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8일 목요일

[읽고 생각하다] 한국 진보의 빠리 판타지

경향신문 목수정의 [파리통신] "사르코지 너 미쳤니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잖아?를 읽고 생각하다.

이 칼럼은 며칠간이나 내 머리속을 어지렵혔다. 특별히 칼럼 자체에 대한 반감은 없다. 프랑스에 머물며 현재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일을, 프랑스인이 아닌 관찰자의 시각으로 전해주는 이 같은 보도는 한국언론에서 찾아 보기 힘들며 더욱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찜짐한 것은 이 글에서 한국 사회를 떠도는 하나의 판타지를 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인 만큼 다른 국가와 사회에 대해 맹목에 가까운 판타지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보수파는 보수파대로, 진보파는 진보파대로 자신들만의 율도국을 설정하고 끊임없이 이에 다가갈 것을 종용해댄다(이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하도록 하자).

목수정의 글은 바로 한국 진보파가 갖는 하나의 판타지와 관련돼 있다. 한국 진보파가 공통적으로 꼽는 율도국은 아마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일 것이다. 특히 그들의 복지정책, 교육정책, 노동, 환경, 보육 등 모든 것이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 진보파들이 프랑스에 미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총)파업과 관련해서다. 아마도 그 시작은 홍세화씨의 빠리의 택시운전사 이후가 아닐까? 그들의 판타지는 강렬하다. 기차도, 버스도, 비행기도 세우고, 쓰레기통은 쓰레기로 넘쳐나고, 관공서 조차 운영하지 않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 나라, 폭력진압은 커녕 경찰들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나라, 어린 학생들까지 파업대열에 동참하고 어른들은 옆에서 이를 격려하는 나라. 파업에 대한 부정적 보도는 커녕 언론마저 파업에 동참해 신문자체가 나오지 않는 나라. 무용담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들은 이런 모습을 상상하며, 몸서리를 치며 흥분한다. 그 생각만으로도 쿨하고 짜릿하다.

이런 판타지에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사회에서 기본적 자유권의 결핍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집회, 시위, 결사 등의 기본권은 선진민주국가들과 달리 무조건 보장되는 헌법적 권리가 아니라, 여러가지 하위법령(집시법, 노동관계법) 혹은 공권력의 재량적 판단으로 얼마든지 제한 가능한 하위의 가치로 치부돼 왔다. 여기에 보수파와 거대사익의 의지와 이해가 압도적으로 관철되는 '시민사회' 의 담론 역시 파업 등의 기본권 행사를 심리적으로 곡하기 일쑤였다. 하기에 시민적 권리에 관한 선언이 최초로 천명된 나라답게, 그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는 프랑스가 한국 시민들 특히 진보파에 부러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까지이다. 한 사회가 집회, 시위, 결사 등 민적 권리의 행사가 헌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공공정책 결정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다른 수준의 문제이며 다른 판단을 필요로 한다. 이 차이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유독 프랑스만 중요한 사회경제적 입법을 처리하기 위해선 적나라한 공권력 대 시민의 물리력 충돌을 매번 거듭하는 것일까? 왜 유럽의 다른 선진국가들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이익집단, 정당, 의회, 정부기관등의 의견교환과 협상을 통해 가능한 일들을 꼭 저렇게 실제 힘을 재보야만 가능한 것일까?  또 저와 같은 항상적 물리력 동원을 통해서만 주요 정책이 결정되거나 막아지는 사회가 진정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은 독일, 영국 등의 나라는 프랑스 처럼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며, 따라서 더 후진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작업장 수준에서든, 국민경제 수준에서든 시민, 노동자의 파업권은 일상적으로 실제 본때를 보여줌으로써가 아니라, 그 잠재적 사용에 대한 위협을 통해 행사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효율적이라 믿는다. 원래 권력은 그것이 온전히 드러날 때가 아니라, 감춰져 있을 때 그래서 그 힘의 크기를 상대가 가늠키 어려울 때 극대화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파업권의 잠재적 사용에 대한 위협력을 극대화하고(조직률 배가 등), 이를 저해하는 법적, 사회적 구속을 제거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프랑스 경험은 한국 노동이 배워야 할 점과 배우지 말아야 할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것이 프랑스 판타지로 압축되는 낭만적 이해에 불편해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나도 물어보자. 세상에, 연금법 문제로 어린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는게 정상이니? 애들이 공권력과 거리에서 위험첨만하게 대치하는게 마냥 쿨하기만 한거니? 니들 정말 어떻게 된거 아니니?

2010년 10월 27일 수요일

[읽고 쓰다] 피아식별띠를 배포하는 정치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의 칼럼 비판하지 말라는 그 목소리들 을 읽고 생각하다.

그의 칼럼은 조금 뜨거워지나 싶다가 이내 사라져버린 '경향-민노당간의 '3대세습 논쟁'의 후일담의 성격을 띈다. 처음부터 그 논쟁은 논쟁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왜냐면 논쟁의 한 당사자가 논쟁 자체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러는 것 역시 이해할만 한 것인데, 왜냐면 누구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싸움을 이어나가진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것이 논쟁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대근 위원의 집요한 문제의식과 여기에 대한 민노당 일각(특히 김창현 울산시당 위원장)의 정치적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10년 10월 23일 토요일

[생각] 곤혹스런 한국신문 읽기

도대체 인터넷을 통해서는 신문을 볼 수가 없다.

포털에 내걸린 뉴스들은, 크던 작던, 진보던 보수던, 대형언론사이든 듣도보도 못한 신생인터넷매체이던 대부분 자극적 단신, 낚시성 기사들을 쏟아낸다. 각 신문사 홈페이지를 직접방문해도 다르지 않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뭔가 클릭을 유도할만한 기사들이 화면의 중앙을 차지한다. 그마저도 광고들로 뒤범벅이돼 시선을 분산시키기 일쑤다. 뉴스를 발굴, 정해진 포맷으로 생산하기만 하면 언론인 것은 아니다. 언론의 중요한 역할은, 그래서 좋은 언론과 나쁜 언론을 가르는 기준은, 결국 수백만가지의 뉴스거리들 가운데 그 중요성과 우선순위를 정하고, 독자들에게 제안하는데 있다. 그리고 지금 한국 언론들은 스스로 이런 역할을 방기하거나, 아니면 그따위꺼 관심없다고 말하고 있다.

클릭/페이지뷰에 연동된 광고 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말 하지 말아라. 포기하고 타협할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한국의 언론사, 또 그 종사자들은 스스로를 일반 소비재 상품 판매상으로 자임하는 것이다.

아마, 한국사회가 최근들어 급격히 나빠지는 것, 온갖 인터넷 게시판(흔히 공론장이라 불리는) 들이 욕설, 증오, 비아냥, 거짓선동만이 판치는 곳이 되버린 까닭은 (최근 등장한 SNS도 크게 다르지 않음) 좋은 언론이 없기 때문, 보다 정확하게 '돈'과 '당파적 이익'을 위해 스스로 그 역할을 기꺼이 포기했기 때문이다.

좋은 언론이, 좋은 기자들이 있었다면, 타블로 사태가 저지경까지 되었을까? 진실이 무엇이었든 말이다.

[생각] 민주-진보파의 슬로건 경쟁에 대하여

-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한 분이 페이스북에 올린 노트 를 보고 생각하다
- 그는 위 노트의 문제의식에 더해 '정상국가'를 새로운 슬로건으로 제안했다.

1) 먼저 거친 첫인상을 말하자면, 문제라고 지적한 바로 그 문제에 똑같이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인상을 받음. 즉 노트는 주되게 현재 진보/민주파에서 다가올 2012년 대회전을 두고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복지', '진보'를 화두로 한 거대담론 혹은 슬로건 경쟁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정상국가'라는 또 다른  '무언가'를 제안하고 있음.

