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2일 월요일

[긴글] 야당 없는 민주주의의 문제

선생님께

보내주신 발표문 잘 읽었습니다. 발표문도 좋았지만 메일에 소개된 토론회 풍경이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지난번 얘기하셨던 '신년회' 모습과 더불어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현재 한국정치의 문제들을 가리키고 있는 중요한 징후가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라 불리고 칭하든 (민주파, 진보파, 혹은 개혁파) 민주화 이전시기 제도권 안팎에서 권위주의 독재에 대한 반대를 조직했고, 그 결과 내지 보상으로서 민주화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민주파' 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했고, 그 과정들을 통해 느슨하게나마 공유된 정치적 이익과 이념의 공동체(민주당으로 한정되진 않는)를 구성하는 인사들이 삶과 세계에 대하 인식과 태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현재로는 집권가능이 매우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멀지않아 현 집권세력에 대항해 ‘대안정부’를 구성케 될 이들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오늘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를 이해하는데 큰 함의를 가질 것입니다.

두 가지 풍경을 통해 인상적인 사실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것이, 명사들의 토론회든 사제모임이든,  한국적 전형에서 일탈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일탈이 ‘생각의 차이’ 보다는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에 주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그들의 ‘언표화된’ 정치적 이해들이, 단순히 레토릭이나 정치전술의 견지에서  혹은 단기적, 정치적 전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 그들이 그렇게 믿는다는 것과 그 크기를 가늠케 하기 때문입니다. 즉 토론회/신년회에서 드러난 ‘차이를 표출하는 방식’의 일탈은 기존의 관습적 인간관계의 규칙 혹은 행동규범을 무시 혹은 망각할 만큼, 자신들의 가지는 사태인식에 대한 확신의 정도가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들의 사태인식에서 ‘적’으로 규정된 이들 뿐 아니라, 그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도 ‘적의’와 ‘공격성’을 애써 감추지 않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추후 좀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현실보다는 환영(delusion)에 기초한 그들의 정치적 지배담론이 시간이 지날수록 동질 그룹들간의 폐쇄적 정보교환을 통해 더욱 더 강화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것은 사태정의와 해법에서 “MB 독재론”으로 불러질 만한 정치담론으로 완성되었고, 다시 그것은 민주파에 속하는 개인 및 그룹의 행태와 삶의 양식을 구속하는 하나의 ‘세계관’의 수준으로 발전한 듯합니다.

