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쉽게 말해 좋은 인물(정부)를 뽑는 것은 쉽지 않고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한 유권자가 주어진 정보를 꼼꼼히 따져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그 정당이)가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정치를 할는지 알 수 없다. 미래는 불확실하며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유권자는 선거 시 현임정부의 공과에 대해 정확히 심판함으로써, 앞으로 당선되는 후보나 정당이 반면교사를 삼아 유권자들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렇게 볼 때, 지난 대선의 결과는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간의 소위 민주개혁세력의 실정(失政)에 실망하고 화난 유권자들이 다른 유력 정당 후보에게, 그 후보가 변변치는 않더라도, 지지를 보내는 행위는 합리적이다. (노무현 정부의 그것이 실정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인지 논쟁하지 않는다. 왜냐면 필자의 논리는 당시 대선당시 노무현 정부, 민주당 10년에 대한 유권자들의 평가는 형편없이 낮았다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지배적 분석은 종종 기권자에 대한 분석을 결여하다. 지난 선거결과는 기권율을 감안해본다면 보수당과 후보의 압승이 아니다. 이명박후보의 득표율 30%는 민주화이후 당선된 대통령 가운데서도 최저치이며, 그리고 한나라당이 패배한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이 얻었던 득표율보다 낮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민주화이후 최초로 기권그룹(37%)보다도 훨씬 밑도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유권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보여주는 것은 과거정부의 실정에 대한 평가가 압도한 회고적 투표, 그나마도 상당한 유권자가 선택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즉 한국의 유권자는 비합리적이지도 않으며, 타락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긴글] 정점에 다다른 촛불시위 무엇을 할 것인가?

<from daum blog, 작성일 2008.6.10>

정점에 다다른 촛불시위 무엇을 할 것인가?
  
1. 정점에 도달한 촛불시위

촛불시위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어쩌면 그 정점은 지난 6월6일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다가오는 6월10일 조직의 힘을 빌려, 광고의 힘을 빌려, 입소문과 수많은 구경꾼의 힘을 빌려 훨씬 더 많은 인원을 동원 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6월6일 이전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모습일 것이란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누군가가 학수고대해온 촛불시위의 끝은 의외로 빨리 올는지 모른다.

따라서 이글은 어쩌면 많은 이들의 기대와 바람에 반할는지 모른다. 특히 지난 10년간의 내상으로, 유권자 시민의 보수성과 온건함에 대한 절망으로, 사태의 전개를 그저 관망하다, 뒤늦게 눈이 휘둥그레져 죽기 전엔 다신 못 볼 것이라 여겼던 광화문 일대에 펼쳐진 이 해방공간을 만끽하고 있는 조직운동세력들에겐 참으로 섭섭한 얘기일 것이다. 그들에게 필자의 글의 첫 단락은 그래서 불길하고, 재수 없고 혹은 불온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당신들이 중요시하는 가치와 목표들에, 물론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차이라 하면, 그다지 과격하지 못하고, 상상력이 뛰어나지도 않으며,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기에 스스로 냉정하고 무책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굳이 사태의 주변자인 당신들에게 서두에서 한 마디 하는 이유는, 앞으로 그 누구보다 당신들의 행동들이 사태전개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신들과 나의 차이는 아마도 전술상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기를 고대한다.

이글은 지난 한달 간 전개된 필자나 당신들이 아닌 시민들이 내걸어온 여정을 돌아본다. 그리고 오늘의 위치를 점검한다. 그리고 하나의 끝을 제안한다. 그러나 미리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가 말하는 끝은 특정의 시공간상의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점이기보다는 선이다. 하기에 그 끝은 지금까지 힘들게 얻어온 것을 구체화하고 시민들이 승리하는 경험을 갖는 시작이다.

2. 어떻게 여기까지 올수 있었나?

무엇이 현재의 사태를 가능케 했나? 이념적으로 보수화되고, 지역주의와 사사로운 개인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최소한의 도덕성과 자질 그리고 기본적 매력조차 갖추지 못한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뽑을 만큼 비합리적이고, 타락한 것으로 “묘사되었던” 한국의 시민유권자들은 어떻게 백일도 채 지나지 않아 촛불하나 들고 거리로 몰려나와 “이명박 퇴진”을 서스럼 없이 외치게 되었나?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나? 가장 먼저 이 질문이 암시하듯, 그간 언론인, 정치평론가, 학자, 정치인 그리고 언론인들에 의해 유포되어온 한국 시민유권자들에 대한 이 같은 지배적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글의 전반적 흐름과 의도를 흐리지 않기 위해 한국 유권자에 대한 지배적 해석과 이에 대한 비판은 글 뒤로 돌린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한국의 유권자들에 대한 일반적 시각과는 달리, 선거 시 그들에게 제공된 선택지와, 투표행위 그 자체가 내재한 갈등구조가 고려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인 광범한 기권에 대한 분석이 포함된다면, “비합리적이고 타락한” 유권자라는 지배적 해석은 지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두 번의 선거결과가 말하는 것은 선거당시의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평가 즉 회고적 징벌이 압도했다는 것과, 이명박후보에 대한 선거지지 역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취약하기 그지없다는 점이다. 즉 한국의 유권자는 비합리적이지도 타락하지도 않았다. 이 처럼 교정된 시각은 이번 사태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반대방향으로의 성급한일반화에 대해 경고한다. 특히 야당과 조직운동세력들에서 이런 경향은 쉽게 발견된다. 그들은 갑자기 유권자 다수가 자당의 지지자가 된 것처럼 오인하거나, 혹은 대중들의 급진성, 좌경성이 크게 고양되어 자신들의 운동의 이념과 가치에 광범한 대중들이 동의하는 듯 착시하고 또 흥분한다. 이들은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저지른 동일한 오류를 범할 확률이 높다.