2) '정상국가'라는 슬로건에 담긴 내용에 공감하는 바는 큼. 그러나 이에 대한 기술적, 선거공학적 기준에서 평가는 주요 관심사가 아님. 더 큰 문제는 뭐라 표현되던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민주/진보파의 최상수준에서의 담론경쟁과 그것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있음.

3) 이런 이해는 제가 보기에 진보/개혁/민주파(뭐라 부르던간에) 핵심 문제가 멋진 거대담론이나 매력적인 정치슬로건을 갖지 못한데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 두 번의 민주정부 실패(?)와 이명박 정부를 경험하며 대체로 우리(민주/진보적 성향의 정치행위자 내지 지지자)는 느슨하나마 이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만들었다고 생각함. 그것은 법과 질서의 측면에서 보다 상식적이고 공정한 사회, 경제적으로 더불어 살며 따듯한 사회, 정책우선순위에서 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실질적이고 편향적인 방향으로의 분명한 이동, 대북/외교관계에서 평화지향적 해법과 그러나 냉철한 현실주의적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에 입각한 균형있는 외교 등이 그것이라 할 수 있음.

4) 이러한 공감대를 어떻게 요약하고 부를 것이냐, 그래서 유권자들에게 팔 것인가 의미없다는 것이 아님. 아니 몹시 중요함. 그러나 이에 접근하는 방식과 시기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음. 그것은 본격적으로 선거국면에서 이뤄지고 이뤄져야할 작업. 여기에 상대당의 전략, 정치적 환경 등이 고려돼 만들어질 수 있을 것.

5) 요지는 지도 가치나 이념(그 표현으로 핵심슬로건)이 만들어지는 방향이 연역적이 아니라 귀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임. 지금처럼 어떤 구체적 정책내용(이를 수립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부문으로부터의 인풋)과 실천 없이, 머리속으로만 그리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결국 좋은 말들의 향연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음. 유권자들이 그렇게 받아들임. 즉 연역적 방법에 의한 담론 생산은 결코 생산적이도, 기대한 효과를 만들기도 어려울 것임. 


6) 그렇다면 귀납적 방법은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결국 대안정부의 그림을 유권자에 보여주는 것. 현재 한국사회가 만나는 주요 문제와 이슈를,  사회 다양한 조직, 이익, 그룹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이슈화하고, (예비) 입법화하는 작업이 필요함. 그리고 각 영역/부문별로 이를 담당할 소리더들(정치인들)을 함께 성장시키는 것이 필요함. 이를 통해 유권자들은 대안정부의 내용과 이를 이끌어갈 공동의 지도부를 알게 하는 것.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선택할 때 자신의 삶과 관련된 유의미한 숫자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함.

7)  민주당내 진보/개혁그룹의 최근 흐름에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음. 항상 그들은 당권파에 대해 이념적, 도덕적, 제도적으로 규탄만 해. 실제 자신들이 정부든 당이든 권력을 부여받았을 때, 사람들의 삶에 어떤 구체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적이 없음. 만약 사람들이 과거의 경험(열린우리당 정부)에 의존해 판단한다면, 아마 더욱 더 그들의 말에, 아무리 화려하던지, 지지와 신뢰 보내기 어려울 것.

8) 현재의 진보/ 복지담론의 홍수 또는 경쟁은 사실, 중앙정치에서 멀찍히 위치했던 그래서 좋은 자원과 지지를 전혀 갖지 못했던, 한 교육감의 현실에 착안한 문제제기(무상급식)에서 촉발된 것이라 봄. 그 일선 교육감이 그런 정책을 고민하고, 준비해 내놓을 때, 당시 민주파 집권세력예를 들어 당시 교육부 혹은 복지부는 무엇을 했나 반성적으로 돌아봐야 돼. 아마도 지금과 비슷하게 한편으론 거시적 이데올로기 경쟁에 몰두하며, 다른 한편으로 관료집단과 거대사익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책들을 만들어 내었을 것

9) 요컨대, 지금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슬로건을 얼마나 잘 만들어내느냐가 아님. 얼마나 좋던 아니든, 그것은 결국 실천이 없으면 아무 변화도 만들수 없고, 시민을 움직일 수 없음. 왜냐면 시민들은 이미 한번 (아니 여러번) 속았기 때문. 지금 필요한 것은 노동, 고용, 환경, 노인, 중소기업과 상인 등 아주 구체적인 정책영역에서,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레뷰하고, 이와 다른 수많은 정책과 의제를 발굴하고 가다듬는 것. 이를 담당할 리더들을 성장시켜 내는 것. 이를 귀납적 방식이라 부를 수 있을 것.

10) 이런 귀납적 방식이 잘 진행된다면, 선거시기 우리가 이를 무엇으로 요약하고 부를 것인가는 자연히 만들어질 것,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추천글과 트윗] 두 포퓰리즘 이야기


이코노미스트 (1) The fall of the meritocracy  와 이 기사에 소개된 기사 (2) The Rise of the 'Ordinary' Elite'  (3) 또 관련된 Maureen Doad의 Making Ignorance Chic 를 읽고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에 대해 생각해 본다.

(1) 중간선거를 목전에 둔 미국사회는 티파티, 사라 페일린으로 상징되는 우파 포풀리즘의 득세와 이에 대한 비판과 우려로 가득하다. 우파 포풀리즘의 요체이자 성공의 원인은 반-정부(정권과는 다른), 반-지성(엘리트)주의에 있다.

(2) 맥락은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포퓰리즘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미국과 달리 그것은 주로 왼쪽에서 온다. 그 역시 포퓰리즘이니만큼 반-지성(엘리트)주의 정조를 강하게 드러낸다. 진보파들의 말에서 "먹물"에 대한 적의 반감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공부할 것이 참 많다. 이를테면,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간 원초적 긴장에 대해,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포퓰리즘의 반-엘리트주의는 왜 문제가 되는지 등등.

[트윗모음] 24시간 구멍가게

어제(2010/10/21) 새벽 두 시경 나는 4개의 트윗을 연이어 날렸다.

1) 집앞에 상호도 없는 작은 슈퍼 아니 구멍가게가 있다. 주간에는 할머니가 야간에는 할아버지가 운영한다. 조금 전 우유 한통을 사구선 "언제 마치세요" 물었다. "우리는 24시간이야. 자주 오면서도 몰랐어" 하신다.

2) 그러구선 덫붙이신다. "우리가 안암/보문동에서 24시간 원조야, 십수년 전부터 했으니, 다 우리집 왔어" 를 여러차례 힘주어 강조한다. 자부심이 담겨있다. 돌아오며 왠시리 숙연해진다. 또 얼마간은 서글프다.

3) 꾸벅꾸벅 졸면서 밤새 가게를 지킨 노동의 대가는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반년 전 바로 맞은편에 24시간 편의점도 생겼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젊은 머리로 자기노동비용에, 건강 해치는 기회비용 고려할 때 야간에 문닫는게 나을 꺼라,

4) 저건 손해나는 장사일꺼라 생각하며 안쓰러움이 스쳐지나다, 그분들은, 우리 부모님처럼, 다른 셈법이 있구나 깨닫는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동을 쏟아 붓는 것, 그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러모로 부끄러운 밤이다.

생각할 것들...
- 최근 SSM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되는 경험
- 첫째, 사람 혹은 공동체가 없다는 것. 대기업의 하청계약자/임노동자/비정규화 시도
- 둘째, 대기업들의 시장/효율성 논리가 말하지 않는 것, 시장독점은 과연 시장적인가?
- 누가 반시장적인가?

2010년 10월 20일 수요일

[생각하기] 영남민주화 세력에 대하여

김정길 전-부산시장이 손학규 민주당 신임대표의 김영춘 전의원 최고위원 지명 철회을 요구하며 아래 성명을 발표했다.

손학규 대표에게 묻는다 - 민주당의 손학규인가, 손학규의 민주당인가?

