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6일 화요일

[인용]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버린 이들에게

<from tistory blog>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버린 이들에게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야.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Wenn wir einen Menschen hassen, so hassen wir in seinem Bilde etwas, was in uns selber sitzt. Was nicht in uns selber ist, das regt uns nicht auf." 


When we hate someone, we hate in his image something in ourselves seated. What is not in ourselves, that does not move foward to.


Hermann Hesse: Demian

2010년 1월 15일 금요일

[읽고 쓰기] 왜 트위터는 지속될 것인가

<from tistory, 작성일 2010.1.15>

1. David Carr의 Why Twitter Will Endure 을 읽고 쓰다. 이글 은 뉴욕타임즈 1월 1일자에 실렸다. 저자는 뉴욕타임즈의 문화 섹션 기자이자, 기업 섹션에서 미디어 부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 그는 트위터와 처음으로 조우했던 2007년 한 컨퍼런스에 대한 묘사로 글을 시작한다. 당시 저자는 이미 과도하게 집착했던 Facebook에 그리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각종 RSS feeds와 이메일에 충분히 압도당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을 침입할 웹 기반의 마지막 한 가지를 갈구하고 있었다. 
    
트위터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던 듯 하다. twitter(v. 재잘거리다)라는 명칭부터 진부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고, 마치 스스로 자신의 미래가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리라 암시하는 듯 보였다. 명칭에 더해 140자로 제한된 문자 공간으로 요약되는 그 아이디어 역시 휴대폰 문자 메시지에나 어울릴법한 것이었고, 그 속에서 뭔가 지적이고, 의식을 공유할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할 것이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첫인상은 곧 여지없이 깨지게 되는데, 왜냐면 트위터가 그 컨퍼런스의 가장 주된 뉴스 플랫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많은 참석자들이 트위터를 통해 무대 위 패널들에 대한 설명과 비판적 논평을 거의 실시간을 쏟아내는 것을 보구, 그는 스스로 전문가적 필요(professional nessity)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필자는 그로부터 1년 후의 변화를 말한다. 트위터는 그의 사고를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전에 가능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왜냐면 이전과 같이 희뿌연 상태로 30여분씩 인터넷 검색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서도,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그날 그날의 뉴스와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감각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편으로 깊이 사고하는 능력의 상실에 대한 우려를 하면서도, 그것이 트위터를 통해 얻는 것에 비하며 충분히 지불할 만한 것이라 여긴다. 

이런 경험은 필자를 트위터를 개발한 회사조차도 오래지 않아, 친구나 또는 낯선 이들을 향해 쫒고 쫒기는 1억명의 가입자를 확보할 것이라 자신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고, 또 오래 지속될 것이란 확신으로 이끈다. 

그에 따르면 이런 견해는 필자만의 것은 아니다. 대표적 인물이 Steve Johnson인데, 그는 6월 TIME에 트위터에 관한 가장 수준 높은 기사(링크 참조)를 게제한 사람이다. 해당 기사를 통해 죤슨은 "트위터가 점점 더 상하수도 배관(plumbing *b는 묵음입니다)을 닮아가고 있으며, 배관은 영속성을 가진다(eternal)"고 요약한바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론 필자는 트위터의 특성과 장점을 설명한다.