본격적으로 사태를 여기까지 밀고 온 추동력을 살펴본다. 이번 사태에 대해 이미 방송과 신문지면들 그리고 많은 정치논평자들에 의해 수많은 원인과 설명들이 제시되었다.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설명은 이명박대통령 개인적 특성에 집중한다. 그의 CEO라는 출신배경, 국정운영과 기업운영간의 차이의 몰이해, 잇따른 현(現) 정부의 페쇄적, 상층편향적 인적구성 그리고 전혀 정치지도자 답지 않은 말과 행동거지 등의 개인적 스타일 등, 모두 일리가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이슈에 집중한다. 쇠고기 이슈는 한 마디로 치명적인 것으로 알려진 광우병 위험이 완전히 통제, 제거되지 않은 채 미국산 쇠고기를 들여오겠다는 정부의 결정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그것이 파괴적인 이슈인 이유는, 정부의 발표대로 그 확률이 극히 낮다고 할지라도, 늘 접하게 되는 먹거리에서 자신들과 가족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우려를 확산된 데 있다. 아울러 그것이 한 개인의 노력으로 쉽게 그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많은 시민들의 강도 높은 저항을 불러왔다. 또한 광우병쇠고기 수입의 위험과 불안 앞에는, 돈의 힘을 빌려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극소수의 상층계급들을 제외한다면, 시민들 간의 연령, 지역, 성별, 소득에 있어 차이는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보편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쇠고기이슈는 촉발요인이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강조한다. 다른 이슈들, 예컨대, 대운하, 수도·의료 민영화 등 이 정부에서 계획되고 집행예정이 정책들이 하나같이 서민들의 불안과 우려를 자극했고 이것이 쇠고기 이슈를 기폭제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보다 구조적인 설명도 제기된다. 길게는 지난 10년 혹은 짧게는 노무현 정부 시절, 집권그룹들에 의해 언표화된 말과는 달리 한국의 정치경제는 IMF위기 이후 사실상 시장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로 지도되었고, 그로인해 시민들의 삶은 시장의 무자비함에 온전히 노출, 방치되어 왔다. 그 결과는 중산층의 붕괴, 저소득층의 만연, 비정규직 급증, 극소수 상층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노동인구의 소득과 고용불안 등을 핵심으로 하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다. 나아가 그것은 자살, 이혼, 강력범죄의 급증 등 사회해체로 이어졌다. 즉 이 설명은 유의미한 “정치적 제약” 없이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도 생략된 채 지난 10년 민주정부들에 의한 사회경제정책의 문제들이 누적된 결과가 역설적으로 이명박정부의 집권으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설명은 “민주파의 덫”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즉 지난 10년 실제 진행된 것은,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근본주의적 정책과 그 결과였다는 점에서, 기실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의 문제의 핵심의 근원은 “더 많은 시장”에 있었는데, 새로 집권한 보수세력들이 이를 모른채 (알고 싶지 않은채) “잃어버린 10년” “좌파정권 종식” 운운하며, 또 다시 “더 많은 시장”을 강조하고 과격하게 실행하니, 다수의 서민대중이 감내할 어떤 임계점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글에서 이상 언급된 요인들 가운데 어떤 것이 보다 더 중차대한 것인지, 혹은 근본적인 것인지 굳이 분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면 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일리가 있음을 넘어서 이번 사태는 이 모든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6월6일 시청 앞에 운집한 20만이라는 물리적으로 헤아리기 불가능한 촛불과 그 다채로움은 이명박대통령과 주변사람들이 생각하듯 혹은 생각하고 싶듯, 단일의 지도(指導)로, 특정한 이념과 이해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사태의 요인이 간명치 않고 복합적이라는 것, 그것이 어쩌면 여태껏 집권세력과 일부 신문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충수를 남발하고 우왕좌왕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필자는 하나의 설명을 더하고 싶다. 그것은 이번 광범한 사람들의 자발적 촛불저항이 “한국 민주주의의 작동방식과 내용에 대한 항의”이며, 이를 위한 시민들의 느슨하지만 강렬한 연대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필자가 추상적이고 막연한 “민주주의”를 가져온데 대해, “밥 먹여주지 않는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유권자의 염증을 몰라서 그러는가 하며 타박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폭발성과 보편성의 추동력은 필자가 보기에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내용과 깊이 관련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기대하는 것과 달리 소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관념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필자가 한국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항의라 말할 때의 민주주의는 절차적 수준과 그 질이다. 민주화이후 심지어 그 이전에도, 한국시민들에게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약간의 퇴보도 간과하지 않고 행동한다. 대표적으로 1997년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이다. 물론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개정된 내용 역시 저항의 핵심요인이었음에는 분명하지만, 중산층을 포함한 폭넓은 대중의 분노와 이에 대한 노동계의 총파업투쟁에 대한 지지로 이끈 것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자행된 ”날치기”라는 형식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시 동일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보수 야당들의 과반연합에 의한 다수의 폭정(tyranny of majority)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심판이었다. 이것은 급조된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원동력이었다. 이번 사태가 민주주의의 문제라는 것이 비단 6월1일 경찰의 폭력진압에서 시민들이 과거 5공의 체취를 느껴서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 상징이었다. 그보다는 시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절차와 내용으로 결정되는 것. 그리고 그 결정이후에도 이를 기만과 속임수로 모면하려는 현 집권세력들이 한국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한 항의로 해석되어야 한다. 인수위 이후 지속된 이명박정부의 행태가 시민들에게 각인시킨 요점은 현 정부에서 이뤄지는 중요한 의사결정의 당사자들-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 관료, 그리고 경찰-이 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민의 이익과 이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주권자인 시민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를 비추기보다는 기만하고 조롱한데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즉 민주주의 절차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주권자들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 사태의 폭발성과 보편성의 핵심요인은 아닐까? 특히나 의미 있는 것은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시민들의 이해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 단계 더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시민들은 대체로 최소요건의 절차 즉,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 내지 의사결정에 있어 기본요건에 있어서의 큰 하자가 아니라면 크게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선거를 통해 정당하게 집권한 정부라 할지라도, 그것의 권력행사와 주요 정책결정이 선거 뿐 아니라 일상적인 정치과정에서도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책임지고 응답할 것을 요구한 점이다. 아마도 이것은 다음 선거, 그것이 대통령이던 국회의원이던, 투표를 통해 현 정부를 심판할 기회가 너무도 멀리 있다는 절박함과, 변변한 야당마저 갖고 있지 못한 무력함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어쨌든 이점과 관련해서 이번 촛불시위는 한국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학습할 계기이며, 그 자체로 성과라 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더불어 이를 촉발시킨 이슈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다. 그간 정부와 여당 그리고 관료들이 알아서 관장하는 것으로 치부되던, 쇠고기, 의료, 환경, 민영화 등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한국유권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소위 “민생이슈”들이다. 한국유권자들의 삶과 관련된 구체적 이슈에 대한 정치적 반응은 다시 이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기존 정당을 자극하거나 혹은 새로운 정당을 출현시킬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이슈를 매개로한 민주주의 작동방식에 대한 항의가 대의제민주주의가 아닌 무언가의 실질적 수준에서의 요구로 혼동되어선 안된다. 현 수준에서 볼 때 시민들 다수가 대의제민주주의, 자본주의경제체제, 심지어 신자유주의와 무역개방 그 자체에 반대한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요컨대 필자의 촛불시위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말하는 것은 대의제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의 파괴적 결과에 대한 항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무엇이 문제인가?