읽고 몇 가지 단어들이 머리속을 맴돈다. 3당합당,  양김분열, 지역주의, 노무현, 전국정당화, 영남민주화.
한국의 민주화 이행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들이 소위 "영남민주화 세력"을 만들어 내었고, 이는 "전국정당화"라는 한국적 정치개혁'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 대체 '영남민주세력' 그들은 누구를 대표하나? 그 이념적 정향은 무엇인가?

[생각하다] 3대세습 논란에 대하여

시사평론가 유창선씨가 경향신문/이대근 비판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보다

<관련글>

(1) 경향의 민노당 비판은 진보판 색깔론
(2) 경향신문의 성찰을 주문하는 이유

그의 핵심논리는 사실 이정희 대표 "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해 한마디만 해보라구" 의 그것과 동일하다.

즉 북한의 3대세습에 대한 민노당의 입장 불표명은 거시적 목표를 위한 전략적 행위라는 것이며, 한 정당의 내부적 논의와 전략적 고려에 의한 정치적 결정에 대해 경향이 입장표명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속에는 공안검사(이정희) 혹은 조선일보(유창선)식 색깔론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향의 문제제기는 남북관계나 한국 진보정치 발전에 하등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까? 유창선씨의 표현을 빌어 사실관계 부터 확인하자.

첫째, 과연 3대세습에 대한 민노당의 입장이 논평을 거부한 것이며, 그 이유는 미국, 한국의 공식 외교채널이 그러하듯 외교적, 전략적 고려에 의한 것인가?

물론 이정희 대표의 글에 따르면 그렇다 한다. 유창선 씨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 글자 되지도 않는 민노당 대변인의 공식논평이 아니다. 그 정도의 공식논평을 만들어 내면서, 겪어야 했을 부 진통과 그 이유가 중요하다(한겨레 보도). 경향이 문제제기를 하는 부분은 여기에 있다. 그 내막은 민주노동당 부설 정책연구소인 새세상 연구소를 방문해서 관련글을 읽어 보면 쉽게 알수 있다. 연구소부소장과 책임연구위원이 관련해 쓴 두 개의 글(아래 노트 참조)은 북한의 대세습과 김정일 정권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이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유창선 씨는 민노당이 북한을 옹호한 적이 없다고 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며 그 글들을 읽어 보길 바란다. 그들은 북한 김정일 정권과 그 체제를 떠 받쳐온 여러 정치적, 사상적 체계를 분명히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유창선씨 글의 첫번째 질문은 그가 말하는 조선일보식 왜곡이다. 경향은 "다들 북한을 비판하는데 당신들은 왜 그러지 않냐?"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민노당의 북한정권과 그 체계에 대한 이해가, 그들이 민주사회의 공당의 주체가 된 이후에도, 예전의 민족통일운동 시절의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둘째. 무엇이 더 해악인가?

유창선씨와 이정희 대표 모두 제기하는 두 번째 논리는 일종의 실리론이다. 북한을 비판하는 것 또는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이 남북관계에 도움이 안 될 뿐더러, 한국의 진보정치의 발전에도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하는 비판에 북한 스스로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을 비판에 동참하는 것이,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다. 북한은 외교적/수사적 비판 내지 공방과 실리적 차원의 협상과 이익의 문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분리해 온 나라이다. 다른 국가의 수장에 대해 한편으론 역도라 원색적으로 비판하며, 동시에 쌀과 생필품 지원을 당당히 요구하는 나라라는 말이다.
진보정치 발전과 관련한 해악은 더욱 잘못 집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당정치를 공부하며, 왜 보수정치(한나라/민주)가 이리도 부패하고 무능한 나라에서 진보정당, 혹은 노동을 대표하는 정당이 적실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할까는 항상 중요한 질문이었다. 가장 중요하게 민주화이후 선거경쟁이 지역과 이를 대표하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고착되었다는 점을 들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소위 한국 진보진영의 주도세력이 가지는 북한에 대한 편향성에 있었다 본다. 낭만적, 냉전적 역사인식 - 북한을 여전히 반일 무장 독립세력의 후예에 의해 건설된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성 있고 자주적인 정권이며, 현재의 궁핍과 비정상성은 미 제국주의의 지속된 압박 때문이라는 - 에 기초한 그들의 편향된 북한정권에 대한 인식은 끊임 없이 분단상황에서 이를 이용하려는 극우정치세력의 좋은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되었다.

문제는 한 개인이 북한정권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그 정부/사상체계를 신봉할 사상의 자유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의 공당의 공식적 입장과 의견은 다른 수준의 문제이며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홉스, 로크, 루쏘의 이론적 자원과 프랑스 미국 혁명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 확립된 자유주의에 기반한다. 자유주의는 생명, 재산, 자유를 천부의 즉 인간이기에 누구나 갖는 불가침의 보편적 인권에 대한 보장과, 이를 침해하는 개인 또는 조직의 압제에 대한 저항권을 그 핵심으로 한다. 따라서 이정희 대표와 유창선 평론가의 글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사상의 자유, 똘레랑스 등의 개념은 바로 자유주의 사상의 직접적 산물이자, 하위 개념이다.

따라서 북한의 인민들에 이런 보편적 인권이 부정되고, 또 저항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만 있다면, 북한 정권에 대해 비판적 스탠스를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이를 지지하거나 신봉하는 세력은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열린사회의 적들이며 반민주주의자로 봐도 무방하다. 현대 민주사회/국가들 대부분이 이런 핵심가치를 부정하는 정치세력과 집단에 대해서는 결사의 자유 혹은 정당결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민노당에 북한정권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물어보는 것은, 그들의 지난시기 발언과 행동을 고려할 때, 또 그들이 헌법과 법률에 따를 의무가 부여된 공당이기에 당연하고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답/입장을 내놓는 것 역시 일종의 의무에 가깝다. 이는 한 개인에 대해 부여되는 사상의 자유와 또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관용하는 똘레랑스와 다른 수준의 문제이며, 사실 하등 관계가 없다.

* 추가: 조선일보식 글쓰기는 누가 하는가?

[자료소개] 이 놀라운 COMING OUT

논평은 생략하자~
1) 정일용(연합뉴스)  자기 잣대로 북을 재단하지 마라

2) 박경순 (민노당 공식 새세상 연구소 부소장) 북한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 분석과 전망

3) 장창준  (민노당 새세상연구소 책임위원)  불편하지만 인정해야할 북한의 내정

4) 이채연(전남대 교수/새세상연구소 이사) 진보라고 해서 다 같은 진보는 아니다

[맘에드는구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김별아

한겨레 [세상읽기] 김별아의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를 읽다.

삶이 또는 삶의 자세가 어때야 한다며, 잘 난천 온갖 충고를 쏟아내는 글들에 대해 전혀 취미를 갖지 않지만, 이 글의 담담함과 겸손함에 끌렸다.몇몇 구절을 옮겨 본다.

~ 그때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죽지 않겠다! 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위에서 뻗어 내민 손을 잡는 순간 죽음의 공포로 무겁게 늘어졌던 내 몸은 삶을 향해 솟구쳤다. 그랬다. 삶은 본능이었다. 치사하고 더럽고 구차하지만, 갸륵하고 애틋하고 미쁜 욕망 혹은 의지.

~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밧줄을 움켜잡고 산다. ~그럼에도 때로는 그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헐떡거리며 묻는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그 자신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심리를 묘파한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인간이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게 던질 만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삶으로부터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기에 행동을 통해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묻기보다는 대답해야 한다.

~시험공부 대신 산행을 선택한 아이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게 더 어려운지 산을 타는 게 더 어려운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때 미망을 깨우는 포효처럼 내 귓가에 들려온 중1 녀석의 우문현답.


“그야 당연히 산을 타는 게 더 어렵죠! 공부는 하는 척할 수도 있지만 산은 타는 척할 수 없잖아요?”

할(喝)! 열세 살짜리의 말이 그토록 어렵고 무겁던 질문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산은 타는 척할 수 없고 삶은 사는 척할 수 없다.