특히 그는 겉으로 보기에 단발마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불협화음(cacophony) 속에서 뭔가 유용한 것을 찾는다는게 과연 가능키나 한 것인가라는 트위터를 처음 접하는 누구라도 가졌을법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당신이 누구에게 묻고 있는지", 또 보다 중요하게 "당신이 누구를 쫒는지(follow)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트위터가 누구나 (자신이 원한다면) 아무라도 쫒을 수 있지만, 반면에 호혜성(reciprocity)에 대한 기대치는 아주 미약하다는 고유의 특성에 기인한다. 즉, 자신이 쫒는 사람을 주의깊에 조직한다면, 트위터는 각 분야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오는 항상 꺼지지 않는 정보의 원천(always-on data stream)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트윗이 놀라울 정도로 필수적이고, 시의적절한 정보의 사슬(link)로 가득차 있기때문이라 강조한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누군가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는지 알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트위터에 대해 평가절하 하곤 한다. 필자는 이에 대해 "그 누군가가 진정으로 트위터에 정말 serious한 사용자라면, 복잡하게 연결된 세계에 대한 가장 명석하고 최신의 시각을 준비하며 점심을 들고 있을지 모른다"고 가볍게 일축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가 보기에 트위터는 특히 언론계에 종사자들에 가장 유용하다. 그러나 유용성이 비단 그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는데, 자신이 속한 분야 혹은 산업을 이끄는 사람들이 무엇을 읽고 생각하는지를 알수 있게 된다는 점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던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트윗의 유용성에 이해, 필자는 트위터의 기본 매커니즘을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트위터의 초심자들은 트위터에서 뭔가를 발행하는 것(즉 트윗)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 행위, 메시지 작성과 전송으로 구성되는, 자체는 너무나 간단해서 처음에는 사람들은 쉽게 다른 이들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처음에 필자 역시 트위터에서 뭔가를 알리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이 모세가 아니라는 것을, 트위터도 그 사용자들도 내가 생각하는 것을 심사숙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1년이 지난 후 필자가 깨닫게 된 트위터 서비스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방송되는 집합적 목소리(wired collective voice)를 듣는데 있다는 것 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난후 한 컨퍼런스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노트북을 켜 놓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면, 웹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수많은 분신들이 보내주는 트윗을 통해, 블랙베리를 통해서도 충분히 소화할 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트위터를 통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훨씬 적은 시간을 인터넷 사용에 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필자는 처음 트위터를 접하곤 압도당하고 하는 사용자를 위한 절묘한 비유를 제공한다. 그는 트위터를 "과거를 향해 흘러 내려가는 거대한 정보의 강으로" 그리고 그 강에 자신이 "아주 잠깐씩 컵을 담근다"고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알아야 하는 대부분은 바로 그 컵에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 컵이 애플과 같다면, 그 속에는 태블릿 PC의 데모버젼이, 혹은 아마존과 같다면,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종이책 보다 킨들의 판매량이 상회했다는 사실이, 혹은 그것이 의료개혁법안을 닮았다면, 그 속에서 지난 상원에서의 투표결과가 담길 것이라고 말한다

흔히 트위터의 한계로 지적되는 한정된 공간과 문자 메세지로부터 발전된 서술 양식이란 표현의 한계는 필자는 상당한 이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가 볼 때, 최고의 트위터인들은 링크, #(해쉬 태그)와 코멘트 등을 적절히 사용해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정확한 의사소통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덫붙여 그는 다른 표현매체(아마 이메일, 직접대화 등)를 통해 접촉할 때 견딜 수 없게 만들곤 했던 많은 알고 지내던 전문가들이 트위터의 구속 속에서는 의외로 흥미로운 사람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필자가 볼 때, 트위터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놀라울 정도로 주문자 맞춤형(customizable)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마치 한 나라 전체가 한 TV 시리즈의 마지막 회에 혹은 몇몇 지성인들의 소규모 회동에 고정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 수 있다. 달리말해, 트위터의 정수는 바로 스스로 정의하는(self-defining) 그룹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른 웹공간에 비교해 사용자들이 훨씬 더 좋은 매너를 갖게 한다는 부수적 효과로 이어진다. 그는 트위터 공간에서 당신은 당신의 아바타이며 당신의 아바타는 바로 너라고 비유한다. 저자가 볼 때, 이런 공간에서 자신이 말한 무언가에 대해 어떤 이들이 비난할 때, 얼뜨기처럼 행동하지 않는게 좋다고 권유한다. 왜냐면, 들은 당신이 아니라 자신을 쫒는 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쓱싹 내려 버리고, 관심을 끊으면 된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저자는 소셜 미디어에 관한 저작을 쓴 Clay Shirky의 논의를 빌어, 트위터어 원척적 수용력(raw -capability)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트위터는 무엇보다도 "가볍고, 끝없는 유용성을 가지고 있기에,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할 수록 더욱 더 이런 점은 나아질 것이기에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라" 예측하였다. 기업들, 기관들이 점점 더 트위터를 이용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트위터는 점점 더 많은 중요한 대화들이 이뤄지는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여기서 트위터의 중요한 사회적 속성이 나오는데, 필자는 트위터가 Shirky가 알고리즘적 권위(algorithmic authority)라 일컫는,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정의하는 것"을 돕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설명한다. 즉, 각양 각생의 사람들이 동일한 순간에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뭔가 중요한 것임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트위터의 역할은 "네트워크화된 지성의 고동"에 그치지 않는다. 마법에 가까운 실용적 유용성도 높기 때문이다. 트위터는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어떤 종류의 넷북을 사야하는지, 혹은 이를 살 때, 늘어선 긴 줄에서 항의할 때도 유용하다. 

여기서 필자는 트위터가 제공하는 단점을 잠깐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이러한 풍요로움에 비용이 없을 수는 없다. 사람들은 흔히 이메일과 인터넷이 시간을 소모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은 트위터를 얻을 때까지 유보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왜냐면, 트위터에는 당신에게 일어났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기에, 트위터를 하게 되면, 그것은 더욱 더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인다.

