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7일 수요일

[읽고 쓰다] 피아식별띠를 배포하는 정치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의 칼럼 비판하지 말라는 그 목소리들 을 읽고 생각하다.

그의 칼럼은 조금 뜨거워지나 싶다가 이내 사라져버린 '경향-민노당간의 '3대세습 논쟁'의 후일담의 성격을 띈다. 처음부터 그 논쟁은 논쟁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왜냐면 논쟁의 한 당사자가 논쟁 자체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러는 것 역시 이해할만 한 것인데, 왜냐면 누구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싸움을 이어나가진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것이 논쟁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대근 위원의 집요한 문제의식과 여기에 대한 민노당 일각(특히 김창현 울산시당 위원장)의 정치적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논쟁은 종결되었지만, 칼럼의 말미를 장식한 그의 아쉬움에 가득찬 다음의 한마디는 오래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 ~ 그러나 제발 묻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마라. 누군가에 대해 어떤 문제를 물으면 안된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신문은, 기자는 허락받고 묻지 않는다."

그의 이말은 민노당 정치인들을 향한 듯 보이지만, 사실 이 논쟁에 끼어든 지식인들과 저널리스트들에 더 적절한 것이다. 그들이 민노당을 변호하며 구사했던 "어떤 문제는 우리 편을 곤란케 하고, 그래서 적(MB정권)을 이롭게 하니깐 덮어 두는게 옳다, 더 나아가면 우리는 당신이 공안검사/조중동과 같은 입장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식의 논리에 대한 반박이기 때문이다.

이대근 위원의 문제제기를 통해 오늘날 한국정치, 아니 최근 미국정치를 살펴보았을 때 현대민주주의 일반이 당면한 중심문제를 만난다. 그것은 현대 정치의 이념적 양극화(polarization)  심화와 그 결과 정치투쟁과 정치문법의 타락의 문제이다.  오늘날 정치투쟁과 이에 동원되는 정치문법은 화해/공존할 수 없는 피아간 진영간 총력전의 양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대근 위원이 칼럼 서두에서 지적했듯,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냉전시기 미소를 중심으로 한 두 진영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일종의 지배전략이었다.

문제는 정치를  피아간의 진영간 대립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지배할 때 나타난다. 그럴 때 한 진영 내에 존재하는 건전한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는 설자리를 잃게 되며, 역설적으로 그 진영/체제의 자기교정 매커니즘의 작동불능으로 이끌고, 결국 체제의 부패와 쇠락으로 나아간다. 어쩌면 위대한 소비에트가 서방세계와의 체제 경쟁에서 실패한 것은,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이러한 자기교정의 메커니즘이 훨씬 더 경직적이었던데 있을는지 모른다.

피아 진영간 투쟁의 정치문법을 살펴보자. 이들은 문법이 독특한 것은 그것이 일상적 시기엔 상식에서 벗어나지만, 전시에는 용인되는 '전쟁'의 문법이라는데 있다. 그 문법은 단순하고 그래서 강력한 두 진술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는 다른 어떤 원칙과 규범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  

(1) 적의 적은 동지이다. (2) 아(我)에 대해 비판하는 말과 행위를 하는 이들은 ,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하기에 적이다.

얼마전 한국의 보수파들은 황장엽 씨에 대해 훈장서훈과 국립모지 안장을 결정했다. 이들의 행위는 바로 (1)의 논리에 따른 당연한 결정이다. 황장엽은 그들이 그렇게 증오하는 김정일(체제)의 공공의 적 넘버 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북한 민주화, 또는 남북한 통일과 화해협력의 증진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는 부차적 문제가된다. 김정일이 그를 증오한다는 사실, 그래서 여러번 암살조를 내려보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이 체제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최근 민노당과 진보파 일각에서 제기된 경향비판은 바로 (2)의 논리를 따른 결과다. 사실 이는 지난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노무현 정부 핵심인사들과 이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이 즐겨 차용한 논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적은 한국의 보수파, MB정부, 또 조중동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러나 핵심은 단순하다. 그것은 이렇다. "동지의 우리 내부 모습을 향한 비판 혹은 문제제기는 이해되는 측면이 있소,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 엄중한 투쟁의 국면에서, 우리의 철천지 원쑤인 보수꼴통/MB/조중동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어 그들을 이롭게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고 있소 , 그러니 계속 그렇게 한다면 동지 역시 그들과 하등 다를바 없는 적으로 간주하겠소"

여기서 나의 의문점은 어떻게 그들은 적과 아를 그처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걸까 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박에 누가 적인지, 또 우리편인지를 아는듯 하다. 그러나 난 현재 한국정치체제 내의 어떤 정치인 혹은 세력에 대해 그런 판단을 그리 쉽게 내릴 수 없다. 반MB/반조중동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면 우리편인가? 진보/복지를 목놓아 부르짖으면 우리편인가?

한번 물어보자. 예컨대, 노무현 정부시절 노 전대통령에게 그렇게 인정받고, 사랑받았던 외교/통상 관료들, 그들은 여전히 MB정부하에서도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편인가 나쁜 편인가? 정권교체 되기 전까지는 우리 편이었는데, MB집권후 적으로 투항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도 적이었는데, 그 당시 우리편이라고 착각했던 것인가? 아니면 적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우리편이라 생각해 고위직에 임명하고,  FTA와 같이 국민의 삶에 중요한 협상의 전권을 부여하다시피한 노 전대통령의 피아식별의 오류의 문제인가? 그러면 당시 이런 결정을 옹호했던 당시 집권당의 집단적 오류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나? 집단적으로 이런 착각을 하는게 상식적이지 않다면, 결국 우리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노 전대통령 역시 우리의 적인가? 그는 조중동을 죽으라 싫어 했으니, 외교통상/경제정책에서 적들과 내통했지만, 그래도 우리편인가? 보수언론과 대립하는 것은 하찮은 문제이며, 외교/사회경제정책이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결국 그도 스파인가? 그렇다면 현재도 그를 추앙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에는, 이 조중동 같은 놈들이라는 딱지를 붙여대는 그의 분신과 지지자들은 우리의 적인가? 아인가? 아니 우리는 누구인가? 

이 정도로 생각이 이어지면, 난 도무지 니편과 내편을 쉽게 구분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적과 아를 나눌수 있을까? 모든 것이 혼돈스러운듯 하다. 그러나 이 속에서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복잡한 이익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현대정치에서 피와 아 구분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를 관장하는 모든 사회, 정치세력들이 참여하는 정치판을 양분하는 어떤 선을 그리는 것 역시 가능치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지금이 마치 전시인양 피아식별띠를 배포하고 적의 섬멸을 선동하는 이들은, 대체로 사기꾼이거나 데마고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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