2010년 10월 19일 화요일

[추천글] 경향 사설 - 북한3대세급과 진보정치의 과제

언론의 사설이란 어떻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한국 신문에서 드문 수작. 무엇보다 반대 의견에 대한 딱지 붙이기(labeling) 없이 완성한데 대해서 평가한다.

[사설]북한 3대 세습과 진보정치의 과제

2010년 10월 18일 월요일

[짦은글] 나는 왜 정동영을 신뢰하지 못하는가?

# 정동영 최고위원의 "나는 왜 한미FTA 재협상을 요구하는가?"를 읽고 쓰다

전당대회 이후 FTA 재협상 이슈를 공세적으로 제기하며 손학규 신임대표와 경쟁에 나선 정동영 최고위원이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먼저 주요 정치인이 중심 현안과 이슈에 대해, 글로써 발언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좋은 일이며,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글은 역설적으로 내가 그를 지지하지 못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짧은생각] Shame on, U.


어제 트위터에서 무척이나 맘에 드는 글을 발견했다.


출근하는 길에 우연히 옆 차선 봉고트럭 젊은 운전사가 울면서 운전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손등으로 눈물을 연신 훔치는 모습을... 저도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누가 저 젊음을 적시는지... 가을입니다. 부디 슬픔도 아픔도 없는 계절이기를....10 Oct by @questfire

이 트윗 저자(?) 김명인은 시인이자 교수이다. 아주 오래전 '한국민주주의의 허약한 사회적 기반'을 주제로 한 [아세아연구] 특집에 그가 쓴 총론을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가 아연지 주간이었었나? (사실 두 기억 모두 확실친 않다).

당시도 다른 글들이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논리적, 분석적이었던데 반해, 그는 시인답게 해당문제를 정서적으로 접근했고, 내게 울림을 준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전 그의 이름을 트위터에서 발견하고 바로 팔로했는데, 아니다를까 이런 트윗이 올라왔다. 수많은 정치적 악다구니와, 사람들의 삶이 제거된 예쁜 말들의 향연 가운데 드물게 만나는 보물이다.

다음은 나의 트윗이다. 나 역시 정서적 글쓰기에 강한것 같다. 물론 굉장히 주관적인 판단의 결과지만 말이다.

뉴스에서 크레인 사고로 기사와 외벽작업을 하던 인부 2명이 사망했다. 그 인부의 나이는 나와 같은 서른다섯이었다. 동갑내기 인부의 불행한 죽음에, 뭐라 말하기 힘든 슬픔과 또 미안함이 몰아닥쳤다. 슬픔은 그렇다치고 난 왜 이리 미안한걸까?6 Oct 6 via TwitBird BY @sj76park

아참, 나는 분석적이고 논리적 글쓰기에도 강하다. 푸하하. 이것은 절대 내 자랑이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내 머리로 구성된 사실이다.

그런데 왜 논문은 못쓰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머리도 재주도 크게 관련 없기 때문이리라. 누구가 소설가 황석영에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작품을 쓰실 수 있는지를 물었다. 작가는 "자기가 쓰는게 아니라 엉덩이가 쓰는 것"이라고 답했다. 

결국 나의 망할 엉덩이가 문제다. 요즘 헬쓰장을 꾸준히 다녀서 외관상으론 꽤나 괜찮아져도 말이다. 어쩌면 엉덩이도 문제가 아닐런지 모른다.

봉고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젋은 트럭기사, 외벽작업 도중 사망한 동갑내기 인부의 슬픔과 비극을 지나치면서도 절박해하지 않는 나의 마음가짐이 문제다.

Shame on you! 

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읽고 쓰다] 야권통합, 비정상으로의 도덕적 겁박

* 아래내용은 30분 정도 걸쳐 쓴 거친 드래프트이며, 추후 완전한 글로 옮겨볼 예정입니다. 인용이나, 가져가기는 금합니다. 다만 의견은 환영합니다.

<참고자료>
기사 1  한겨레 칼럼  김삼웅 [야권통합 지금부터 시작하라]
기사 2  오마이뉴스 장윤선 박근혜 뛰어넘을 최후의 1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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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한국정치 대회전을 앞두고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내용은 대체로 반MB 를 위한 야당 단일화를 핵심으로 한다.

1. 아래 두 기사의 논리구조를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음.

(1) 문제 -  MB정부는 악이며, 뭔가 "큰일" 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악의 연장은 불가피하다.
(2) 해법/우월전략 -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이에 맞서는 제 세력이 하나로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3) 근거 - 시민들은 단일 야당에 표 던질 의사가 높다는 여론조사
(4) 주장 - 야당은 대통합 위한 협상에 나서라/  시민사회의 자발적(?) 야권 통합 요구에 응하라

2. 문제

(1) MB/한나라당 정부 선출된 권력이며, 현재 정당지지도 혹은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 야당들에 현저히 앞서 있음.

현대민주주의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선거에 나타난 시민의 지지가 권력 창출의 유일한 정당성의 기준. 현임(incumbent) 정부에 대한 유권자의 부정적 편향성에 비춰볼 때, 현 정부의 지지도 결코 낮지 않음. 물론 통계조사의 문제 제기, 그래도 지난 보선에서 보듯 아주 크게 틀리지 않음.

정기적 선거이든/ 선거간 진행된 간헐적 여론조사이든 시민의 평가는 상대평가 (절대평가가 아님). 따라서 야당들이 이해할 수 없고 하려고도 들지 않는 현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나쁘지 않은 평가는 여당이 잘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잘하지 못해도 이를 대체하게 될 야당들에 대한 신임이 높지 않아서 일수 있음. 어떤 것으로 해석하든 결과는 다르지 않음.

어쨋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DJ, 노무현 정부와 다를 바 없이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는 정부라 하더라도, 그들의 집권 자체가 규범적, 도덕적 수준에서 혹은 민주주의에 배치되어 절대 극복되고, 타도되어야 할 '악'으로 규정할 수도 없고, 할 근거도 없다는 것. 요컨대 전제 혹은 문제설정 자체가 반- 민주주의적 가치와 관념에 기초해 있는 것.

(2) 야권단일화라는 우월전략의 문제

가장 최근(10월 첫째주) 지지율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

한나라당 39.5%  vs. 야당합산 39.0 (민주당 28.8%  민노당 4.5% 국민참여당이 4.0% 진보신당 1.7% )  *자료 폴리뉴스

(가) 중요한 것은  4개당의 지지율이 한나라당에 미치지 못함. 산술적으로 볼 때, 무조건 합친다고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지난번 경기도 지사 선거 예. 혹은 이후 보궐선거. 야권 단일화가 승리의 절대조건 아님.

물론, 승리확률을 높일 수는 있을 것. 그들 역시 필요조건으로 생각하는 듯 함.

(나) 여기에 중요한 문제,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있음. 4당연합은 coalition of losers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
우리가 채택하는 선거제도/ 특히 표를 세는 방식은 단순다수제(일명 FPTP- first past the post), 다른 대안적 vote-counting 체제와 비교해 장단점이 있음. 그러나 선거제도 연구에서 fptp가 일방적으로 열등한 제도라는 합의 없음.

이럴 때, 과연 한 정치체제 내 정당들이 현 제도에서 혼자 힘으로 가장 높은 지지를 얻는 그룹을 순전히 이기기 위해, 후보단일화의 방식으로 경쟁에 나서, 현재 1위 정당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단일지지도를 갖는 정당/후보를 이기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얼마나 민주적인 것이냐의 문제. 그러한 일종의 왜곡이 과연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더 잘 대변했다 말할 수 있나? 여기서 루져들의 연합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

가장 대표성이 높고 왜곡이 적다고 알려지는 선호합산(호주식)의 경우로 만약 한다면,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나? 예컨대 진보정당 지지자들 가운데, 민주당이 되는 것이 여러가지 이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보다 더 나쁘다고 판단할 수 있고, 민주당 지지자들 역시 오히려 이념적으로 급진적이고 집권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검증되지 않은 후보/정당의 승리를 한나라당 승리보다 더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음. 요지는 '완전한 합당'이 아닌 선거승리 용 단일화는 현행 제도하 선거에서 대표성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지 않아. 한나라당이 지지에서 짱먹으면 한나라당이 집권하는게 맞아.