이 담론 내지 세계관의 핵심은 이명박, 한나라당 정부는 서로 다른 부분(특정의 이념/가치나 유권자그룹에 편향적인)에 기초하나 전체(입법/행정권력)에 대한 대표를 지향하며, 주어진 규칙(법, 제도와 정치적 관행) 아래 경쟁하는 정치적 상대로서 보기 보다는, 과거 군사정부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타도와 섬멸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두 번의 행정/입법 권력을 둘러싼 선거에서 크게 패배하고, 여전히 낮은 지지도에 허덕이는 정치세력들이 동일한 선거에서 크게 승리하고 여전히 과반에 가까운 대통령 업무 지지도와 가장 높은 정당지지도를 기록하고 있는 정치적 상대에 대해 내리는 그 같은 규정은 적어도 “다수의 지배”(majority rule)를 핵심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를 가지고는 그 정당성과 근거를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는 최근 왜 그들이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민주주의와 역사적 친화성을 갖지만 엄밀하게 민주주의가 아닌 원리와 가치(공화주의, 직접민주주의)에 부쩍 기대거나, 혹은 다양한 형태의 비민주적인 “알리바이” (대표적으로 “깨어있는 시민”을 강조하는 유권자 자격론)에 의존하는 가를 설명해 줍니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사태인식에 이에 기초해 만들어지는 정치적 전략과 전술의 오류로 이어진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MB 정부에서 입안, 집행되는 모든 입법, 정책들이 소수 특권계층과 정책집행 과정에 부수하는 이권을 공유하는 기득집단들을 위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또 미국의 오바마/민주당 정부에 대한 공화당이 보여주는 것과 거의 흡사한 모든 입법 및 정책에 대해 전면적 반대(obstructionism)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촛불시위,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파의 단일의 우월전략으로 부상했습니다. 물론 MB 정부의 입법, 정책들이 특권계층/기득이익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현 집권세력과 다른 부분의 대표를 적어도 자임하고 있는 세력으로서 어느 정도의 반대와 충돌은 불가피하고, 또 정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 공화당에서처럼 그 같은 전략은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지지층을 동원해 내는 점에서 일정부분의 효과를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민주당/진보정당/노무현 그룹 등을 포괄한 민주파 지배전략이 MB 혹은 한나라당의 입법/정책 하나 하나에 대한, 또 동일한 정책 내에서 구체적 부분, 부분에 대한 치밀한 정치적 계산을 동반한 심도 있는 논의와 검토의 결과에 의한 반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MB 정부의 입법. 정책에 대한 평가와 판단에 선행한 그 입안자들에 대한 도덕적 평가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민주적, 도덕적 정당성을 결여한 입안자들에 의해, 좋은 입법과 정책이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어쩌면,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들에게 현 집권세력 역시 국민의 여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그리고 다음 선거의 승리를 바라고, 행위 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의 정치행위자가 아니라, 국민여론과 선거평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독재파쇼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뉴욕타임즈의 데이비드 브룩스가 적었듯이 민주주의에서 통치, 혹은 정책결정은 완전한 진실과 완전한 오류/거짓간의 투쟁이기 보다는, 불균등한 진실(unequal truth)들 간의 경쟁이라는 것입니다. 달리말해, 현 집권 세력 역시 “집권시 업적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하는 선거를 통한 권력획득”이라는 민주주의가 부가하는 근본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고, 또 이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들의 입법과 정책은 전체 사회의 부분을 대표하고, 또 이를 넘어 다수획득을 겨냥한 진실에서 완전히 멀어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현 정부 출범 이후 여야간 혹은 집권/대안 세력간의 주요 전장이었던 미디어법, 세종시, 4대강 등의 이슈들과 갈등양상에서 잘 드러납니다. 미디어법의 경우 “미디어 환경의 급변 대비”와 “기존 공영방송들의 독과점이 만들어 낸 저질방송, 방송계 종사자의 이익만을 위한 독립과 이에 대한 광범한 시민들의 누적된 불만”이라는 진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세종시의 경우에도 ’지역균형발전 수도권 과밀로 인한 국민경제의 비효율 해소를 위한 행정수도와 공공기관 이전‘이라는 “진짜” 원안(물론 이 원안 역시 의도한 효과를 낼 것인지에 대한 상이한 평가는 논외)이 수도권/보수층의 반발과 헌재 결정,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정치적 타협으로 이어진 현재의 ’세종시‘ 수정안(현재 원안으로 불리는; 여기서 원안 변경에 대한 책임 소재는 논외)이 가져올 분명한 ’비효율‘과 세종시 건설로 손해가 예상되는 지역, 집단의 누적된 불만이란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4대강 정책 역시 지방에 대한 단기적 경기부양 효과와 그간 중앙정부의 하천 관리를 위한 투자의 우선순위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나, 방치되어온 지역의 불만과 해당 주민들의 이익이라는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문제는 ‘MB 독재론’에 기초한 전략, 전술이 이러한 집권세력의 진실들을 모조리 거짓으로, 이를 추진하는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전면적 반대(따라서 현상유지)를 완강하게 고수하는 것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해당 이슈들에서 집권세력의 정책에 대해서 지지하지 않지만, ‘현상유지’에 대해서도 불만이 높았던 다수의 사람들을 이탈시키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모든 이슈들에서 초기에 상대적으로 반대세력에 우호적이었던 여론이, 선과 악의 투쟁을 거듭할수록 오히려 역전되는 공통된 경향에서 잘 나타납니다. 정교한 제도적/관습적인 정치적 반대의 장치들을 가진 미국정치, 그리고 그 속에 위치한 공화당과 달리, 한국정치에서 선과 악에 기초한 ‘절대적 반대’ 전략의 결과는 의도했던 100%를 지키기는커녕 100%를 내주는 상황이 거듭해서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전략의 오류와 정치적 실패는 노무현 정부 하의 박근혜 한나라당과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동일한 순서, 비슷한 크기의 선거승리를 통해 행정/입법 권력을 장악한 노무현/열린우리당 정부 역시 소위 ‘4대개혁 입법’이라는 현 집권세력에 뒤지지 않는 야당에 대한 수(힘)에 의한 정면돌파로 일관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은 사실, 차떼기/탄핵 등으로 현재 민주당 보다 의석수는 많을는지 몰라도, 정치적으로 허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4대입법 중에서도 여야, 집권/반대세력간의 핵심전장은 국가보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개과정은 사뭇 대비됩니다. 박근혜 대표의 한나라당 지도부는 당시 당내 김용갑, 정형근 의원 등의 당내 강경파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 전향적 검토를 당론으로 채택했습니다. 그것은 국가보안법의 주요 독소조항 삭제, 국가보안법 명칭 변경, 형법으로의 대체입법까지 염두에 둔 보수파로서 상상하기 힘든 전향적인 것이었습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지도부는 지난한 공개/비공개 협상의 결과 또 이 정도의 내용을 담는 타협안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문제는 박근혜의 한나라당의 이러한 전향적 태도가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강경-온경사이의 분열을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열린우리당의 재야/386 출신 강경파는 의총에서 지도부/협상단의 타협안을 추인이 아닐, 토론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어설픈 개정보다는 현행유지가 낫다고 공연하게 천명한 유시민 등의 국보법 폐지론자들에 의해 타협안은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최종적 결과는 그들이 두 번째로 원했던 국가보안법의 현상 유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장인 김원기가 개혁파 그룹의 국보법 폐지안에 대한 직권상정 요구에, “부끄러운줄 알라며” 매몰차게 거절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은 노무현 정부 내내 이어졌습니다. 박근혜의 한나라당의 적절한 의회전략은 열린우리당의 강경파와 온건파를, 혹은 청와대와 당지도부를 분열시켰고, 이는 다시 거듭된 중간선거 패배와 열린우리당 해체와 집권실패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현재 민주당이 야당하는 수준은 박근혜의 야당보다도 수준이 낮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한 마디로 야당이 있는 체제로 정의됩니다. 여기서 나아가 저는 최근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은 야당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합니다. 지난 설을 전후로 한 한국의 제1 정치균열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간의 소위 ‘강도논쟁’이라는 설전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정치적 쟁투의 쌍방이 여당과 야당 혹은 집권세력 리더와 대안세력 리더가 아니라, 집권세력 내의 현임, 차기 지도자라는 점은 균열축의 보수적 편향을 보여주며, 그마저도 아무 내용 없는 감정적 설전이라는 점은 균열의 허망함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이-박간의 강도논쟁과 그 와중에 존재감을 찾기 힘든 야당과 야당 리더의 모습은 현재의 한국민주주의 그리고 한국정치가 얼마나 나쁜가를 압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정도 얘기를 진행하면, 자칭 민주파들은 “당신 MB/한나라당을 지지하느냐” 혹은 조금 점
잖은 사람이라면 “당신의 진의는 알겠는데 그것은 결국 MB/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다”라고 반응하곤 합니다. 따라서, 그런 이들 때문에 다음과 같은 현 집권세력에 대한 저의 개인적 평가 즉 왜 “MB독재론”이 현실이 아닌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볼 때, MB/한나라당은 이념, 정책면에서 분명히 보수적입니다. 그들은 분명 전체 유권자 집단 가운데 상대적으로 잘 사는 사람/계층에 편향적이며, 노동부문 보다는 재계의 이익에 우선적으로 복무합니다. 평등보다는 자유를 사회정의 보다는 효율성의 가치를 신봉합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주로 감세, 탈규제, 민영화 그리고 작은 정부(적어도 레토릭으론) 등의 정책을 표방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대표, 원칙과 가치, 정책에서의 부문 편향성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순 없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정당은 전체이익의 대표가 아닌 부문의 대표에 기반하고, 또 여기서 시작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회 내 한 부문의 대표이지만, 다수형성을 핵심으로 하는 선거에 참여하는 한, 전체이익과 공익의 실현에서 완전히 이탈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는 소위 상층/재계 부문의 대표인 보수정당이 다수형성의 지향성을 보여주는 가장 잘 알려진 논리일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특정 계층/집단의 편향적 가치와 정책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 종국에는 다른 부문의 이익으로 “흘러 넘쳐” 전체의 이익에 복무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최근 전세계적 금융위기 속에 그런 논리와 이를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상당히 힘을 잃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런 견해는 주요 선진민주주의 국가의 현직, 혹은 제1대안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은 80년대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이전 시기 진보적 편향에 불만을 품은 다수의 유권자들에 의해서 채택된 정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비판의 지점은 그들의 부문의 대표의 편향성 내지 보수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비판은 그 같은 입장이 자신들의 원래 말과는 다른 형태로 실천하고, 현실의 문제를 풀기보다는 악화시킴에도 이를 고수하고, 혹은 현재의 곤란을 단순히 미래로 전가하는 데 나타나는, 무능, 거짓, 무책임에 맞춰져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잘못된 정책 우선순위을 갖고, 미래세대가 감당하기 어려울 수준으로 국가부채를 증대시키고, 실업과 빈곤 등의 문제에서 잘못된 처방을 고수하는 MB/한나라당 정부는 보수적이거나 부문 편향적이어서가 아니라,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입니다.