6월 8일 촛불시위에 참가했다. 그것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이리저리 광화문 앞을 돌아본 필자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고, 불안감은 커졌다. 사실 그것이 이글을 쓰게 만든 직접적 요인이다. 그날의 광경을 묘사해본다. 그날 모여든 시민들은 더 이상 즐겁고 유쾌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각하고 무거웠다. 시민들은 공권력하고 부딪힌 만큼이나 빈번하게 또 강렬하게 시민들끼리 부딪혔다. 그들 간의 작은 이견들은 쉽게 심각한 갈등과 충돌로 전화되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 있었다. 이전까지 집회현장을 채웠던 어린 학생들의 재기발랄함과 “까르르” 하는 웃음들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근심이 가득했다. 그곳은 바로 어제까지 민주주의의 실험장으로 극찬해 마지않던, 다채로운 개인과 집단들의 다양한 요구와 퍼포먼스의 장이 아니었다. 엄숙한 학생회의 깃발행렬이 재현되었고 어정쩡하게 위치한 방송차량의 획일적 구호와 노래가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곳곳에서 일부 시민들이 전의경들을 대상으로 또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과도한 적의와 악다구니가 퍼부어 대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그러면서 촛불집회 참여자는 자발적 시민에서 조금씩 동원된 대중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구호와 손짓은 힘을 잃고 의미 없이 반복되었다. 가장 큰 특징은 시위대와 시민간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 촛불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시위참가자와 인근에 놀러온 시민 간에 구분선이 존재하지 않다는 점이다. 시청으로, 종로로 그리고 광화문으로 볼일 보러 나온 사람, 놀러 나온 사람 모두 잠재적 시위대였다. 그들은 볼일이 끝나면, 술자리가 끝나면 쉽게 시위대에 어울렸고, 시위대 역시 언제든지 부담 없이 그 자리를, 다른 동료들에게 맡겨두고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간에 분획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나?

촛불시위에 참여한 여러 시민과 단체 간의 이견(異見)과 시위의 모습이 변화된 가장 큰 원인은 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한 달이나 지속된 전 국민적 분노와 항의에도 여전히 어린 전의경들을 방패삼아 시민들을 협박하고 조삼모사식 대책으로 조롱하는 이명박대통령과 집권세력의 행태는 참여자들의 분노를 점점 더 자극했다. 그렇게 분노한 시민들이 많은 대중들이 군집한 상황에 놓일 때 그들은 “뭔가 해야겠다”는 강한 강박감을 갖는다. 이런 식의 “평화적인” 방식이라면 “이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었다. 그것은 다시 조급함과 과격함으로 전화된다. 그것은 “물리적 수단을 동원한 청와대 진�”이라는 타개책으로 쉽게 집중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명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 않느냐. 가야된다. 가서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 최초의 분노가 이 지경에 도달하면, 그들의 적의의 대상은 비단 이명박과 경찰에 특정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수단에 동의하지 않고, 그 진정성을 몰라주는 현장 지도부와 시민들에게도 향한다. 필자가 본 어떤 학생은 ”시민들은 청와대 진격하고 또 맞고 있는데, 이렇게 맥주나 들이키고, 마치 밤 소풍 온 것처럼 뭐하는 짓들이냐고, 왜 음악을 틀어대냐“며 주변의 시민들과 매섭게 대책위를 몰아세운다. 어떤 아저씨는 버스에 오르는 시위참가자를 향해 ”비폭력“과 ”내려와“를 외치는 어린 학생들은 매섭게 꾸짖는다. ”무슨 시위대가 경찰편을 드냐고 저 사람을 응원해야 된다고.“

그날 “대책위”는 난감한 듯 해 보였다. 그들은 이전과 달리 방송차량을 철수하지 않고, 집회장에 어정쩡하게 위치시켰다. 따라서 전술과 관련한 불만은 방송차량으로 집중된다. “폭력”, “비폭력” 양자 간의 대립이 따라서 방송차를 중심으로 격화된다.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래도 저래도 욕 먹는다. 그래서 그들이 한 것은 양쪽의 요구를 동시에 받는 것이었다. 때로는 청와대로 가자고, 버스를 끌어내자고 “으샤, 으샤” 선동하다가 이내 “비폭력”을 외친다.