(다) 책임성의 문제

루져들의 연합은 이후에 더 큰 문제 야기함. 대체 승리/집권 이후의 결과에 대해 어느 정당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예를들어 유시민이 당선되었다면, 민주당은 이후 벌어질 유시민의 경기도에 책임이 없나? 없다면 어떻게 또 왜 선거시기에 지지를 호소했나? 있다면, 어떻게 민주당은 자당 소속도 아닌 유시민에게 책임물을 수단과 힘을 가질 수 있나? 불가능에 가까움.


이상의 논의는 제 야당이 느슨한 선거/정책연합 한다는 가정에서 비판. 결론은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

그러나 야당통합/ 단일정당 건설은 이런 비판에서는 피해 갈 수 있음. 그러나 역시 문제가 있음.

아래 민주당을 제외한 진보정당중심 통합론자들의 야권단일정당론에 대한 비판에서 나오듯이,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가 양당제로의 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진보정당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결국 사회 다양한 갈등/균열의 대표를 통한 조직화라는 정당의 기능과 관련지어 볼 때, 이는 대표체계의 협애화 사실상 보수화이며, 나빠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음. 따라서 이런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은 결국 진보정당 구성원(의원들과 당원 지지자)에 맡겨져야 함. 외부자가 단순히 타도 이명박 위해 겁박할 문제가 아님. 또 그런식의 겁박에 의한 선택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이탈을 가져와 의도한 결과를 내지도 못함.

두번째 문제는 장윤선 기자 글에서 보듯, 현실적으로 민주-진보정당들의 통합 전망은 극히 낮은. 따라서, 이 글에서 지난 지방선거와 같은 느슨한 정책연대 혹은 후보단일화 전략을 중심에 두고 비판하는 것임.


(3) 여론조사는 일종의 장난 같은 것. 닥치지 않은 선택지를 미리 주고, 답을 유도하는 것. 이런 여론조사보다 차라리 그렇게 단일화 한 지난 선거들의 결과를 가지고 말해야 함. 사실상 단일화에 성공한 유시민이 또 아주적은 진보정당만 이탈한 한명숙이 70% 표를 얻었나? 그런일은 없을 것. 이는 wishful thinking

(4) 결국 앞의 논의에 비춰 볼때, 문제설정도 틀렸고, 근거도 빈약하며, 전략적으로도 좋은 것이 아냐. 그럼에도 백만민란인지 시민정치통합기구인지 뭔지를 내세워 시민사회(사실상 시민사회도 아님, 정치화된 시민단체 소속 인사들 혹은 이를 마케팅하는 사람들)가 기존 정당을 압박하는 것 비상식적이며, 시민의 지지를 얻지도 않은 개인들이 시민의 지지와 표를 얻은 이들에게 그렇게 강제할 어떤 권한도 정당성도 없음. 자신들이 정치를 하고 싶으면, 맞는 정당에 들어가,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함. 자신들이 그렇게 우습게 알고, 도덕적으로 우월감을 가시하는,한나라당 의원들은 오히려 시민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얌.

무엇보다 이런 정당성 없고 부정확한 담론은 기실 특정인 특정정당의 정치이익에 복무한다는 문제. 작은 지분으로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일종의 알박기라 말할 수 있을 것.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이 바로 그것. 그들은 불과 얼마전에 기존 민주당 세력들이 민주당과의 뭔지모를 차별성을 강조하면 만든 정당. 신당을 만들었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얼마나 차이가 있냐는 선거에서 평가받을 것.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창당이유와 평가를 스스로 부정해. 신당창당 이후 하는 것이라곤 단일화 하자는 것.

즉 그들은 민주당 내에서의 불리한 지형, 경선을 두려워 해. 그래서 당 대 당으로 협상하자는 것. 왜 이들의 이런 요구에 민주당이 굴복해야 하나? 다르면 선거에서 평가받을 것이고, 같으면 들어와야 돼.

내부평가는 거부하고, 정치공학을 통한 한방을 바라는 것.

(5) 결론

요컨대, 한국정치가 문제다는 인식의 확산. 유사 사회적 합의. 실제로는 한국정치보다 한국정치 담론이 더 나쁘고. 현실 정치인들 보다, 나쁜 정치담론을 팔아 먹고사는 정치에 기생하는 그룹들이 더 나빠. 이들이 한국정치가 현실의 문제를 둘러싸고 경쟁을 벌이지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중요하지 않은 문제, 예컨대 제도개혁을 둘러싼 이분법적 투쟁을 압도하게 만들음.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열린우리당. 이는 사실상 그들이 꿈꿨던 정당. 그러나 어떻게 됐나?

문제는 한나라당 아냐. 또 문제는 야당들이 단일화/ 뭉치지 못해서가 아님. 문제는 이런 식의 공학적, 반 민주주의적, 반정당적, 반상식적, 상도의에도 어긋나는 통빡만 굴리고 있는 그 자체가 문제. 소위 정치평론가와 칼럼니스트들이 이런데 복무하고 있다는 게 문제.

[리뷰] 이택광의 왜? - ‘북한 3대 세습’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이택광의 왜?]‘북한 3대 세습’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읽고 쓰다.

1) 최근 쏟아져나온 경향-민노당간의 '3대세습 논쟁'을 가장 잘 요약했다.

이택광은 이를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제도 내의 공당으로서의 전망'  vs. '특이한 반응'으로 사태를 요약했다.

# 다만 여기서 필자가 왜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썼는지 또 적절한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단순히 한국 운동권 정향의 진보파의 입을 빌어 말하기 위한 의도라면 문제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이런 표현은 부적당하고 불필요하다. 왜냐면 여기에는 뭔가 더 나은 민주주의가 존재가능하다는 뉘앙스와 함께,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폄훼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2) 그러나 이 칼럼을 가져온 이유는 전적으로 아래 문장때문이며, 이는 현재 열린우리당과 이를 추동한 사람들에 대한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내가 차용할 좋은 표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일부 진보세력이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한 비판을 망설이는 까닭은 ‘조국통일’을 진보의 정언명령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통일은 이들에게 ‘단일민족 국가건설’이라는 실패한 근대적 기획의 완성을 의미한다. "

=> 이는 내 주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옮길수 있을 것이다.

 사실 노무현 후보와 천신정으로 대표되는 개혁파가 민주당 분당이라는 위험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신당추진을 밀어붙인 까닭은 '전국정당'을 진보개혁의 정언명령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전국정당'은 이들에게 양김분열과 3당합당 이후 지체되어온 '전국적 민주파 통합정당 건설'이라는 실패한 기획의 완성을 의미한다.

<소개>

(전략)

이 위원의 문제제기에서 추려 들어야 했던 것은 ‘민노당’이라는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제도 내에서 진보주의의 이념을 대변한다고 자임하고 있는 공당의 전망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 위원은 민노당에 이 진보의 전망과 북한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주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노당을 비롯한 일부 진보세력은 특이한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든 북한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부지불식간에 드러낸 것이다.