저는 MB 정부가 정부 운영하는 면면에서 권위적의적 행태를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보수적 경향성을 갖는 사법부로부터 자주 지적될 만큼이나 무리한 것이며, 이는 반대파에 의해 종종 독재/파쇼의 규정의 증거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같은 국정운영에서의 권위주의적 행태가 “자유롭고 공정하고 정기적인 민주적 선거 실시 여부”로 결정되는 한 정치체제로써의 민주주의 혹은 권위주의의 규정으로 이어질 순 없습니다. MB정부가 권위주의로 규정되기 위해선, MB와 한나라당이 공공연하게 민주적 선거 그 자체를 거부하거나, 혹은 선거결과를 사전에 결정지을 수 있는 혹은 상당한 영향을 끼칠 만큼의 경쟁의 룰의 변화를 시도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MB정부 하에 치러졌던 지난 보궐선거의 양상과 야당의 승리는 이런 규정이 별 근거를 갖지 못함을 말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정치 운영에서의 권위주의적 행태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체제 수준이 아니라 정책 입안/집행의 행태상의 권위주의는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민주화 이후 정부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단국가하의 군사정부 하에서 형성된 강력한 국가와 적어도 제도적으론 막강한 대통령직의 유산이라 여겨집니다. 입법/사법/행정의 3권간의 정교한 수평적 견제의 사슬과, 단임제와 허약한 정당이 만들어낸 수직적 책임의 사슬 모두에서 자유로운 대통령(직)은 사실상 무한한 권력과 권한의 집중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임기 동안의 모든 선출직/비선출직 정치행위자들의 대통령 1인을 향한 구애, 간택경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게다가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과대성장’한 국가 강권기구와 어떠한 책임성의 고리로부터 단절된 비대한 관료기구들의 이해가 집권세력의 그것과 맞아뜨러질 때, 그들의 권위주의적 행태의 표출은 사실 필연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물론 지난 ‘민주파’ 정부에 비해 현 정부의 권위주의적 행태가 현저하게 증대된 듯합니다. 물론 그것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는 현 집권세력과 국가관료기구의 주요 행위자들의 이해의 일치와 정치행위자들의 ‘1인 중심의 중앙집권적 권력지향적 인센티브의 강화’에 있겠지만, 현재 야당의 약함 역시 크게 기여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가올 선거에서 현 집권세력의 집권가능성이 희박하고, 따라서 정권 교체가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현재와 같은 권위주의적 행태는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크게 제약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권/관료기구 내 주요 행위자들은 현 정부 뿐 아니라, 다음 정부에서도 가급적 중요한 자리에, 또 가능한 오래 머물기를 바라며, 정권교체가 임박한 상황에서 현 집권 세력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편향 내지 충성경쟁은 그들의 근본적 이해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저는 MB정부가 경쟁의 룰을 독자적으로 바꾸지 못하며, 선거결과에 종속되는 한 그들에 대한 독재파쇼 운운의 규정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 역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민주정부입니다. 물론 현저히 증가된 국정운영에서의 권위주의적 행태는 비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현 집권세력 만의 혹은 개개인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국 민주화가 갖는 역사적, 제도적 유산과 더불어 현재 정치동학에서 야당의 허약함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MB독재론“이 현실이 아닌 허구에 기초해 있기에, 그것은 이를 구성하는 연합은 이성적, 합리적 논의와 정상적인 이익/이해의 교환에 의해 지탱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이성적 담론과 상대의 이익과 이해의 억압기제가 등장합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것이 지난 총선에서 불거지고 노무현 대통령의 유훈을 통해 완성된 ”깨어있는 시민“ 식의 유권자 자격론이며, 후자에 해당하는 것은 ”반MB연대“입니다. 후자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은 정치평론에서 논의되었으므로 전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유권자 자격론은 자신들의 연이은 선거패배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등장했고, 노무현 대통령 죽음을 계기로 지난 정부와 집권정당이 받은 참혹한 평가에 대한 설명으로 연장되었습니다. 그 요지는 자신들의 패배 혹은 자신들의 정치행위에 대한 시민들이 내린 혹독한 평가의 원인을 시민들의 계몽되지 않은 혹은 못한 것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담론에서 지난 대선에서 ‘경제’를 내세운 MB의 승리는 ‘진짜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노동자와 도시빈민 등의 무지의 결과로, 지난 총선 수도권에서의 소위 주요 민주파 지도자들의 패배는 도시 중산층들이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물질적 욕망의 표출의 결과로 해석됩니다. 촛불시위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선거패배에 대한 알리바이로 등장했던 이런 담론이 한국 유권자, 민주주의 전반의 수준의 문제로 까지 연장되어 완성되게 됩니다. 한 마디로 MB정부와 한나라당의 집권은 한국 유권자들의 무지와 비도덕성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지난 ‘민주파’ 정부와 같은 좋은 정부를 몰라 보고, MB정부와 같은 나쁜 정부를 선택한 시민들이 MB정부하에서 겪는 곤경과 곤란은 자초한 것이란 힐난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최소한 선과 악을 분별할 만큼 ”깨어있을 것‘을 훈계합니다. 이는 그것이 이성, 지식 혹은 도덕성이든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의 자격기준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 “유권자 자격론”이라 할 만합니다.