그러나 잘 사용한다면, 트위터는 개인적, 사회적 긴장을 감소시켜준다. 그 일례로, 미국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발생한 항공기 테러 사건을 든다. 많은 뉴스들이 교통대란의 시점에서 금요일 테러 여파가 토요일 아침 여행객들에 끼칠 영향을 혼란스럽게 떠들어 댔지만, 이를 혼돈을 정리한 것은 새로운 항공안전 지침을 언급한 한 사람의 트위트였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트위터의 앞에 놓인 전망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최근 커져가는 트위터의 정보 헤게모니가 확고하지는 않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특히 최근 몇주간에 심각한 서비스 정지 사태가 일어났고, 기업과 정부 모두 트위터 플랫폼의 안정성에 대해 우려도 만들어 내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웹상에서 존재할 때, 많은 영리한 녀석들이 트위터를 정신나간 혼돈으로 빠트릴 궁리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을 든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비관적 우려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웹에서 원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나의 트위터 갱들이 나와 함께 할른지를 보장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의 몇몇 팔로우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을 모세로 만들지는 않는다며, 글을 마친다.

3. 나의 배관/트위터를 뚫을 수 있을 것인가?이렇게 읽고, 번역을 마친 후 든 첫번째 생각은? What are you doing now? 아! 나는 지금 왜 이거 번역하고 있을까? 그러나, 카의 글에서 이것저것 배울 수 있었어. 중요한 사실 몇가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트위터는 배관을 닯아 있다. 
2) 많은 추종자(follower)의 존재가 당신을 모세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발행(publication)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말라.
3) 자신이 따를 이들을 잘 조직화 할 수 있을때, 트위터는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정보 혹은 정보로의 링크를 제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
4) 트위터 서비스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의 집합적 목소리를 듣는 것에 있다는 것.
5) 요컨대, 트위터는 많은 개인적, 사회적 유용성을 가지는 도구라는 것.

그러나,저자 카의 설명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트위터 역시 결국 우리가 사는 실제의 시공간을 초월할순 없다는 것이다. 

즉 저자가 말한 개인적 유용성은 일단 트위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증가될수록 커질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 유용성이 단순히 사용자 수의 함수가 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면, 그것은 결국 사회 각 분야에서 풍부한 정보와 깊이 있는 식견을 갖춘 트위터들이 많이 존재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시 전체 사회의 문화적, 지적, 기술적 수준이 높아져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 경험에 비춰 트위터에 대한 나의 인상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1)말 그대로 단순한 재잘거림(진짜 밥먹는 것만 얘기하는 이들)의 경쟁
(2)가식적, 의례적, 이쁘고, 멋진 말들의 향연(그런말들은 미니홈피나 꾸미는데 사용하라구 제발)
(3)여러 정치인 혹은 조직들에 의해 내뿜어지는 가벼운 주례사 논평 혹은 사실 보다는 일방적 주장에 치우친 당파적 악다구니
(4)그 세계의 질서 수호를 자임하는 적지 않은 수의 모세들, 그들은 사람들에게 트윗계로의 안정적 진입 혹은 성공을 위해 자신을 거처야 한다는 것을 강조, 또 그런 행위들을 또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

즉 이런 여러가지 모습의 '불협화음'이었다.  

또한 트위터의 성공요인은 그 작동 매커니즘은 바로 "상호호혜성"에 대한 기대나 부담이 현저하게 줄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한국의 트위터에서 만나는 것은 한국적 변형. 즉 맞팔로윙의 횡횡과 모세들에 의한 팔로윙 늘려주기 등.. 그것이 트위터의 중요한 메커니즘 작동을 방해하고 있는듯 하다.

 
또 트위터의 메커니즘의 핵심은 "자신이 원한다면 그 누구의 얘기도 들을 수 있고, 또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하는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양자간의 자연스런 불일치와 간접성에 있다. 이것이 자신이 말을 듣는 집단과 말을 하는 집단간의 기묘한 공존-비동시적 동시성-을 가능케 하고, 그것의 효과는 여타의 논의의 공간들에서 나타나는 격렬하고 적나라한 부딪힘을 완화하거나 막아주는 작용을 하는 듯. 따라서 맞팔로잉의 추천과 확산 이를 권유하는 모세들은 글쎄다.