(중략)

사실 일부 진보세력이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한 비판을 망설이는 까닭은 ‘조국통일’을 진보의 정언명령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통일은 이들에게 ‘단일민족 국가건설’이라는 실패한 근대적 기획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통일을 이루고 진보를 완성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여전히 한반도의 북쪽에 있는 ‘현실사회주의 체제’에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은연 중에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권력세습을 문제시하지 않는 것도 이런 생각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사회주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국가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독재이고, 북한의 권력세습은 이 사회주의적 전략전술을 자기 식대로 적용한 제도인 것이다. 물론 민노당이나 이를 지지하는 일부 진보세력이 이런 전략전술을 신봉하는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국가권력을 진보세력이 장악해서 진보적 기획을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이들이 심각하게 북한의 권력세습을 비판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넓게 본다면, 북한의 선택도 국가권력을 사회주의 세력이 계속 장악하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후략)

2010년 10월 16일 토요일

[리뷰 of 리뷰]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 <한낮의 어둠> 아서 쾨슬러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한낮의 어둠> 을 읽고 쓰다.

1) 이 리뷰는 적어도 내게는 성공했다. 리뷰를 읽고 곧 바로 책을 주문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폭력적 수단의 동반여부 혹은 크기를 불문하고 그간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소외된 이들의 권력중심으로 진입을 혁명이라 거칠게 말할 수 있다면, 혁명이후 (after revolution) 는 최근 나의 관심이 가장 집중돼 있는 테마라 할 것이다. 그 테마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여러 측면에서 다뤄질 수 있다. 정치제도적 측면에서라면 미국 민주주의 이론의 대가 Robert Dahl의  "혁명이후 - 민주사회에서의 권위"를 추천한다. 그러나 혁명이후가 흥미로운 테마인 이유는 어떤 제도적 변화와 효과의 견지에 있지 않다. 그보다 이 테마가 중요하고 항상 대가들의 관심을 끌어 내는 것은, 혁명이란 이 과정에 참여(지켜보는 이들도 해당) 한 개인과 전 사회적으로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극단적으로 발휘케 하며, 그 속에서 인간(성)의 적나라함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의도와 꿈, 좌절, 복수와 재복수, 좌절과 변절 등등. 소비에트 공산국가 수립은 20세기 어쩌면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혁명이었고, 소비에트 혁명과 이에 참여한 인간드이 이 책의 소재이다.

2) 서평에 대해서 말해보자.
그 글의 시작은 담담하지만 파워풀하다. "세월이 흘렀다고 세상이 마냥 좋아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진술은 한국문학/도서계의 풍토와 작품의 재출시(?)의 의미를 관련짓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서평의 끝 역시 나무랄데 없다. 마지막 문단에서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혁명정신을 갉아먹었노라 쾨슬러는 말한다. 자고로 타락한 권력은 시대의 특수성만을 강조했고, 진정한 진보정신은 그 가운데도 동의해야할 보편성이 있다고 말해왔다."고 쓴다. 그리고 이는 현재 진행중인 북한의 3대세습과 민노당 사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서평이란 어떻게 쓰는가를 잘 보여주는 글이 아닐 수 없다. 별 다섯개다.

<출판사 책소개>

[읽고쓰다] 김정운의 폭탄주의 문화심리학을 읽고

한겨레 김정운의 폭탄주의 문화심리학 읽고 쓰다.


1) 다소 가벼운 감이 없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좋은 글. 그러고 보니 한겨례에 실린 칼럼들이 좋아졌다. 무슨 변화가 있었나? 예전에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들만 있었는데, 필진의 폭이 무척 넓어졌고, 그래서인지 읽을 것이 많다. 특징은 좋은 글들은 대체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쓴 것이라는 점이다. 제발 신문, 방송, 토론회 어디나 나와서, 자신들이 이미 내뱉은 말들과 그 기사들을 무한 반복해대는 좋은 대학 교수들 칼럼은 안 실었으면. 전혀 깊지 않은 생각을 무한히 찍어내는 이들.

2) "왜 한국남성은 폭탄주에 열광하나? " 좋은 관찰이 만들어낸 좋은 질문이다. 폭탄주가 다른 사회에서 좀 처럼 찾기 힘든 현상이니 만큼, 그것은 한국사회의 문제 내지 모순을 압축하는 좋은 소재일 가능성이 높다.

3) "빨리 취하기 위해서다" 그럼 "왜 빨리 취하려하나?" "서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다"는 연쇄적인 간결한 문답 역시 좋다. 간결하지만 그것은 한국사회와 한국시민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 틀림없다. 동 대를 살아내는 주변의 동료나 동반자들과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해 뭔가 얘기 나누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 한다는 것, 또 그런 곤혹스런' 상황을 만나느니 차라리 오바스런 주사와 인사불성을  택한다는 것, 여기에 이 시대 한국인들의 고단한 외로움이 담겨 있는게 아닐까? 요즘 크게 사회 문제가 되는 높은 자살율은 어쩌면 고단한 외로움의 누적이 한계점을 넘어 폭발한 결과들이 아닐까?

4) 이런 생각들은 부부관계 또는 성매매 문제로 이어진다. 국에는 왜 모텔(러브호텔)이 많은가? 왜 룸살롱, @@방 등의 갖는 종류의 성매매업소들이 그리도 많은가? 이는 한국 성인들 다수의 결혼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고, 야기 하는 것을 두려워 하게 되고, 차라리 망가져서 상대를 상처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대체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들 역시 혼자서는 살수 없는 인간이기에, 이야기를 갈망하고, 그 욕구를 해소할 상대를 찾아 거리를 해매이게 된 것은 아닐가? 한국의 밤거리는 러브호텔, 직간접적 성매매 업소들로 가득찬다.  한국만큼 쉽게, 또 부담없는 가격으로 성매매할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이는 한국인의 도덕성 또는 성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성산업과 관련하 법령/처벌 수준의 문제 역시 아니다.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느냐 마느냐? 또 얼마나 실효적으로 단속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밤거리를 가득 채우는, 이야기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린, 그러나 본능에 따라 이를 찾아나선 고단하고 외로운 한국 남성들의 행렬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떠나서 말이다). 어쩌면 한 사회의 성매매의 수요공급 곡선에서 수요곡선은 남성들의 외로움이 정상적으로 관린되는 수준의 함수이며, 그 공급은 젊은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보수의 수준의 함수인지도 모른다. 여러 변수들이 물론 있을테지만 말이다.

5) 이 글을 까페에서 읽으며 난 이렇게 트윗했다.

기억속에 난 누군가에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언제부턴지 난 그럴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했고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런만큼 난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야기. 날 움직인 힘이었구나. 너 얘기하고 싶었구나

그렇다 "인간은 이야기하려고 산다.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내가 왜 이렇게 아득한 곳에 가라앉게 되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난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대가 누구이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서, 난 생각할 수 있었고, 그것은 대체로 나쁘지 않은 것이기에, 그 생각을 토대로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이야기 할 상대 혹은 기회가 줄어들었을 때, 또 어떤 이유에서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게 되었을 때, 난 그 만큼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난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게다. 그것도 무척이나 많이. 어쩌면 것이 내가 지금 내려와 앉아 있는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나가는 길일 것이다. 비슷한 장면을 한때 좋아했던 하루끼 소설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너무 오래전이다. 그러구 보니 난 소설도 읽지 않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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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도대체 왜 한국 남자들은 이토록 폭탄주에 열광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빨리 취하고 싶어서다. 그럼 왜 빨리 취하려고 하는 걸까? 서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다.