6월 6일 이후 우리는 지고 있다. 어쩌면 촛불시위는 변질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적인 원인은 이명박정부가 아니라 우리내부에 있는 듯하다. 우리 안의 분열과 불신, 그리고 갈등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떠한 방법(물리력)을 써서라도 청와대로 가겠다”는 전술과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정리와 합의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은 청와대진격전술의 폐기일 수밖에 없다.

4. 왜 청와대로 가려는가?

다시 말하지만, 최근 촛불시위와 관련해 시민들 내부의 균열, 갈등 그리고 불신은 소위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한 청와대 진격” 전술과 크게 관련된다. 이에 대한 논의와 합의는 그래서 긴요하고도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청와대로의 물리적 수단을 동반한 진격투쟁” 전술은 그것이 시민들의 분노와 화가 어느 정도인지를 반영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갈수도 없고 갈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먼저 왜 갈수 없는가? 지난 6월1일 발생한 청와대 앞(경북궁 역)으로 진출은 우발적 결과였다. 예상과 달리 많이 모인 시위참가자와 세 갈래로의 가두행진, 그리고 이에 대한 경찰의 예측 및 대응실패의 복합적 결과였다. 예상치 못했기에 사직동 방향의 대비가 기본적으로 허술했고, 거기에 순간적인 경찰의 차량기동에 있어 실책이 더해졌다. 그 순간을 시위대가 때마침 돌파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것은 그날 진압이 그동안의 상대적 온건한 진압기조를 뒤엎고, 무리수와 여론의 역풍을 자초하면서까지 강경기조로 나서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된다. 그러나 그날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경찰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경찰버스에는 하루가 다르게 온갖 종류의 보완책들이 추가되고 있다. 이를 물리적으로 뚫겠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시위참여자들의 엄청난 신체적 상해와 연행과 구속, 그리고 전의경들의 상해를 동반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돌파한다고 해서 청와대를 가서 이명박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청와대 인근이다. 거기선 어쩔 것인가? 이제는 청와대 경호실과 어쩌면 군(軍)을 뚫어야 한다. 그들이 초청하지 않는 한 이런 위험과 손실을 무릅쓰고 갈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왜 갈 필요도 없는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주장과 요구, 그리고 분노와 화를 풀어내고 시민들과 소통하기에 충분한 광장을 갖고 있다. 촛불시위가 매일 개최되는 시청광장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세종로는 이미 권력의 심장부, 거기도 역시 청와대 인근이다. 꼭 효자동, 삼청동이라는 굳이 협소하고, 경찰에겐 민감한, 따라서 위험한 장소에 갈 필요는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곳으로 진출하는 것의 유일한 효과는 가능한 한 청와대에 접근하여 이명박의 수면을 방해함으로써, 시민들이 잠 못자는 것을 얼마간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둘째, 너무나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한다. 말했듯이 경찰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머리와 힘을 투여해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이를 뚫기 위해선 많은 시민들 그리고 또 다른 우리의 시민들인 전의경들의 크나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누군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희생을 감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셋째, 청와대진격 투쟁이 가져온 혼란과 희생은 곧 만만찮은 역풍이 될 것이다. 조중동은 촛불시위의 변질과 폭력성을 노래할 것이다. 문제는 조중동이 아니다. 최소한 어제정도의 광경을 접했던 수많은 온건한 시민들에게 촛불시위는 더 이상 아이들을 동반하고 나올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런 고도의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에 이번 촛불집회의 상징이라 할 청소년들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 나아가 이러한 역풍은 시민과 과격시위대를 분리시킨다. 참가자 내부에서 “이건 아니다”란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시민다수와 분리 고립되는 순간 과격한 시위자들의 연행은 더 이상 신나는 “닭장투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의 행군”이 된다. 이를 감내할 사람은 많지 않기에, 급격히 강경파 뿐 아니라 촛불 전체는 감소할 것이며, 신념과 확신에 찬 소수의 강경파는 참혹하게 공권력에 짓밟히고 산화할 것이다. 그때 여론은 이미 그들을 48시간 만에 풀려나오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넷째. 그들이 나오게 하면 된다. 굳이 안 나온다고 쳐들어갈 필요가 없다. 굳이 이명박이란 개인이 시위대중 앞에 나타날 이유도 그래서 해결될 문제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런 쇼를 경계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미 변복과 변장을 한 채 청와대 참모들, 한나라당 의원들 수많은 집권세력들이 다녀갔을 것이다. 그리고 민심을 전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시민의 힘에 저항하고, 거짓말로 때우고, 인적쇄신의 쇼를 준비하는 그들을 보면, 그렇게 정탐하고 돌아간 이들이 촛불시위가 내분으로 곧 자중지란을 일으킬 것이라 보고해서가 아닐까?