마지막으로 한국 주류사회나 기득질서는 미국과 같은 다양한 이해집단,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학문, 정치, 사회, 언론 조직 등이 아주 허약하거나 부재하다고 할 수 있어. 전체 권력/힘의 균형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기업(자본)과 국가는 강력한데 시민사회는 허약하다는 것(푸트남 식으로 말하면, 사회적 자본의 부족).
웹이든, 트위터의 터미널이던 결국 전체 한국사회를 축약하거나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수밖에 없어. 한국사회에 원래(originally)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희미하게 존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 난망할 것이다. 

이런 다소 우울한 첫인상에서 나온 엉뚱한 결론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지 않기 위해서. 특히 한국사회의 각 분야의 리더들과 대표선수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번역과 해석을 통해 전달되는 세계가 아니라 실제 세계를 알기 위해서.
미국 소비자들이 현대차에 죽고 못 살고, 유럽인들이 옴니어를 최고의 스마트폰으로 여기고, 영국 프리미어가 박지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비와 원더걸스가 미국 팝계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온갖 가십거리들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외국어 특히 영어를 잘 하는 것이 필요해. 엉뚱하고 우울한 결론.

어쨋든 과연 이런 상황 속에서 저자 카가 말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나의 그리고 당신의 트윗 배관을 우리는 뚫고 찾을 수 있을까?

2010년 1월 4일 월요일

[읽고 쓰기] 타이거우즈와 불신의 미국 그리고 한국

- from tistory, 작성일 2010.1.4-

1) 프랭크 리치의 Tiger Woods, Person of the Year를 읽고 쓰다. 강성종 교수가 대자보에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참고로 Frank Rich는 뉴욕타임즈 Op-Ed (Opinion Editorial) 칼럼니스트이다. 뉴욕타임즈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주말 메거진 판 비평에 매주 1,500자 분량의 장문의 에세이를 쓴다. 그는 필진과 함께 뉴욕 타임즈 매거진의 시니어 에디터를 겸직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즈에서는 첫번째 있는 일이다. 그 이전 그는 1980년 부터 타임즈의 수석 드라마 비평가였다.



2) 참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글이다. 글은 왜 뉴욕타임즈가 타이거 우즈를 올해의 인물로 내세웠나를 설명하는데서 시작한다. 다른 잡지들의 여타 후보군들, 예컨대 버냉키,과 달리 타이거우즈를 꼽은 이유는 그가 지난 1년, 특히 지난 10년의 미국 정치, 사회, 경제의 중요한 특징을 요약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리치는 올해 그리고 지난 십년을 관통하는 명제가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이 너무나 잘 속아 넘어갔다는 점이다. 미국시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데는 Citigroup, Fannie Mae 같은 거대기업, 백안관, 그리고 Ted Haggard 대형교회 등도 빠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지난 십년의 가장 전환적인 순간(defining moment)는 9/11 테러가 아니라 Enron 스캔들이다. 

이런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타이거 우즈에서 보듯 급작스레 붕괴되기 직전까지 아무도 그들의 신격화된 무결점의 이미지의 뒷편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의 엔론 역시 그 급격한 붕괴 직전 까지, 거대 금융권, 언론, 수많은 투자자들로 부터 누구나 추수해야 할 비즈니스의 성공의 모범처럼 여겨지고 숭배되었다.
  
리치는 타이거 우즈 스캔들의 진정 놀라운 점은 그가 추문에 휩싸인 연예인이었다는 점도, 지난 십년 찬양되어 온 '역할모델'이 붕괴 된 점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그것은 인종에 관한 문제도 위선에 관한 문제도 아니라고 본다. 

그가 볼때, 진정 놀랍고 예외적이라 할 만한 것은, 바로 엔론 스캔들에서처럼, '기업가적 자기규율과 집중의 모범'처럼 대중에 비쳐진 완벽한 이미지와, 무절제와 방종의 실제 삶 사이의 엄청난 간극(Enron-sized gap)이다. 또한 이와 동시에 놀라운 것은 바로 미국 기성질서(establishment)와 뉴스 미디어가 일반 팬들 만큼이나 이런 간극의 지탱과 확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점이다.
리치가 볼 때, 문제는 이와 같은 타이거 우즈의 신화의 붕괴는 단순히 그의 가족, 가까운 친구, 혹은 골프 산업에 상처를 주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주 해악적인 신드롬의 한 전형적 사건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 시민들이 미국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의 리더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알 카에다 연계되어 있다는 거짓 정보에 기초해 내려진 이라크 침공 결정이다. 지난 십년간 정치영역에서도 이런 사기극 내지 거짓은 당을 초월해 만연되어 있다.