유권자 자격론은 주어진 룰에 의해 치러진 경기에서 자신의 패배의 원인을 심판/평결자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황당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운동경기라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심판의 자질 문제도 제기될 수 있고, 특정 선수 편향 혹은 매수의 문제도 왕왕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의 선거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최종심급에서 이뤄지는 집합적 결정이기에, 그 누구도 심판에 해당하는 유권자/시민의 자질과 평결의 수준을 판단할 권위와 권능을 갖지 못합니다. 그것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선수(정당/정치인)라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이는 특정시기, 특정한 내용의 시민의 집합적 평결이 완전무결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는 그것을 뒤집거나 부정할 만한 다른 수단과 상응하는 권위를 가진 주체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특정의 선거결과를 부정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선거를 한 번 더 하는 것 이상의 우월한 방법을 갖지 못합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전체 시민이 매일 매일, 사안 사안 집합적 평결을 반복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대의제 민주주의는 중요한 사안(정치결정을 위임 받을 이들의 선택)에 한해 정기적인 집합적 평결(4-5년)을 가능케 하는 현실에서 가능한 유일한 제도입니다.

두 번째 유권자 자격론의 문제는 민주주의하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해당시기 만들어진 시민들의 결정이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란 견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당신들은 MB, 혹은 한나라당 같은 나쁜 정치인 혹은 정당을 선택할 수 있냐고 힐난 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선거에 임하는 유권자에 주어진 투표지는 백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답(후보 정당)을 마음껏 적는 주관식이 아니라, 주어진 답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선택하는 객관식입니다. 예를들어 2007년 대선에서 결국 유권자에게 주어진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고, 어떤 매력도 발견하기 힘든 MB와 지난 4-5년간의 거듭된 국정혼란과 실정의 핵심 책임자인 정동영간의 선택입니다. 아마도 유권자는 지난 4년의 실정에 대해 책임도 묻고 싶고, 이에 더해 도덕적으로, 능력면에서도 우수한 어떤 후보에 투표하고 싶었을는지 모릅니다. 또 2개의 주요정당간의 경쟁으로 단순화 되는 단순다수제 하에서,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되기를 원치 않는 유권자들은 그 후보가 역시 주요 정당의 후보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주요 정당의 도덕적이고 자질을 갖춘, 매력적이며, 지난 정부의 실정에 책임이 없는 그런 후보는 투표용지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의 평결이 보여주는 것은 한국의 유권자들이 MB와 한나라당을 절대적으로, 상대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시 높은 기권율이 말해주듯, 그것은 차선도 아닌 차악을 둘러싼 고통스런 선택을 강요하는 투표용지였습니다. 그 결과, 즉 “누가 덜 명백히 나쁜가”라는 경쟁에서 한나라당의 MB가 승리한 것입니다. 정치학적으로 말한다면, 유권자들의 현직(과거)정부에 대한 심판이라는 회고적 판단이 “어떤 후보가 더 낫고 앞으로 잘 할 것인가“라는 전망적 판단을 압도한 결과일 것입니다. 회고적 투표와 전망적 투표 사이의 갈등은 민주주의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의 영원한 딜렘마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유권자는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잡을 수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각자 투표 시점에서 보다 중요한 가치 중 하나에 투표해야 합니다. 요컨대 지난 대선은 MB에 대한 전망적 기대는 결코 높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정심판’이라는 회고적 돌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다수가 동의했음을 보여줍니다(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대선과 비교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유권자들에 이 처럼 나쁜 선택지를 제공한 주체들이, 회고적 판단이 어떤 전망적 기대를 압도하게끔 국정을 운영한 이들이, 그마저도 차악간 경쟁에서조차 선택되지도 못한 이들이 유권자의 도덕성과 지식수준을 들먹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 유권자들의 판단이 얼마나 올바르고 정확한 것이었나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지난 대선 패배는 유권자들의 무지와 비도덕성이 아니라, 선거에서 패배하고도 자신들의 실정과 실패를 돌아보기보다는 시민의 탓을 할 만큼 타락하고 무능한 ‘민주파’ 자신들 때문입니다.  