요컨대, 청와대를 갈수도 없고 또 갈 필요도 없다. 따라서 시위대의 분열과 불신, 그리고 갈등의 원천인 “청와대진격” 전술을 즉시 폐기되고, 시민들과 네티즌들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주장해온 시민들 내지 단체는 이젠 자제해야 한다. 철저하게 비폭력 전술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단순히 이 자리를 지키고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오히려 경찰버스를 끌어내는 것보다, 현 집권세력에게 더 한 두려움의 원천이다. 굳이 밤마다 땀과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다른 공간을 노리기에 앞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을 울분과 비장미가 아니라 다시 웃음과 해학으로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에 광화문은, 서울광장은, 아니 청계광장도 충분하고 소중한 장소이다. 강권력으로 무장한 권력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그에 상응하는 물리력이 아니다. 물리력에 대한 시민들의 철저한 비폭력저항과 조롱이다. 물리력 대 물리력 그것은 집권세력들이 원하는 구도이다.

5. 온라인, 오프라인의 두 지도부에게

이번 촛불집회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특정의 지도부와 배후가 존재하지 않는 자발적 흐름이었다는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누구의 수고도 없이 절로 이뤄져 온 것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지난 한 달간의 촛불시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두 개의 상황실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직접 조직하고 지도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유지되는 데 지원조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지도부가 아니라 상황실이다. 다들 알겠지만, 온라인 상황실은 인터넷 포탈 다음의 “토론의 성지” 아고라다. 그리고 오프라인 상황실은 광우병국민대책위다. 아고리언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밤에 잠들지 않고 24시간 상황실을 유지한다. 그들의 관심과 역할은 다양하다. 쇠고기 협상 내용과 과정의 문제점의 적극적 폭로한 것도, 조중동의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무력화시킨 것도, 폭력진압의 실상과 가해자들을 고발해 공권력의 오남용을 저지시킨 것도 다 그들의 활약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고라는 현재 촛불시위의 모습을 만들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의 광우병국민대책위의 수고도 평가되어야 한다. 특히 촛불시위 초기 자신들을 앞세우지 않고, 시민들에게 저항의 공간을 온전히 제공한 점은 평가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특정의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는 것을 절제하고, 그것이 전 국민적 축제의 장으로 변모하는데 광우병국민대책위는 크게 기여했다. 다양한 시민들의 요구와 의견,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불신과 불만에도 여전히 수고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은 점도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 두 개의 상황실이 흔들리고 있다.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고 있다. 어쩌면 앞서 묘사한 6월8일의 변화된 촛불시위 광경은 두 개의 상황실의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의 원천은 다시 “물리력을 동반한 청와대 진격” 전략과 관계된다.

따라서 필자는 두 상황실 모두에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두 상황실 모두 6월 6일 이전 촛불시위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지도부이기를 자임하지 말고 그동안 충실해 해왔던 상황실의 역할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지도의 역할은 시민들에게 맡겨라. 시민들은 아마 스스로 촛불시위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두 상황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청와대진격투쟁“ 전술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촛불시위가 계속 ”비폭력축제“의 장이 될 것임을 참가자들에 홍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착되기 위해 한시적으로 대책위는 참가조직이나 시민단체 등을 대상으로, 아고라는 자원봉사단을 모집해 경찰과의 대치선에서 불필요한 폭력과 자극행위를 할지 모르는 일부 시민들을 자제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지나치게 시위현장에서 격화되곤 하는 반(反) 촛불시위자, 조중동/SBS 기자, 심지어 사복경찰에 대한 적의도 자제되어야 한다. 그들의 활동은 촛불시위가 건강하게 예전처럼 진행된다면 그 활동의 위력은 미미하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과도한 경계가 쉽게 참가자들간의 불신을 조장하는 듯하다. 이참에 그들도 촛불시위 공간내에서 용인되고, 어울리도록 할 필요가 있다.
굳이 각 조직별로 몇 가지 제언을 첨부한다.