리치는 타이거 우즈야 아마 또 다른 유명인사가 비슷한 수준의 스캔들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밀어 낼때 쯤이며 링크에 복귀하겠지만, 지난 십년의 두 가지 재앙적 사태 즉 값비싸고 무의미한 전쟁과 파괴적인 금융 붕괴는 바로 미국의 리더들이 너무나 편하게 시민들을 바보로 만든 것의 산물이라는 점을 시민들이 잊어버리지 말것을 주문한다.

마지막으로, 리치가 봤을 때, 이런 신드롬은 최근 오바마가 처한 정치적 곤경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최근 거의 모든 것에 의견일치를 보이지 않는 미국의 좌파와 우파가 "오바마의 뛰어난 선거 캠패인이 타이거 우즈의 이미지 만큼이나 알맹이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반-미국적 급진주의(우파에게)나 무기력과 용기부족(좌파에게)을 위장하기 위한 판촉전략일 뿐이라는 의심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문제는 두 주장 모두 진실이 아닐런지 몰라도, 지난 10년간 미국 시민들이 바보처럼 속아온 것을 생각할 때, 그 어떤 것을 제시하는 그 어떤 리더에 대해서도 냉소적이기만 한 시민들을 비난 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끝으로 리치는 타이거 우즈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이 순간, 미국은 명확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벙커에 빠져 있음을 애도한다. 

3) 한국도 비슷하지 않을까.... 최근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아마 황우석 사건이겠지. 거의 신격화된 완벽한 이미지와 실제 모습과의 머나먼 간극이며, 주류 언론, 청와대, 학계가 황우석 신화를 만드는데, 즉 간극을 지탱하고 넓히는데 일조했다는 점하며... 또, 삼성 x-file 사건도 여기에 해당 될 것이다. 세계일류를 표방하고, 한국 최고의 ceo로 숭상되는 이들이 고급 식당에 앉아서 나누는 얘기와 행동이 소위 깡패들과 하등 다를바 없다는 사실. 

문제는 그나마 미국에서는 엔론처럼 일단 발각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사법부에 의해 엄청난 형벌이 부여된다는 점이다. 또한 연예인과 스프츠 스타야 예외이겠지만, 그런 사기극을 주도한 이가 기업인, 학자,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이라면, 사실상 다시는 원래 위치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며, 해당 사회에서 영원히 퇴출된다는 점이다. 그나마 현재의 미국사회의 파워와 건강함을 유지시키는 힘이 아닐까?

그러나, 한국에선 그들은 돌아온다. 황우석처럼. 아니 황우석보다 더욱 더 돈과 권력이 강하다면 (삼성처럼) 그들은 아예 그 지경으로 전락하지 조차 않는다. 드러난 간극은 그 동안 그런 사태를 대비해 공을 들여온 사회 전분야의 리더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의해 금방 흐려지거나, 오히려 x-file 사태처럼 본말이 전도되어 버린다.

리치는 타이거 우즈를 보내면, 미국의 십년을 미국의 리더에 의한 미국 시민들에 대한 사기극으로 규정하며, 더 이상 누구도 믿을수 없게된 미국 시민들과 불신의 악순환이란 출로 없는 벙커에 빠진 미국사회를 애도한다.

그럼 한국사회는...

2010년 1월 3일 일요일

[긴글] 아이폰 대 옴니아- 프로토콜 경제로의 이행

<from tistory, 2010.1.3>

- 뉴욕타임즈 데이비드 브룩스의 The Protocol Society란 칼럼을 읽고 쓰다


1. 아이폰 vs. 옴니아 균열의 형성과 정치적, 경제적 연합지난 12월 한국에 정식 발매된 아이폰은 단순히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던 외국 공산품이 들어온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듯 보인다. 그것은 가전 혹은 통신 시장에서 기존 주요 메이커의 점유율의 변화를 넘어,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충격을 주었고, 이에 상응하는 균열(cleavage)을 만들고 있다.

균열은 언론 등을 통해 아이폰 vs. 옴니아2, 혹은 KT/애플 vs. SKT/삼성의 구도로 즐겨 묘사된다. 그러나 이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이다. 왜냐면 이번 균열은 특정 제품군의 스펙 싸움이나 브랜드간 충성도 경쟁으로 환원될 수 깊이와 크기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누가 이 갈등에 참여하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누가 아이폰 vs. 옴니아2 라는 균열을 형성, 유지, 발전시키고 있는가?