사실 시민 다수를 구성하는 노동자와 하층계급의 투표능력과 자격에 의문을 제기하는 유권자 자격론은 민주주의 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합의는 이미 존재한다고 봅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이 이를 운영하는 시민들의 수준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은 틀리지 않고 별 문제도 없습니다. 문제는 시민들의 수준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단일한 변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이를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높이는 어떤 ‘기획’ 내지 ‘프로그램’ 은 항상 실패해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특별한 지적, 도덕적 수준을 가진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범한 수준의 도덕성, 이성, 지적능력을 갖추고 그마저도 생계에 바빠 정치에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관심을 쏟아 부을 수 없거나, 별다른 이유 없이 그러지 않는 이들을 위해 고안된 체제라는 것입니다.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가 만들어지던 18-19세기에 노동자와 빈민의 정치참여를 위협을 느끼고 불온시 했던 귀족/엘리트 계급에 의해 지지되고 유포된 유권자 자격론이 현 시점 한국에서 소위 진보파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 민주파의 ‘MB독재론‘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역사적 유산을 갖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를 작동시키는 핵심적인 동력은 민주파의 지난 10년의 성공적이지 못한 집권을 결과한 그들의 무능력이며, 또 그러는 와중에 10년의 집권을 통해 나눠가졌던 이익과 이를 잃은 상실감입니다.

실질적이 아닌 절차적 의미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상, 즉 민주주의 선거가 부가하는 ’다수획득에 의한 공직/권력 장악‘이라는 원리가 모든 정치 행위자들의 제1원리가 되는 이상, 민주 대 독재의 구도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MB 파쇼독재를 선거를 통해 쫒아내는 것이 가능한 이상 우리는 그것을 독재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선거를 통해, 그들을 청와대에서 그리고 의사당에서 쫒아낼 실력도 자신도 없는 한국의 민주파들은, 어쩌면 왜 자신들이 쫒겨났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은 'MB독재'라는 환영에 기꺼이 빠져듭니다. 그 환상 속에서 MB독재의 야만과 폭력을 강조하고, 민주-독재라는 바리케이드를 다시 쌓고 날선 투쟁과 구호를 외치는 한, 모든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는 자신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MB와 한나라당 파쇼의 문제이며, 지식인들의 비겁과 변절의 문제이며, 시민들의 무지와 탐욕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현재 한국정치, 한국민주의의 핵심 문제는 대안정부로서의 야당의 허약함을 넘어 그 부재에 있으며, 또 이유는 그들의 “MB독재론”과 "유권자자격론"에 고스란히 집약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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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로그의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두서없이 막 내재낀, 학문적이지도 일반독자 친화적이지도 않은 글 임.
2. 추후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용을 보강해 MB독재론을 중심으로 한 '야당 없는 민주주의'와  한국 민주파의 정치적 무능과 도덕적 타락을 말하는"엉뚱한 시공간에 불려들어진 유권자 자격론"으로 나눌 생각 입니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긴글] 트위터 선거법 논란과 민주화이후 정치개혁의 역설

<from tistory blog>


"민주화 이후 개혁"의 지독한 역설. 현대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긴장 속 공존을 특징. 정작 규제되어야 하는 것(자본의 힘)은 다 풀고, 규제돠어선 안되는 것(시민의 힘)을 규제하는 참담한 상황. Feb. 11, 2010  

오늘(11일) 중앙선관위 계정이(@nec3939)가 트위터에 등장했다. 그리고 아래의 트윗을 시작으로 트위터에서 할 수 있는 행위와 없는 행위를 알리기 시작했다.


트위터를 이용하여 언제든지 할 수 있는 행위 - 선거에 관한 단순한 의견개진 및 의사표시를 하는 행위 - 정당의 후보자 추천에 관한 단순한 지지·반대의 의견개진 및 의사표시 

선관위의 이런 움직임이 그 자체로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거법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한 법 위반과 이에 따른 곤란을 예방하는데 있어 긍정적 효과를 가질는지 모른다. 

사실 다가올 6월 지방선거를 대비한 선거/사정당국의 불법 선거운동 단속 의지와 작년 11월 이후 가입자를 극적으로 증대시켜온 트위터와의 충돌은 불가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충돌의 모습은 대체로 예견된다. 그간 분명한 정치적 선호를 가지고 정치적 의견개진을 피력해 온 적지 않은 수의 사용자들은 강하게 반발할 것이고, 선관위와 사정당국은 현행 법을 내세워 강한 단속 위협을 꺽지 않을 것이다. 충돌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몇몇 시민사회단체에 소속된 사용자 혹은 몇몇 '용감한' 사용자들은 "악법에 맞서 불법으로 투쟁할 것"이며, 다시 그들 중 일부는 그간 그랬던 것처럼 기소와 재판을 거쳐 벌금형에 처해질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용자들은 법적 조치에 대한 두려움 혹은 불편함에 결국 굴복할 것이며, 자기검열을 강화할 것이다. 그렇게 트위터를 둘러싼 논란은 마무리 될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MB 정부 혹은 MB 정부하의 사정기관의 비민주성과 야만성을 드러내는 사례로 사용될 수 없다는 점이 강조 되어야한다. 민주화이후 그들은 줄곧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또 사정기관들이 현행 법 테두리 내에서 행사하는 법 적용 자체를 아예 부정할 근거 역시 없다.