<광우병대책위>
어쩌면 6월6일 집회장에 위치한 방송차량의 어정쩡한 위치는 대책위의 현재 입장을 잘 요약하는 듯하다. 스스로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이번 촛불시위는 특정의 단체가 지도할 수도 지도하려 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대책위가 할 일은 철저히 상황실과 행사진행의 역할에 한정되어야 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에게 전의경들에게 건넬 수 있게 장미꽃과 초코파이를 나눠주는 것은 어떨까? 집회 참여한 여성들을 위해 간이화장실을 임대하거나, 주변 건물들에 협조요청을 하는 건 어떨까? 방송차는 만약을 대비해 가장자리에 배치하되, 긴급한 상황 변경이나 미아찾기 등에 제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시민들을 방송차의 구호와 노래로 집중화시키기 시작하면, 금새 시민들의 자발성과 활력은 떨어지고, 재미없고 획일적인 소위 “권”들의 집회로 전락한다. 또한 그것은 스스로 지도부임으로 자임하는 것으로 비춰져 시민들의 불필요한 갈등과 요구를 집중시키는 요인이다. 광우병쇠고기에만 반대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공연단체에 거리 공연, 사진전 등의 개최를 부탁하면 어떨까? 그리고 주변에 음주가 과하신 분들 이 있으며 대책위가 구성한 자원봉사단들이 어르신들 모시고 얘기 들어주는 것은 어떨까? 그분들은 대체로 누군가와 얘기를 싶어 한다. 필자가 보기에 역할을 상황실로 한정할 때 의외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당의원들과 여당의원들을 소환해 보는 것은 어떨까? 굳이 발언할 기회를 막을 이유는 없다. 나와서 그들이 시민들에게 우리당은, 나 국회의원 아무개는 무엇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게 만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고라>
이따금 들어가 봐서 확신할 수 없지만, 또한 아고라의 입장이 하나로 요약되지도 않지만, “물리적 수단에 의한 청와대 진격”의 아이디어는 대체로 아고라를 중심으로 확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아고라의 자정력을 감암할 때, 또 6월8일의 경험으로 그 전술은 폐기되고 있는 중이리라 믿는다. 그 전술만 제외한다면 대체로 아고라는 지금까지의 활동들을 더욱 열심히 하면 될 듯 해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우려는 언급될 수 있다. 첫 번째는 폭력진압경찰의 신상명세를 올리는 등의 사적제제(보복) 행위이다. 이는 아무리 가해자라 할지라도 그 기본적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러한 행위를 한 네티즌 역시 범법자가 된다는 점에서 자제되어야 한다. 이미 올려진 것도 자신삭제해야 한다. 법치국가에서, 그 작동이 시원치 않을지라도, 어떠한 경우에서든 사적제제는 용납될 수 없음은 명확하다. 그것이 용납되면 예전 한화그룹의 김** 회장과 같은 행위도 동일한 논리로 허용되며 이는 “법이전”의 사회로 회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6.1 폭력사태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함께” 혹은 “국민대책위”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공격 등이다. 처음 필자에겐 이들에 대한 아고라의 적의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필자가 알게 된 적의의 이유 역시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왜냐면 아고라의 다함께 혹은 국민대책위의 적의의 내용은, 그들의 대오의 힘을 문화제로 소진한다던지, 혹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두행진을 몰고 간다던지, 청와대 진격투쟁의 요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뚱하게 그들을 프락치로 몰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과격한 투쟁전술을 받지 않는 이유는, 오랜 집회경험의 노하우로 그것이 위험하면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집회시위의 목적은 상대방에 대한 타격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선전과 다음으로는 집회참가자들간의 연대감의 형성에 있다. 그리고 이번집회의 경우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축제의 기능이 추가된다. 그들이 가진 이념과 사고가 보통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혹은 그 방식이 고리타분하고 참신하지 못해 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정부나 경찰의 프락치는 아니다. 아마도 지금은 시민들의 힘이 너무 강해 검찰과 경찰이 손을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힘이 사라진 뒤 예전처럼 공안정국이 형성된다면, 가장 먼저 타겟이 될 이들은 대책위와 다함께 사람들일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지도할 것, 특히 폭력시위를 주도할 것을 요구해선 안 된다. 그것은 참으로 위험하고도 무책임한 주장이다.

<노조, 학생 등 운동단체들에게>
최근 촛불시위의 변화는 그동안 관망하던 학생단위들 혹은 운동조직들의 조직적 결합과 때를 같이해 일어난 듯 보인다. 그러나 이번 촛불시위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지지 속에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했듯 이슈가 갖는 보편성과 참가자들의 합의에서 비롯된다. “고시무효”, “전면재협상”, “민주주의 지키자”, “이명박과 한나라당 반대”가 대표적이다. (※필자는 이명박 물러나라, 퇴진, 하야 등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구호를 문자 그대로 해석치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항의와 반대의 수준이 높다는 것과 아울러 그러지 않으려면 시민의 말을 들어라, 즉 정책을 바꿔라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또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전개는 우려할만하다. 그간 집회참가자의 느슨한 연대를 가능하게 했던 보편적 이슈에 온갖 단체에서 슬그머니 끼워 놓는 이슈들이 뒤섞인다는 것이다. 이는 준비되지 않는 참가자들을 기본적으로 불편하게 만든다.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 슬그머니 끼워진 이슈들에 대해 필자는 대체로 동의한다. 또한 외치는 구호는 오로지 “협상무효”, “고시철회” 뿐이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하나의 획일성에 불과할터이니말이다. 다양한 구호와 요구들이 넘실대는 것 그 자체는 장려할 만하다. 따라서 문제는 제기하는 이슈의 내용 그 자체나 참가자들의 공감도가 낮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 이슈들이 갖는 성격 즉 제시되는 방법의 문제다. 대표적으로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 반미 등의 소위 “반”자 돌림구호이다. 이런 이슈들은 찬성 혹은 반대라는 양자택일의 구도를 참가자에게 제시한다. 이를 둘러싼 갈등은 기본적으로 찬성과 반대라는 두 진영 간의 적대적이고, 화해할 수 없는 대결구도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 갈등은 따라서 전부 아니면 전부식의 제로섬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이슈가 압도하는 집회시위의 공간은 그래서 상대와의 공존이 아닌 절멸을 꾀하는 전쟁에 준하는 적대적 진영간의 전장으로 쉽게 전환된다. 여기서 가장 유력하고 효율적인 전술은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뿐이며, “청와대 진격투쟁”, 혹은 “공권력에 대한 고의적 타격”은 이런 인식의 결과물일 것이다. 이런 구호와 축제의 장은 쉽게 공존할 수 없다. 패러디와 해학이 넘실되던 그 광장은 비장미와 울분이 압도하게 된다.

하기에 이번 촛불집회를 수단으로, 특정 정파와 조직들의 이념과 가치의 선전의 장으로, 이해와 요구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해선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촛불시위에 참가해서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시민들의 힘과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겸손하게 배워라. 어떻게 물리력 없이도 과도하게 비장하고 엄숙하지 않으면서도, 큰 자기희생 없이 즐기면서도, 이 정부에 두려움과 타격을 줄 수 있는가를 배워가기를 희망한다. 이번 촛불시위에서 최소한 합의될 수 있는 요구는 결국 재협상과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시키라는 것 이상이기 어렵다.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면, 또한 이번 촛불시위를 계기로 그간 분리고립된 사회운동진영이 광범한 시민대중과 함께 동감하고 호흡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욕심내지 말고 조급해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꼭 말하고 싶은 자신들의 요구가 있다면, 시민들의 언어로 즉 “반”자 빼고 표현해 보라.