'옴니아2' 팀의 대표선수는 단연 국내 대기업(제조업과 통신사)이다. 그 연합의 성격은 비교적 간명하다. 그간 누려왔던 독점이익을 가급적 오래 유지하거나, 혹은 일정 정도 후퇴가 불가피하다면 그 수준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그렇게 유지된 그들의 독점이익은 이 연합의 보조 파트너를 구성하는 주류 언론들에 광고비 명목으로 배분된다. 왜 주류 언론들이 때로는 제조업체나 통신업체 보다 이 연합에서 더 가시적인 집단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옴니아 연합은 기본적으로 독점이익 보호라는 경제적 성격을 띄지만, 이런 목표 달성을 위해 언론, 정치권과 관료집단, 시민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 성격을 띈다.

다른 편의 대표선수는 누구인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애플도 KT도 아니다. 그들 역시 높은 시장점유율과 이윤을, 그리고 가능하다면 독점적 시장위치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이 진영의 대표선수는 영민한 소비자들이다. 아마도 그들 중 일부는 얼리어댑터라 불리울 것이며,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소득과 평균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국내 뿐 아니라 세계시장의 변화에 민감하고, 현재의 상태가 자신들에 강제한 결과(손해)를 인식하게 된 이들이다. 그러나 '보통의' 소비자에서 '행동하는' 소비자로의 그들의 이동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필연적 과정은 아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불만이다. 자신들의 선호는 제대로 반영하지도 않으면서도, 지불해야 할 비용은 터무니 없이 높은 폐쇄적인 한국 통신시장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어떤 시점에서 임계점에 도달했고, 그것이 아이폰을 계기로 폭발했을 것이다. 애플과 KT는 이런 불만에 편승한 기업이며, 이러한 그들의 행동에 옳고 그른 규범적 판단은 무의미 하다. 부수적으로 이들에 더해 아마도 한국 전자, 통신, IT 시장에서 비주류적 위치에 놓여 있는 다양한 소규모 기업들과 개인들이 이런 소비자의 움직임에 공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지지와 동조를 보내고 있다. 따라서 이 연합의 일차적 성격 역시 이익에 기반해 있다. 그러나 다시 이런 이익의 달성을 위해서 한국의 사회경제적 기득질서와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역시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아이폰 연합에서 옴니아 연합의 주류 언론이 수행하는 역할을 수많은 블로거들이 수행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의 전자제품에 불과한 아이폰이 이처럼 큰 사회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파장을 만들어 내는 데는 바로 이것이 경제적, 정치적 기득질서의 유지와 변화라는 중요한 균열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물적 재화 경제와 프로토콜 경제

여기서 어느 편의 주장이 더 옳은지에 대한 규범적 판단도, 혹은 어느 편이 승리할는지에 대한 전망을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거나 성급하다. 다만 최근 읽은 뉴욕타임즈 칼럼에서 데이비드 브룩스가 설명한 protocol society/economy라는 개념을 소개해본다.

[긴글] 미드 '웨스트 윙'과 한국의 미국수용

<from tistory>

드디어 웨스트 윙을 마쳤다. 웨스트윙은 미국 백악관의 업무동의 공식명칭이다. 여기서 내가 마친 것은 Aaron Sorkin 원작의 미국 드라마를 말한다. 그것은 1999년 9월부터 2006년 5월 14일 까지 무려 8년에 걸쳐 방영되었고, 방송분량은 7 시즌에 154 에피소드에 달한다. 웨스트 윙은 허구의 민주당 바틀렛(Bartlet) 대통령(마틴 쉰 역)의 두 차례 임기동안 백악관 웨스트 윙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다룬다. 

내가 이 드라마를 재밌게 본 이유이기도 하고, 미국 밖 사람들에게 이 드라마가 주는 가장 큰 덕목은 그것이 미국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어쩌면 미국 정치학 개론서 한 두권을 정독하더라도 어려울, 전반적 스케치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흔히 미국 정부/정치를 단순히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그 크기와 역할이 얼마간 확장된 버젼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정치는 다른 국가들의 그것과 단순히 양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르다. 미국은 현대 민주주의의 제도를 처음으로 만들고 실천해온 곳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미국의 민주주의 실험이 현재 여러 국가들의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다고 말해도 별 과장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제도와 관행에는 지난 200여년에 걸친 그들의 시도(trial) 그리고 실수(error)가 녹아있다. 그래서 미국은 현대 민주주의의 박물관 혹은 살아있는 화석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이런 점이 미국을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특징적인 민주주의로 만들며, 따라서 어설픈 관찰자, 연구자들이 당최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제공한다. 
민주주의와 관련한 미국의 여러 제도, 원리 그리고 실천들이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여러 후발 민주주의 국가들에 수입, 이식되었다. 아마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제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그것을 하나의 총체로서 도입하지 못했으며 사실 그것은 가능치 않다. 각국가는 미국의 여러 제도적 셋팅이나 원리 혹은 실천들 가운데서 일부분 내지 한 단편들을 조각조각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미국의 제도적 예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역이 선거제도와 정당제도일 것이다. 아마 한국의 대부분의 정치학자들, 심지어 미국정치 전공자라 할지라도, 미국의 다양한 통치의 수준들에서 사용되는 각양각색의 선거제도를 꿰고 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선거와 관련된 모든 결정 권한이 각 주에 주어져 있고, 해당 주들은 건국과 연방 건설 이후 저마다 독특한 선거제도를 만들고 또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왜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투표함에 제대로 유권자의 의사가 던져지는지, 혹은 던져진 표가 제대로 세어지는지가 여전히 문제시 되는 것은(2000년 대선 처럼) 이런 복잡성에 일차적 이유가 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중선관위라는 선거를 총괄하는 중앙기구도, 전국적으로 단일한 투표 방법, 투표 용지, 캠페인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 각국들간의 선거제도의 차이보다도 미국의 여러 주들간의 선거제도 차이가 훨씬 더 큰 것이다.