최근 하나의 다른 흐름이 목격된다. 이미 트위터와 진보매체를 통해 가시화 되고 있듯이, 진보/개혁정당과 단체 그리고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트위터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의견 표명에 대한 국가 사정당국의 개입을 막기 위한 선거법 개정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시도가 가져올 성과에 대해 회의적이다. 나아가 트위터를 내세운 그 같은 즉자적 반응과 논의가 문제의 본질에 전혀 접근하지 못한 미봉책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는 "개혁성" 혹은 "선명성"을 내세워 단기적 정치적 이득을 꾀하는 시도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혹자는 "당신은 트위터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표명과 발언의 자유가 가치 없다고 생각하나? 또 "이를 지키기 위한 선거법 개정 시도의 개혁 정치인들의 진정성을 진정 모른다 말인가?"라고 힐난조의 질문의 던질는지 모른다.
   
이에 대한 필자의 간명한 답은 "별루", "잘모르겠는데" 이다. 추후 자세한 논의가 이어지겠지만, 현재와 같은 "규제 중심의" 선거법 그리고 가공할 권한/자원을 보유한 선관위의 선거에 대한 '사정적' 접근이 압도하는 상황에서, 시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권은 트위터 혹은 온라인 공간에서만 제약되는 것이 아니다. 선거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시기,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해, 아주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행사되는 것이 한국 시민의 정치적 권리이다. 그런데, 왜 유독 트위터 공간에만, 혹은 트위터 이용자에게만 더 큰 정치적 권한을 허용해야 하는가? 답하기 어렵다.

따라서, 트위터를 중심으로 한 현재의 선거법 개정논의가 한국 선거법 전반, 특히 민주화 이후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된 그 변천과정에 대한 구조적이고 종합적 진단과 평가, 그리고 단순히 눈앞에 닥친 지방선거가 아니라 길고 긴 연구와 논의, 정당과 시민사회, 그리고 주요 정당들간의 정치적 타협의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그런 시도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를 주창하는 정치인 혹은 정당이 만약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값싼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한 행위에 다름 아닐 것이며, 모른다면 그 정치적 판단력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놀라울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선거법은 권위주의의 잔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수 정치세력 혹은 선관위를 포함한 사정당국의 창조물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YS 정부하에서 1994년 "혁명적" 선거법이 만들어진 이래로, 그것은 항상 기본적으로 국회 정개특위라는 초당적 논의와 협상의 산물이었고, 그 내용과 방향은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치인, 그룹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런 흐름은 DJ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고, 나아가 제도권 밖 개혁그룹의 광범한 참여가 이뤄졌다. 지난 민주정부들에서 선거법 논의를 주도한 인사들은 보수정당도 아니고, 부패한 정치인들도 아니다. 물론 그들의 거센 '개혁' 저지의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며, 따라서 단기적인 반동은 항상 존재했고, 그 과정은 지난한 것이었지만, 그때 그때의 최종 결과물은 조금 부족한 점은 있을지은정 항상 제도권 안밖의 진보/개혁적 인사와 그룹들이 변화시키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시기 선거법의 변화를 주도했던 이들과 현재 선거법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사실이 못된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왜 트위터에서 선거운동을 막느냐라는 지엽적인 문제도 아니고, 반민주 파쇼정권과 그들의 주구가 우리의 선거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다는 거짓된 정치선동이 되어서도 안된다. 질문되어야 할 것은 "왜 우리가 이런 선거법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갖게 되었냐"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개혁을 지배한 제일 화두는 단연 부패척결 이었다. 그것은 YS 정부의 "깨끗한 정치", DJ 정부의 "저비용 고효율정치", 노무현 정부의 "청정정치" 등으로 이름을 달리하며 진화해 왔다. 이런 문제의식은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당이, 또 동일 정당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신진의 개혁성향의 정치인이 권위주의적 유산을 가진 상대 정당 이나 부패적 정치 게임에 이미 적응한 기성 정치인들을 공격하고, 지지를 동원하기에 적합한 화두였다. 그리고 "한보사태", "대선자금 수사" 등 주요 정치적 스캔들이 일어 날때 마다, 그래서 보수/부패 정치세력의 방어력이 현저히 약해 질때마다, 그들은 부패 정치(정치인) 척결을 위한 제도개혁을 경쟁적으로 내세웠고, 그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선거법은 완성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런 선거/정치개혁이 비단 개혁/진보 정당/정치인들만의 전유물도 아니었고, 그들의 힘만으로 이뤄질 수도 없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일부 기득 유력 정치인을 제외하고, 개혁/진보파 정치인들과 더불어, 개혁의 순간에 '정치부패 척결'을 내세우며 동맹에 동참했던 세력은 보수/진보언론, 주류 정치학계, 재계, 검찰과 선관위를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가히 부패담론을 앞세운 정치개혁 동맹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민주화 내내 계속된 부패에 방점을 찍은 정치개혁 그리고 선거법 변화의 최종 종착지는 2004년 소위 '오세훈' 선거법이란 '괴물'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겠지만, 2004년 정치개혁법을 사실상 입안하고 일부 부패정치인을 제외한 광범한 지지를 이끌었던 범개협(박세일 위원장)이란 단체는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작품이었다. 이를 보고 혹자들은 거 봐라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 그리고 오세훈 의원의 작품이 아니냐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병렬 대표는 당시 소위 "차떼기 정당"의 오명을 벗고, 당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에서 였지만, 가장 개혁적인 스탠스를 취했던 이였다. 현 서울시장으로 개혁적 이미지를 상당히 훼손한 오세훈 의원 역시 당시 기성정치에 절망한 유권자들의 분노에 '총선불출마'로 반응함으로써 환호를 받은 아주 아주 '개혁적'인 정치인 이었다. 


어쨓든 그들의 작품이 아니냐고? 이렇게 질문하면 가장 서운해 할 이는 열린우리당일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는 잘 보여준다. 열린우리당이 2004년 선거법을 '오세훈 법안'으로 작명하는 언론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반박했는지, 또 한나라/민주 양대 보수정당에 맞서 결사적으로 범개혁 개혁안을 지켜내기 위해 열린우리당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열변하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주장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당시 열린우리당의 당 의장은 정동영 의원이며, 정개특위 민주당 위원장은 천정배 의원이다).