(중략)

 
폭탄주가 한두 바퀴 돌아가다 보면 꼭 오버하는 인간이 나타난다. ‘사랑해!’ ‘우리가 남이가!’ ‘마셔마셔’ 어쩌구 하며, 껴안거나 러브샷과 같은 과도한 스킨십을 일삼는다. 이 인간은 동석한 모든 이가 빠짐없이 폭탄주를 마시도록 강요한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취해 아까 한 이야기, 하고 또 한다. 맨정신으로 듣고 있자면 정말 환장한다. 폭탄주의 끝은 참 스산하다. 온갖 종류의 ‘위하여!’를 남발하고, 넥타이 머리에 묶고 탁자 위에서 춤추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모두 사라진다.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술자리의 모든 뒤끝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술값을 책임져야 하거나, 망가진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두렵기 때문이다. 서로 나눌 이야기가 전혀 없는데, 멀뚱멀뚱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그 황당한 상황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폭탄주를 마시는 것이다. 두 눈동자가 흐릿해지고,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마구 헷갈리는 상황을 만들어야만 마음이 편해진다. 왜 이렇게 술을 마셔야 하는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식은 아니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 우린 서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소주 한 병에 파전 한 접시를 앞에 놓고 밤새 이야기했던 날들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은 이야기하려고 산다.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고츠키 같은 러시아의 심리학자는 생각을 ‘내적 언어’(inner speech)라고 정의한다. ‘내가 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생각이라는 것이다. 혼자 중얼거리는 현상은 이 내적 언어가 은연중에 튀어나오는 것이다. 힘들면, 생각이 복잡하면, 외로우면 사람들은 중얼거린다. 이야기가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러기 아빠들은 죄다 혼자 중얼거린다. 내 친구 재림이도 매번 혼자 중얼거린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소연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심리상담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삶의 의미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은 유능한 상담자의 필수 덕목이다.





(후략)

[추천글과 생각] 신경숙의 베스트셀러와 '비평의 위기'

신경숙의 베스트셀러와 '비평의 위기'  를 읽고 생각하다.

1) 비단 문학계 뿐 아니라, 한국 학계 전반에 걸쳐서 요즘 찾기 어려운 말 그래도의 비평.

2) 개인적으론 이 글을 통해, 어린 시절 은희경, 신경숙 등 한국작가들의 소설을 열심히 읽어재꼈던 내가 왜 더이상 그들의 책에 흥미를 잃어 버렸고, 더 이상 찾지 않께 되었는지에 대해 한 설명을 제공해 줌.

3) 필자가 말하는 잘못된 비평(정실비평/주례사비평)의 홍수가 결국 그 비평의 대상을 타락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수 있게 해줌.

4) 공정한 비평의 부재, 공신력을 가진 평가 주체 내지 권위의 부재는 한국사회를 요약하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일 것.

[짧은글] 로이스터를 추억하며

어제 밤 트위터를 떠돈 어느 골수 롯데팬의 글 을 읽고 생각에 잠겼다.

난 사실 오랬동안 야구에서 멀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점은 고교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듯 하다. 최근 난 야구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롯데였다. 굳이 말하자면 지역연고가 그쪽이긴 하지만, 내가 롯데를 좋아해야할 필연성은 전혀 없다. 이는 거의 전적으로 롯데를 이끈 제리 로이스터 때문이었다.

뭐랄까? 그가 팀을 이끄는 리더십과 선수들에 대한 코치 스타일에서 내가 그동안 알던 롯데라는 팀의 변화를, 그리고 다른 구단들과의 차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리더십 또는 코치잉은 한국사회에서 지배적인 그래서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과 분명히 달랐다. 그 다름에서 나는 과장해서 말하자면, 어떤 체제 전복성을 보았고, 여기서 희열을 느꼈다.

경영/경제학자들 또는 정치경제학자들은 기업/경제체제의 지배모델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그 장단점에 대해 토의해왔다. 그 두 가지는 영미식의 주주 중심(stockholder) 모델과 대륙유럽식 이해관계자(stakeholder) 모델이 그것이다.

내가 한국 프로야구에 등장한 로이스터의 롯데에서 떠올린 것은 바로 이 두 모델간의 경쟁이었다. 주주 중심 모델은 주주들에 대한 배당을 최우선으로 하기에 단기 이윤에 핵심 가치를 둔다면, 관련한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공정한 이익분배를 중심에 두는 이해관계자 중심 모델은 장기적 투자와 성장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배당과 이윤을 야구단 성적으로, 투자와 공정분배를 팬들의 재미와 선수들은 고른 성장으로 바꾸었을 때, 이는 한국 상위 야구단 대 로이스터의 롯데와 거의 대응한다.

이런 점에서 로이스터의 롯데가 결국 좌초한 것은 예견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성적이라는 단기실적과, 성적이라는 이윤극대화를 요체로 하는 현대 프로스포츠에서, 또한 그것의 운영이 지역공동체나 팬이 아니라, 재벌대기업과 그 총수일가에 맡겨진 상황에서 로이스터식 이해관계자 모델은 애초부터 성공하기 어려우며,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롯데라는 한국 재벌들 가운데서 저질로 악명높은 구단은 로이스터를 내치는 그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결정을 했다. 오랜만에 야구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아마도 다시 떠날 것이다. 혹은 다른 팀을 향해 갈는지도.

Good-bye, Jerry
Good-bye, Lotte

[읽고 생각하다] 통찰의 힘

조효제의 독일에서 다시 생각하는 전태일 를 읽고 쓰다 - 통찰의 힘

1) 총평

나는 이런 글을 참 좋아한다. 그 이유는 그의 첫 문장에 있다. 


백 마디 이론이나 분석보다 잠깐의 인상, 짤막한 관찰이 더 깊이 기억될 때가 있다.

조효제 교수의 이번 칼럼은 특정한 이론이나 분석틀에 현실을 끼워 맞추지 않았다. 그 반대이다. 그것은 생활 속의 짧은 경험에서 추상해 낸다. 필자가 말한 잠깐의 인상 또는 짤막한 관찰이 항상 좋은 통찰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양자를 이어주는 것은 전적으로 글쓴이의 깊고 진든하게 생각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그 능력에 따라, 양자를 잘 결합시키냐가 결국 좋은 글과 어줍짷은 글을 나눌 것이다.

2) 현실묘사의 힘

그가 그려낸 있는 그대로의 관찰은 어떤 최신의 사회과학 이론과 또 이에서 나온 이론적 개념들의 도움 없이도 그 자체로 강력하다. 독자들은 그냥 그가 그려주는 한 독일 도시의 잡화점의 풍경을 따라서 상상하면 그만이다.

3) 보도블록

개인적으론 난 보도블록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보도블록 한 장에도 한 사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담길 수 있다 믿기 때문이다. 난 한국의 보도블록이 참 엉망이란 걸 자주 느껴왔다. 문제는 그것이 거의 매년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는 보도에도 말이다. 왜 수많은 예산을 들여, 그렇게 자주 보도블록을 교체하는데, 그 결과는 더 나쁜 보행환경으로 이어졌을까? 이 것이 내가 길을 다니며 던진 질문이다. 조효제 교수의 칼럼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그것은 한 사회에서 (육체)노동의 보상체계의 문제, 즉 어떻게 그 가치가 평가되는가와 크게 관련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보도블록은 지방행정가의 입장에선 아마도 예산소모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거나, 기껏해야 외적 환경개선의 흔한 소재일 뿐일 것이다. 이 작업은 아마도 여러차례 복잡한 발주-수주의 관계를 거쳐 아마도 아주 조그만 건설회사에 배당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산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직접 그 작업을 담당하는 업체의 몫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짤려나간 몫마저도 온전히 직접 현장에서 노동하는 이들에게 배분되는 것도 아닐것이다. 그들의 노동에 대한 보수는 그가 행하는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 노동-자본의 힘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최저임금에 상응해서 결정될 것이다. 쥐꼬리만 보상이 돌아오는 지루하고 고단한 노동작업에, 동료 시민이 매일 걸어다니는 길을 관리한다는 어떤 부가적 가치가 더해지긴 어렵다. 그저 할당된 양을 최대한 빨리 뒤업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전부다. 여기서 숙련과 장인정신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오히려 그 반대 일것이다. 엉망진창으로 깔아야, 더 빨리 다시 그 일을 담당하게 됨을 회사도 그 노동자도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도블럭이 어떠냐는 단순히 보도블럭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회의 노동의 정치적 위치, 사회적 가치, 경제적 보수의 문제인 것이다.