정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대적 의미의 정당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그것이 유럽으로, 남미로 그리고 아시아로 건너갔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국가라면 모두가 복수의 경쟁적 정당체제를 갖고, 또 그것이 미국에서 기원한 바 자신들의 정당이 미국의 그것과 유사할 것으로 착각하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당 조직, 시민사회와의 관계, 국가 혹은 중앙 관료조직과의 관계, 정당간 경쟁의 양식 모든 것에서 미국은 가장 독자적인 모델을 갖는다.

그래서 웨스트 윙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탐구 없이 사실상 이해불가능한 미국정치와 미국정부에 대한 개괄적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장 쉬운, 그것도 즐거운 방법인 것이다. 웨스트 윙은 실제 그리고 지금 미국 정치의 여러가지 정치적 이벤트와 관행들, 중요 이슈들을 중심 소재 삼아, 그리고 실제 일어나는 민주, 공화 두 거대정당간의 협력과 경쟁, 입법(상하원), 행정, 사법부의 권력기구와 제도들간의 협력과 경쟁을 백악관에 한정되지만 주요 정치행위자를 중심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의료보험 개혁시도에서 잘 나타났듯이 미국에서 대통령이 주도한 법안이 통과되기 위해 의사당 본회의장 뒤편에서 어떤 거래와 협상이 일어나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누가 어떤 인센티브와 레버러지를 가지고 입법전쟁에 뛰어드는지 우리는 웨스트의 몇몇 에피소드를 통해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미국의 대법원(supreme court)의 대법관을 선정하는 과정 역시 얼마나 정치적이며, 그것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단순히 책으로서만 이해하기 무척이나 어렵다. 특히 한국처럼 뭔가 불편부당 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사 지명과정과 기준이 있는 것처럼 믿어지는 나라에서 이런 미국적 사고와 관행은 낯설고 어쩌면 터무니 없는 것으로 여겨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압권은 역시 선거이다. 미국에서 선거, 특히 대선은 거의 1년에 넘게 걸리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이다. 긴 캠페인을 통해 시민들의 이해와 요구는 표출되고, 선거 승리를 원하는 후보와 정당에 의해 집약된다. 특히 시즌 7에 나오는 바틀렛 대통령 이후 무명의 산토스라는 남미계 3선 하원의원이 민주당 후보 지명을 받고, 결국 공화당 매버릭 상원의원인 비닉에게 선거승리를 거두는 과정은 마치 지난 오바마의 대선 과정을 예견한 것처럼 흥미롭다. 여기서 우리는 인물(후보자) 중심의 선거, 중앙당의 역할, 러닝메이트 선정과정, 지역, 이슈, 종교 등 여러 사회인구학적 차이들에 대한 각 캠프의 전략, 전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웨스트 윙은 미국정치에 관한 가장 괜찮고 재밌는 시청각 교재이다. 다른 미드보다 아무래도 흡입력과 긴장감은 떨어진다하더라도, 그 구성과 주요 인물들의 내러티브 등은 어느 하는 놓칠 것이 없다. 그래서 웨스트 윙은 미국에서 수 많은 방송관련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추가1) 미드와 한드


최근 미국드라마를 많이 보게 되는데, 한국 드라마와 그 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것에 사뭇 놀란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미국 드라마에 감탄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그 스케일과 이를 뒷받침 하는 제작비와 테크놀러지 등이 아니다. 혹자들은 쉽게 스케일과 돈의 차이가 한드와 미드의 차이를 만든다고 치부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것일지라도, 완전한 사실은 아니다. 