문제/사태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면서 좋은 해법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진보개혁파가 주도로, 한국 정치의 문제를 '부패'의 문제로 정의한 정치개혁, 그리고 그 산물로서의 선거법의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 그 핵심은 그것이 "어떻게 하면 부패의 가능성과 공간을 최대한 차단할 것이냐"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 그리고 선거공간에서 부패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지는 모든 정치개혁/제도변화의 문제를 부패의 문제로 환원할 때, 정작 중요한 문제들이 다뤄지지 못하고, 혹은 부패 보다 더 중요한 민주적 원리와 가치가 훼손당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지적코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정당간의 생산적인 정치적 경쟁을 증대시킬 수 있나? 어떻게 유권자의 참여와 정보 증대를 보장할 것인가? 정당의 대표성과 비례성은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등의 보다 근원적인 민주주의 원리와 가치의 실천이라는 문제의식은 민주화 이후 제도변화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문제 의식이 없는데 이에 대한 제도적 해법이 마련되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부패척결의 구호를 내세워, 진보/개혁 그룹이 주도의 정치개혁 동맹은 기득부패 세력의 강고한 저항을 뚫고, 선진 민주주의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조치들을 하나씩 완수해 가기 시작했다. 거듭된 개혁을 통해 선거운동의 방법, 기간, 횟수는 현저하게 축소되거나, 아예 사라졌다. 다른 나라 선거운동 보도에서 자연스레 등장하는 선거운동의 풍경 -호별방문, 후보옥외연설회, 정당연설회, 시민들의 자유로운 후보/정당 지지 피켓팅-은 우리에겐 머나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시민은 정해진 기간 동안, 법 조문에 구체적으로 명기된 방식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정치적 의견과 지지를 표명하지 못하게 되었고, 정치인 역시 정작 선거운동 기간에도 유권자에게 자신을 알릴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의 작동의 핵심 메커니즘이며, 산 교육장으로 일컫어지는 선거는 민주화 이후 정치개혁을 통해 그 권한과 자원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켜온 선관위의 관리의 대상쯤으로 전락해 버렸다. 슬픈 것은 이런 변화가 보수가 아닌 진보의 기획이며, 개혁의 실패가 아닌 성공의 결과라는 데 있다.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 친화성을 갖는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갖지는 않지만,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자본주의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수와 자본의 크기라는 각기 다른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긴장 속의 공존을 그 특징으로 한다. 민주화는 따라서 단순히 합법적 복수 정당의 존재나, 통치자의 문민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건설적 공존을 가능하도록 양자의 역학에 있어 정치의 힘(수의 힘)의 획기적 증대와 우월성을 확보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민주화를 통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치부문에서의 억압 즉 규제를 완화하는 반면, 그간 통제되지 못한 자본, 기득집단의 힘은 규제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은 민주화이후 개혁의 지독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트위터로 불거진 이번 선거법 논란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는 따라서 트위터에서 자신의 좋아하는 정치인에 대해 글질을 할 수 있냐의 문제로 협소화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건설적인 방향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정면으로 부딪혀야 하는 문제는 왜 민주화가 그리고 개혁이 우리의 기대와 다른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성찰과 진지하고 끈질긴 토론이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초해 거칠게 현행 선거법 개정의 방향을 말해자면, 그것은 
현행과 같은 "선거법에 기재된 운동만 허용하는 열거주의(positive list)"에서 "불법으로 기재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허용하는 포괄주의(negative list)"로의 변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2004년 오세훈 선거법의 내용을 사실상 결정한 정개협 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박세일(위원장), 박태범(대한변협), 백승헌(민변), 이성춘(한국일보 논설위원), 최규철(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장훈(중앙대), 손봉숙(한국여성정치연구소), 김민전(경희대), 신철영(경실련), 김기식(참여연대) 김효열(중선관위)

 

2010년 2월 9일 화요일

[짧은글] 님 조선일보 역쉬

<from tistory blog>

트윗을 하며 한 번씩 흥분할 때가 있다. 사실 이제 익숙해져, 그리고 나이들어 왠만한 것에는 잘 자극받지 않고,
그럴려구 노력도 하는데, 한
번씩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요즘 내게 그런 테마는 무엇보다 "유권자 자격론"이다 (깨어있는 시민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에 대해선 꼭 길고 정확한 글이 필요하기에 일단 패스.


지금 언급할 주제 역시 그러하다. 조선일보사와 관련된 누군가의 신해철 비판 멘트에 대한 누군가의 "님 조선일보? 역쉬"라는 멘트를 발견했고 순간 또 흥분했다.

그리고 나의 첫 트윗은 "이런 반응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나? 무엇이 이들을 극단적인 포지션으로 내보나? 아마 민주화 이후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나쁜일" 이었다. 날 울컥하게 만드는 것은 그냥 그들의 조선일보에 대한 정형화된 태도가 아니다.

나도 조선일보를 어떤 측면에선 동의하지 못하고, 어떤 측면에서 혐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측면에서 나는 동의하지 못하나?