백 마디 이론이나 분석보다 잠깐의 인상, 짤막한 관찰이 더 깊이 기억될 때가 있다. 노동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독일에서 마주치는 노동자들에 대한 인상이 그렇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그것은 원칙일 뿐 실제 삶 속에서 그 원칙이 지켜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낀다. 그런데 일상의 차원에서 독일 사회의 평등성은 확실히 우리보다 앞서 있다.

동네 슈퍼마켓 계산대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 기름과 먼지로 범벅이 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가 함께 서 있는 광경을 흔히 본다. 그 사람의 앞뒤로 아주 고급스런 복장의 부인, 그리고 넥타이 정장 차림의 신사가 같이 줄을 서 있다. 이런 광경이 기본적으로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광경에서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복장의 사람들, 한눈에도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런 표정으로 서로 눈인사를 하기도 하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모습을 이색적으로 바라보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될 판국이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노동자는 계산을 끝낸 뒤 카운터 직원과 한참 동안이나 즐거운 ‘담소’를 주고받는다. 바로 뒤에 화려한 의상을 걸친 귀부인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중에 말이다. 그 노동자나, 카운터 직원이나, 뒤에 서 있는 부인이나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광경을 딱 집어 뭐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직업적·계급적 격차가 있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거리나 이질적 의식이 우리 사회보다는 확실히 적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슈퍼마켓에서의 내 관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후 3시 혹은 밤 9시쯤이 되면 카운터 직원들이 교체된다. 조금 전까지 계산을 하던 아주머니 직원이 어느새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장바구니를 들고 매장에서 물건을 고른다. 그런 뒤 계산대에 가서 여느 손님과 똑같이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쇼핑을 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별것 아니면서도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집 앞에서 보도블록을 깔고 있는 일꾼을 본 적이 있다. 네모나게 깎은 손바닥 반만한 작은 돌을 보행로 바닥 땅에다 망치로 박고 있었다. 그 넓은 보행로 전체에 그런 식으로 돌을 하나하나 토닥토닥 도토리 심듯이 보행로를 깔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작업에 걸리는 시간이나, 거기에 투입되는 정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 보였다. 일꾼은 돌멩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망치로 박으면서 노동 자체에 몰입하고 느긋하게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노동하는 한 인간이 몰입해서 일에 진정으로 빠져 있는 광경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며칠 후 동네 슈퍼마켓에서 그 일꾼이 작업복 차림으로 장을 보러 온 것을 보았다. 그 사람 역시 수많은 손님들 사이에서 전혀 구분되지 않고 똑같이 한 사람의 손님으로서 장을 보고 천천히 계산을 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꿈꿨던 사회가 이런 식으로 인간화된 사회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일의 성격에 따라 직업의 특징이 다르더라도 모든 인간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사회 말이다. 노동을 진정으로 즐기고 몰입할 줄 알며 누구로부터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공동체에 속한 노동자들의 세상, 이것은 계급의 문제나 노동시장의 문제 차원을 벗어나 우리 사회의 정신의 문제,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태일 열사는 사십년 전에 이 점을 이미 꿰뚫어 보았고,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자신을 오롯이 바쳤다. 그의 시선이 준열하면서도 또한 따뜻한 것은 아마 그의 이런 혜안, 열사의 이미지 뒤에 서려 있는 소박한 인간애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본다.

[생각정리] 문성근의 백만민란 프로젝트에 대해

배우 문성근의 백만민란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 트위터에서 몇 개의 흥미로운 트윗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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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y @actormoon 문성근
흥미로운 RT @actormoon 야권단일정당보다 선거제도개편추구가 옳다는주장이있슴다 노대통령이 개편에동의해주면 권력의반을 내놓겠다했는데도 거절당한사안이죠 MB쪽은 친이계 집권연장수단으로 이원집정부제개헌위해 선거제도개편을 당근으로 내밀고있죠.

(2) by @actormoon 문성근
흥미로운 RT @actormoon 야권단일정당보다 선거제도개편추구가 옳다는주장이있슴다 노대통령이 개편에동의해주면 권력의반을 내놓겠다했는데도 거절당한사안이죠 MB쪽은 친이계 집권연장수단으로 이원집정부제개헌위해 선거제도개편을 당근으로 내밀고있죠.

(3) by @leastory Kisuk Cho 조기숙
지금으로선 백만민란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민주당 새대표 하는 일 보니 떡잎이 노랗다 못해 썩었어요. 노대통령께 사과하고 다시 재뿌리는 행위, '김영춘이 제2의 노무현'이라니... RT @bigfriend2: @... http://dw.am/L9vs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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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민란]은 미국쇠고기 촛불시위와 노대통령 서거정국에게 동원되었던 시민사회 가운데 친노세력 중심의 "반MB연대" 의 POSITVE 버젼으로 이해될 수 있음.

동원의 명시적 표는 2012년 총선/대선 대비한 야3-4당의 연합/연대 촉구, 그러나 실제 목표는 유시민/국참당으로 대표되는 친노세력의 정치적 레버러지 극대화.

굉장히 문제가 많은 아이디어. 짧게 정리해 둘 필요성.

1. 야당통합 강제 위한 백만민란은 현대 선거/정당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배치되는 아이디어.

- 기본적으로 이른 지난 2010년 지방선거시 야권연대/단일화 논리와 동일
- 기존 정당들 (각기 창당 당시 목표와 가치가 있으며, 다른 정당과의 차이를 강조했던)에 대해 시민사회 혹은 비정치성/당파성을 띄는 제3의 심판관의 입장에서 그들의 연합/연대를 도덕적 명언인양 강제해.
- 그러나 그들의 이 같은 행위나 요구에 어떤 도덕적/정치적 권위 정당성 있나?
- 그들이 이럴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전제에 기초. 그것은 한나라당/MB 정부가 한국 민주주의에 있어 공존/관용불가능한 절대악이라는 것.
- 따라서, 과거 군사정부처럼, 한나라당 정부는 타도내지 섬멸의 대상, 이런 목표가 다른 정치적 목표와 이해에 우선.
- 그런가?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나라당/이명박 대통령은 엄현히 선거를 통해 그들이 행사하는 현재의 권력을 잠정적으로 위임받은 세력. 그리고 50%라는 현재 지지율에 통계적 거품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상당수의 국민들(아마도 야당들의 그것보다는 많을 것이라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의 지지 유지.
- 이들을 타도/섬멸의 대상으로 규정할수 있는 권위(체)나 이런 권위를 부여받은 집단은, 그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가 택하는 다원주의적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
- 대의민주주의의 요체에 해당하는 기본적 룰(공정한 선거의 개최)이나 핵심가치에서 현저히 벗어나거나 이를 훼손치 않는한,누구도 그들을 그렇게 규정할 수 없음.
- 그들은 지난 민주정부들과 하등 다를바 없이, 전체 시민 가운데 일정 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그 직무수행 방향과 능력에 대해 현저히 불신당하며, 미움을 받고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치세력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기간동안 여전히 주요정책결정의 이니셔티브를 갖는 정당(partisan)정부. 이는 정당에 대한 유권자 선호의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대 민주주의 경향에서 특별히 유별난 것 아님.
- 그들을 심판하고 규탄할 권위는 오로지 시민에 있으며, 그 방식은 결국 선거일 수 밖에 없음. 아마도 그 가능성은 운좋게도 시민들이 기존 정부에 대한 심판의 욕구가 이를 대체할 그룹에 대한 불신의 정도를 누를 때만 일어나는 일일 것.
- 따라서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 여전히 상대적으로 더 높은 지지를 유지하는 한 정당정부를 타도, 섬멸의 대상으로 규정할 권위는,시민사회 어느 개인 어느 집단에 논리적으로 부여될 수 없으며, 정확하게 이런 관념에 기초한 야당 연합 주장은 인민주권이란 민주주의 관념 그 자체에 오히려 도전하는 것.
- 만약 그렇지 않는다고 그들이 믿는다면, 그는 자신과 일부 시민(정치적 상대를 지지하는 시민)의 권력의 가치와 능력에 있어 평등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전하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