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8일 목요일

[읽고 생각하다] 한국 진보의 빠리 판타지

경향신문 목수정의 [파리통신] "사르코지 너 미쳤니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잖아?를 읽고 생각하다.

이 칼럼은 며칠간이나 내 머리속을 어지렵혔다. 특별히 칼럼 자체에 대한 반감은 없다. 프랑스에 머물며 현재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일을, 프랑스인이 아닌 관찰자의 시각으로 전해주는 이 같은 보도는 한국언론에서 찾아 보기 힘들며 더욱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찜짐한 것은 이 글에서 한국 사회를 떠도는 하나의 판타지를 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인 만큼 다른 국가와 사회에 대해 맹목에 가까운 판타지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보수파는 보수파대로, 진보파는 진보파대로 자신들만의 율도국을 설정하고 끊임없이 이에 다가갈 것을 종용해댄다(이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하도록 하자).

목수정의 글은 바로 한국 진보파가 갖는 하나의 판타지와 관련돼 있다. 한국 진보파가 공통적으로 꼽는 율도국은 아마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일 것이다. 특히 그들의 복지정책, 교육정책, 노동, 환경, 보육 등 모든 것이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 진보파들이 프랑스에 미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총)파업과 관련해서다. 아마도 그 시작은 홍세화씨의 빠리의 택시운전사 이후가 아닐까? 그들의 판타지는 강렬하다. 기차도, 버스도, 비행기도 세우고, 쓰레기통은 쓰레기로 넘쳐나고, 관공서 조차 운영하지 않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 나라, 폭력진압은 커녕 경찰들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나라, 어린 학생들까지 파업대열에 동참하고 어른들은 옆에서 이를 격려하는 나라. 파업에 대한 부정적 보도는 커녕 언론마저 파업에 동참해 신문자체가 나오지 않는 나라. 무용담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들은 이런 모습을 상상하며, 몸서리를 치며 흥분한다. 그 생각만으로도 쿨하고 짜릿하다.

이런 판타지에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사회에서 기본적 자유권의 결핍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집회, 시위, 결사 등의 기본권은 선진민주국가들과 달리 무조건 보장되는 헌법적 권리가 아니라, 여러가지 하위법령(집시법, 노동관계법) 혹은 공권력의 재량적 판단으로 얼마든지 제한 가능한 하위의 가치로 치부돼 왔다. 여기에 보수파와 거대사익의 의지와 이해가 압도적으로 관철되는 '시민사회' 의 담론 역시 파업 등의 기본권 행사를 심리적으로 곡하기 일쑤였다. 하기에 시민적 권리에 관한 선언이 최초로 천명된 나라답게, 그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는 프랑스가 한국 시민들 특히 진보파에 부러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까지이다. 한 사회가 집회, 시위, 결사 등 민적 권리의 행사가 헌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공공정책 결정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다른 수준의 문제이며 다른 판단을 필요로 한다. 이 차이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유독 프랑스만 중요한 사회경제적 입법을 처리하기 위해선 적나라한 공권력 대 시민의 물리력 충돌을 매번 거듭하는 것일까? 왜 유럽의 다른 선진국가들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이익집단, 정당, 의회, 정부기관등의 의견교환과 협상을 통해 가능한 일들을 꼭 저렇게 실제 힘을 재보야만 가능한 것일까?  또 저와 같은 항상적 물리력 동원을 통해서만 주요 정책이 결정되거나 막아지는 사회가 진정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은 독일, 영국 등의 나라는 프랑스 처럼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며, 따라서 더 후진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작업장 수준에서든, 국민경제 수준에서든 시민, 노동자의 파업권은 일상적으로 실제 본때를 보여줌으로써가 아니라, 그 잠재적 사용에 대한 위협을 통해 행사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효율적이라 믿는다. 원래 권력은 그것이 온전히 드러날 때가 아니라, 감춰져 있을 때 그래서 그 힘의 크기를 상대가 가늠키 어려울 때 극대화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파업권의 잠재적 사용에 대한 위협력을 극대화하고(조직률 배가 등), 이를 저해하는 법적, 사회적 구속을 제거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프랑스 경험은 한국 노동이 배워야 할 점과 배우지 말아야 할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것이 프랑스 판타지로 압축되는 낭만적 이해에 불편해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나도 물어보자. 세상에, 연금법 문제로 어린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는게 정상이니? 애들이 공권력과 거리에서 위험첨만하게 대치하는게 마냥 쿨하기만 한거니? 니들 정말 어떻게 된거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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