나는 그들의 보수기득이익 혹은 질서 편향의 관점을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은 너무나 그쪽 편향의 관점과 이익만 철저히 관철되는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에 대한 교정이 필요한 시점에서 어떠한 그런 방향의 시도마저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부분을 대표함을 넘어서, 그들이 어쩌면 봉사한다고 믿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반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문제 삼는 핵심은 그들의 이념적 보수성, 사회 상층 일부 이익에 대한 편향성에 있지 않는다. 이익이 다원화된 현대 산업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어떤 정치세력 혹은 이를 어떤 식으로던 반영할 수 밖에 없는 미디어 역시 부분의 대표라는 본원적 한계를 피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나 공익(국익) 혹은 루쏘식의 전체이익의 대변을 자임하지만, 언제나 부분의 대표일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전체이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더라도 아주 소수의 사례에 국한 될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비판자들이 흔히 부르듯 찌라시라는데 있다. 찌라시란 무엇인가? 정론지가 아니다는 것이다. 정론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없다. 그리고 정론지와 아닌 것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 같은 것이 있을리도 없다. 다만, 우리는 현실에 존재하는 여러 신문들을 보고, 어떤 것은 정론지다 어떤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념, 이익으로 정론지 여부를 판가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중요한 잣대는 사실,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어떤 태도이다. 자신들이 표방하고 대표하는 이념과 이익을 위해 사실을 기꺼이 과장, 왜곡, 편의적 취사선택을 자행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면 그것은 정론지가 아니다. 반면에, 사실 그 자체에 풍성한 기술과 분석에 자신들의 특정의 이익과 이념이 녹아들어 있을때, 그러나 그것이 사실을 훼손과 왜곡을 최소화 할 때, 끈임없이 그러기 위한 자정적 노력을 견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정론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뉴욕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 못지 않게, 파이낸셜 타임즈와 이코노미스트를 좋아하고 또 높이 평가한다. 그들의 풍부하고 정확한 사실기술과 분석, 그리고 그들의 이념적 렌즈를 통해 걸러진 해석은 일차적으로 나의 지식 증대를 위한 좋은 정보가 되고, 이차적으로 나의 관점의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그들의 해석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주는 사실의 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기준에서 한국의 언론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정론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분을 위해 어쩌면 그 상위에 있고 기본에 해당하는 저널리즘의 기본 준칙을 어기는 데 서스럼이 없다. 나아가 그런 행위에 대해 일말의 부끄러움을 찾아 보기도 어렵다. 

문제는 그들의 그런 행위가 공동체를 상대에 대한 불신과 증오로 가득찬 분열의 공간으로 만듦으로서 부분의 이익마저 대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상대적으로 약자의 대표를 자임하는 세력에게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왜냐면 기득이익은 기득이익 이기 때문에, 언론의 도움 없어도 그만이고, 사회가 극단적으로 분열되더라도 자신의 개인의 이익을 적어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격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쪽의 경우 문제는 심각하다. 가난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언론이나 정치세력에게서 좋은 그리고 공신력있는 대변자를 만나지 못할때, 그들이 기댈 곳은 자신의 맨주먹 뿐이고, 그 삶은 부자들의 그것과 동일할 수 없는 적나라한 투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특정 언론의 정론/찌라시 여부는 사실 나를 발끈하게 한 핵심 요인은 아니다.

그보다는 제목의 멘트가 압축하듯, 어떤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무작위로 단지 조선일보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야만이다. 어떻게 한 개인의 행위를 그 행위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속한 (그것도 어쩌면 불가피하고 복합적인 이유로 )종교/인종/거주지/직장만으로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나? 그런 행위와 발언을 어떻게 소위 상식이 승리하는 사회를 운운하는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 있나하는 것이다.

일전에도 썼듯이, 우리가 민주화 이후 잃은 가장 큰 것은 단순히 정권이 아니다. 우리가 잃어 버린 가장 큰 것은, 한 때 가장 건강하고 비판적인 한 집단이다. 그들은 그들을 참여하게 만든 한 정치인과 동기화를 진행시키는 와중에, 어느 순간 그들이 싸우는 적과 가장 닮은 어떤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잃은 것이 민주화 이후 가장 큰 상실이기에, 그들을 되찾는 다시 그들에게 건강한 관심과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으로 되돌려 놓은 것, 그런 리더의 출현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2010년 2월 8일 월요일

[짧은글] 사소함의 정치에 대하여

-from tistory blog-

The politics of smallness. 
오바마가 [담대한 희망]에서 그가 '워싱턴 정치'라 부르는 것의 한 특징으로 사용한 단어이다. '사소함의 정치'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딸과 손녀의 해외순방 전용기 논란을 지켜보며 난 이 단어를 떠올렸다. 그렇다 나는 그 사건이 사소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대통령 전용기 운영과 해외순방 등과 관련한 일련의 룰이 있을 것이고, 이번 일이 그것을 위반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내가 수긍하지 않는 것은 이것을 마치 MB정부의 도덕성을 집약하는 징표인양 호들갑 떠는 것이다.

특히나 언론이나 시민단체 혹은 시민들이 기사 이를 비판하는 것에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주요 정당 혹은 주요 정치인이 비중있게 다루는 것에 반대하며 비판적이다. 왜냐면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가족들에 대해 국가기구의 공식-비공식적 지원과 보조는 대통령제 하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또 어디까지가 공식인지 비공식인지 엄밀한 기준을 설정하고 적용하기 어렵다. 노무현 정부시절, 국정원이 대통령 자녀의 미국 주택 마련 과정에 주도적으로 나섰던 것으로 안다. 나는 그것이 적당한 절차와 규정에 따른 것인지 잘 알지 못하며 사실 관심도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자녀의 해외 거주 대책이 완전히 개인 노건호의 일이 될수는 없으며, 어떤 식으로던 국가기관의 협조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안다. 

이런 사소함의 정치가 문제가 되는 다른 이유는 그들의 목적(MB정부  타격)에도 큰 효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잠재적 규정위반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보통사람의 일반적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크게 다루면 다룰수록 그들의 '쪼잔함'만 드러내는 문제라 생각한다.


이런 이슈/문제를 우리는 가십이라 한다. 따라서, 가십에 대한 대응책은 위트 있는 점잖은 충고면 족하다. 가십은 가십일 뿐 오바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