6. 마치며

예상했던 대로 필자가 돌아온 이후 사태는 과격하게 치달았다.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떨어져 나갔을는지 모른다. 내일부터 그동안 잠잠했던 보수파들의 공세가 거셀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 필자가 하루 종일 이글을 쓰던 오늘 우려했던 폭력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내린 비는 참으로 반가운 것이었다. 이 비가 최근 급격하게 변화해가는 촛불시위 참가자들의 불신과 갈등을 쓸어가고, 일부 시민 단체의 조급성과 과격성을 진정시키기를 희망한다. 사실 서두의 분석을 넘어서는 제언에 해당하는 부분은 어쩌면 과도하고 불필요한 것일는지 모른다. 또한 필자는 기본적으로 시민대중과 네티즌들의 건강함과 자발성을 대체로 신뢰하는 반면에, 기성 운동세력들의 이념적 급진성과 방식의 구태의연함에는 과도하게 비판적이다. 따라서 이글에서 언급된 운동세력에 대한 비판은 어쩌면 편파적이고, 주제넘고 무례한 것일 수 있다. 다만 한 시민의 진지한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길 소망해본다. 6월10일을 촛불시위가 얼마간의 우려를 씻고 시민저항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길 진심으로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6.10이 촛불시위의 사실상의 종결의 점이 될지 새로운 시작의 선이 되는가는 아마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  이글은 6월 8일 밤 쓰여졌다. 한참이나 망설이다 올린 것, 사실 이 순간에도 뉴스로 발행하는 것이 잘하는 건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이 글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운동(직접행동)일반의 한계와 정치의 부재가 만들어 낼 예정된 불길함, 특히 "비폭력"의 구호로 압축되는 중산층적 경향과 그것이 내포하는 급진성, 사회경제적 저변계층에 대한 잠재적 적의와 불편함 등이 지적되지 못했고, 아고라에서 발견되는 어떤 "위험한"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지적되지 못했다. 스스로 중산층적 경향의 시각으로 조직운동을 바라본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방어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맘에 안드는 것은 당일 나의 심리적 상태에 지나지케 영향받아 글이 너무 감성적이고, 방법에 있어 계도적이라는 것이다.  추후 글들을 통해 자기비판하고 보완한다. 아직 배우고 있으니 말이다.


‡전체주: 이글은 학술적 글이 아니라, 일반독자들을 대상으로 시기적 요구에 긴급히 대응하기 위해 현안분석과 제언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독해의 편의를 위해 참고문헌과 주는 과감히 삭제했다. 대표적으로 필자의 논의는 고려대학교 최장집 교수의 최근 책과 글,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의 글과 칼럼 등에 별도의 인용없이 크게 의존하였음을 밝힌다.

2008년 6월 7일 토요일

[긴글] 일 없는 대표 일 많은 시민

<from daum blog, 작성일 2008.6.7>

일 없는 대표, 일 많은 시민

1. 불만의 대상

난 요즘 불만이 많다. 가끔 참기 힘든 화도 밀어닥친다. 그 대상은 특정되지 않고 오락가락한다. 그것은 아마 현시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부터 미움 받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일때도 있고, 하는 행동과 말 그리고 생각에서 그와 별 차이가 없지만, 그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그 분노와 조롱의 눈길에서 약간 빗겨서있는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요즘 시민들이 워낙 똑똑하고 부지런해 그들의 내상도 이미 상당하다). 그러나 보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명박대통령, 한나라당, 조중동 그리고 자충수를 일삼는 온갖 종류의 보수세력들에 대한 나의 불만과 화는 크지 않다. 아마 별다른 기대도 미더움도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나의 주된 불만과 화의 타겟은 주로 민주당(선진당, 창조 등은 논외로 한다), 민노당, 그리고 진보신당 등의 소위 진보 혹은 민주개혁 성향의 야당과, 여기에 속해있거나, 속했었거나 혹은 속한거나 진배없는 정치인과 활동가들이다. 이 중에서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현 사태속에서 뭔가 하려고는 하지만 그 "진정성"을 머리와 세(勢)가 따라주지 않기에 조금 봐주자. 언젠가 그들에 대해서도 불만을 쏟아놓을 때가 있을터이니...


2. 일 없는 대표

문제는 민주당과 그 일당들이다. 왜 우리 갖고만 그러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너희들이 원내 제1야당이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그들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두 번의 전국단위 선거에서 그렇게 번드르하게 민주와 개혁, 그리고 진보를 거품 물며 지지를 호소했던,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가족이 행복한 시대”를 만들겠다던 "정동영"은 수많은 가족들이 자신과 이웃의 건강을 위해 서울광장에 텐트치고 나앉은 이 상황에 무얼 하고 있는가? 선거에서 떨어지면 끝인가? 거봐라 나를 찍지 않아서 그 고생하는 거라 고소해하는가? 미안하지만 말이다. 시민들은 당신이 이럴 줄 알고 딱 그만큼만 지지해준거다. 총선직후 민주당의 보수화를 막고 진보개혁성을 지키겠다며, 그래서 새로 구성될 당지도부에 도전하겠다고 떠들던 몇몇은 또 왜 이리도 잠잠한가? 정세균, 천정배는 무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도 발언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조직하지 않는 그들이 말하는 진보개혁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도대체 모를 일이다.

최근 보도를 보면 그들의 맘도 편치는 않은 듯하다. 똥싼 아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한다고 한다. 장외투쟁하자니 시민들의 냉소가 두렵고 의회에서 뭔가를 하려니 마땅히 할 수 있는 것도 그럴 자신도 없다. 그래서 한국사회와 민주주의의 명운이 거리에 모인 촛불 숫자에 오락가락하는 비정상적 상황에서, 그들은 참 할일이 없고 한가하다. 낮에는 의회와 당사를 밤엔 거리를 아무 목적 없이 그저 배회한다.