내 생각에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스토리, 혹은 이야기 꺼리이다. 미국 드라마는 너무나 다양하고 전문적이다. 기업, 테러, 정치, 의료 등 그 소재가 무엇이든 우리는 그 분야의 문외한으로 잘 알기 어려운 수 많은 풍부한 이야기와 정보 그리고 재미를 얻는다. 하다못해 코믹 시츄에이션물 조차 미국 사회 혹은 가족의 여러 단면들을 엿보게 해준다. (최근 MBC 지붕뚫고 하이킥은 이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한다)

그러나 한국드라마에서 소재는 단순히 남여 주인공의 직함으로 환원된다. 본격 의료(병원) 드라마는 단순히 의사 또는 의대생이라는 직함을 가진 남여 주인공이 병원에서 환자를 앞에 두고 자행하는 애정물로 전락하기 일쑤며, 기업드라마는 대기업의 '실장' 혹은 '팀장' (주로 회장 사장의 자제들이다)  똑똑하고 이쁜 여자 직원들을 대상으로 회사에서 벌이는 애정행각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최근 한국드라마에서 말해지는 소재의 다양성은 결국 애정행각을 벌이는 주인공들의 직함과 배경화면의 다양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는 심지어 사극에서도 이어진다. 선덕여왕은 어떤 경계선에 위치하다 결국 안전한 한국식 드라마로 돌아간 예가 아닐까? 초기 미실과 덕만의 다른 정치관, 권력관의 경쟁을 보여준 풍부한 내러티브는 한국 사극 답지않다는 후한 평가를 줄수 있었지만, 결국 제작진은 이를 중심으로 끌고 가지 못했다. 그럴 실력과 의지를 갖지 못했으리라. 그들이 시청률의 변동에서 항상 선택한 것은 결국 가장 안전하고 그리고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애정물로의 도피이다. 비담과 선덕여왕의 러브신이라니?

추가2) 한국 엘리트의 미국 수용에 대하여

한국 사람들 특히 한국의 지도층과 주류들은 미국을 좋아한다. 아마도 한구의 지도층과 주류가 미국에 대해 갖는 짝사랑과 집착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미국적 제도, 문화, 그리고 사고방식 그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한국드라마 혹은 제작진들의 그것처럼 편향되어 있고, 제멋대로이다. 한국의 드라마 제작진들이 미드와 헐리우드를 흠모하며, 미국드라마의 외양만 배끼는데 급급한다. 그것이 잘 안될 경우 제작비와 시장의 규모의 차이를 강조하며 애국심을 강조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미국 드라마를 끌고 가는 가장 기본적이며 절대적인 요소라 할 스토리에 대해서, 어쩌면 큰 비용 없이 가능한 부분에 대해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배우려는 노력은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 결과는 스토리가 엉성하거나 엉성하기 그지 없이 미국 드라마와 영화의 외양만 흉내낸 (그러나 그마저도 제작비 차이로 어설픈) 드라마의 양산이다. 아마 아이리스가 대표적이 아닐까? 온갖 미드와 헐리우드 영화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장면은 다 가져다 놓았고, 그 점에서 너무 훌륭해서 한 10분 정도만 본다면 우와 헐리우드랑 한국 드라마랑 이제 차이가 없구나라는 착각을 가지게 되지만, 그 이상의 시간을 넘어서면 도대체 이야기가 진행이 되지 않는다. 얘와 얘는 왜 갑자기 사랑에 빠졌고, 왜 복수를 결심하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야기 곳곳이 텅텅 비어있다. 그냥 "그림만 봐라 좋잖아" 하고 강변하는 듯 하다. 사실 그림은 좋다. 김태희에다 김소연까지 볼 수 있으니.

한국의 지도층은 미국의 많은 제도를 흠모하고 그것을 한국에 가져오기 위해, 주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기를 쓴다. 그러나 정장 그 제도가 작동할 수 있는 기본적 원칙과 조건, 즉 스토리와 맥락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 그렇게 사외이사제를, 혹은 입학사정관 제도, 혹은 주소지 부여 방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또 그러는 중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에서 잘 될리가 없다. 사외이사가, 수학능력, 학부제, 입학사정관이, 길 중심의 주소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과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때 이렇게 외삽된 변화와 개혁은 대체로 그 이전 상태 보다 더 나쁜 것이기 쉽다. 평가의 공정성, 학교 교육의 정상화, 가정배경의 학생성적에의 영향 등의 중요한 기준에서 수능이 학력고사보다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최근 정치권과 미디어에서 논의되는 미국식 대통령 4년 중임제로의 개헌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수정 20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