3. 일 많은 시민

그들의 대표들에 비하면 그들을 대표로 만들었던 시민들은 요즘 참 바쁘다. 그들은 낮시간엔 팍팍해진 경제사정속에서 그저 버티기위해 각자의 일터에서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밤이 되면 촛불 하나씩을 들고 나와 아스팔트를 부지런히 누빈다. 그 일은 제법 재밌기도 하고 때론 신나기도 흥겨울 때도 있지만, 때로는 물도 맞고 매도 맞고, 매운 연기도 들이마셔야 하는 고역이 될때도 있다. 그것이 다는 아니다. 촛불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또 할일이 태산이다. 먼저 인터넷에 접속하면 그날의 숙제들이 쏟아진다. 조중동에 광고한 회사들의 전화번호 목록들을, 내일 항의전화 하기 위해 챙겨야 하고, 그것이 인터넷 사이트라면 당장 회원해지도 해야 한다. 그뿐인가? 광우병, 의료, 수도 민영화, 대운하, 사교육 강화 등, 언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명박정부의 프로젝트들에 뒤통수 맞지 않기 위해, 인터넷의 힘을 빌려 의학, 수의학, 토목학, 정치학, 국제관계학, 교육학에 대해 전문가 못잖은 수준까지 공부도 해야 한다. 그러구나서도 우리네 시민들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혹시나 나를 대신하는 오늘밤 거리의 동료들에 뭔 일이 있을까 걱정하며 오랫동안 인터넷 생중계를 떠나지 못한다. 

4. 밥 숫가락을 올리기위한 두 가지 예의

이제라도 촛불시위에 참가하겠다는 것 그 자체를 탓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촛불시위는 참가하겠다는 그 누구도 막지 않는다 다만 좀 구박할 뿐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한 달째 물맞고 매맞아가며 차려놓은 밥상에 밥숫가락을 얹으려 한다면 최소한 다음의 두 가지 예의는 갖추어라.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당신들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외면과 냉소 그리고 면박과 핍박은 감수해야한다. 자업자득이다. 따라서 첫 번째 예의는 시민들의 당신들에 대한 분노와 항의를 불편해하거나 언짢아 하지 않으며 함께 하는 것이다. 묵묵히 온몸으로 받아내며 견디라는 것이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따가워도 꿋꿋이 대오의 최선두에 앉고, 대놓고 욕할지라도 얼굴 붉히지 말고 주변의 시민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라. 어쩌면 마치 비탈길을 굴러내리는 눈덩이처럼 촛불시위 참여자들이 점점 더 불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시민들이 당신들, 야당에 대해서도 일말의 기대를 포기했다는 것, 그래서 결국 위험하고 피곤하더라도 자신들이 직접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절절히 깨달은데 있다. 그러니 나와서 들으라.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화가 났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또 적으라. 그걸로 끝이 아니다. 오전엔 의회로 나가라. 그리고 어젯밤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 각양각색의 시민들의 각양각색의 어려움과 고민 그리고 불만들을 정책으로, 야당에 대한 요구로 구체화하라. 그리고 이를 여당에 요구하고 강제하라. 안 들어준다면? 밤에 열리는 거리의 의회에 또 등원해서 보고해라. 그러면 시민들이 다른 지시와 힘을 줄 것이다. 단순히 옆에 있어주는 것이 아니라 대표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두 번째 예의이다. 단순히 촛불하나 보탤 심상이라면 나오지 마라. 왜냐면 당신들 나오는 것은 밑지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누가 있을까?

그러나 이렇게 할 야당 정치인이 있을까? 사태가 이지경이 되도록 애써 모른척 한 그들인데. 갑자기 달라질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결국 의사당이 아닌 거리인가? 결국 대표들이 아닌 시민의 직접행동인가? 정치인 대표들은 너무나 일이 없고 시민들은 할일이 너무 많다는 것, 그것이 이번 문제의 원인인 동시에 현재 한국정치와 민주주의를 요약하는 특징이 아닐까? 아울러 그것은 이 사태의 끝이 파국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강하고 책임있는 야당이 없기에 우리네 시민들은 오늘밤 또 청와대로의 위험하고 고단한 여행을 떠난다.

2008년 6월 4일 수요일

[긴글] 6월3일 고시유보 어떻게 볼 것인가?

-from daum blog, 작성일 2008년 6월 4일-

6월3일 고시유보 어떻게 볼 것인가?

1. 유화국면의 도래

6월 3일 정부는 그간 적나의 경찰 물리력과 보수신문의 이데올로기적 보호망에 의거해 시민 절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18일 타결된 미국산쇠고기 협상 고시를 강행하려는 기존의 강경기조에서 한발 후퇴하여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관보게재)의 유보를 발표하였다. 이는 전국민적 항쟁으로 치닫는 시민들의 분노와 항의에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일단 굴복한 것이며, 시민들의 작은 승리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MB정권하의 100일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이것이 현 집권세력들의 현 사태에 대해 진정한 반성, 성찰 그리고 근본적 대책마련이라는 낙관적 시나리오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시중의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는 낙관적 시나리오 보다는 일단 관보게재 유보를 통해 한편으론 날로 격화되는 저항을 진정시키고 다른 한편으론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여론무마, 국면전환, 전통적 지지층 결집용 대책들을 쏟아냄으로써 국면반전을 꾀하는 즉 기만술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또한 바람직할 것이다. 필자는 6월 4일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상황을 일종의 ‘유화국면’으로 이해코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