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0일 목요일

[생각] 조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조금씩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감과 촉을 살려 가고 있다. 그럴려구 노력하고 있다. 시간이 걸릴꺼다. 문제는 그 수준과 형태가 무엇이 되었든, 뭔가 정리해 내놓는 결과물의 견지에서 볼 때, 자꾸 다른 영역(사회 문화)을 지분거리고 있다는 거다. 또 나의 영역(정치)을 다루더라도, 자꾸 비본질적 접근에 머문다는 거다.

오늘도 그렇다. 엊그제 부터 얼마전 경향에 실린 최장집 선생님의 "책임정치를 위하여" 칼럼 리뷰를 하나 쓰려고 했다. 써야 했다. 그런데 계속 딴짓만 하다, 엉뚱하게 정희진의 "그들이 화학적 거세를 선호하는 이유'라는 칼럼에 대한 독후감을 써버렸다. 

돌아가야 한다. 현대민주주의에서 정치리더와 정당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또 합리적 개인들의 (의도와)행위, 그 집합적 결과 사이의 관계, 그리고 개인들의 행동과 상호작용을 지도하는 '룰과 권력의 체계'이자 '매개변수'로서의 "조직"에 더 집중해야 한다. 정치는 조직의 문제다.

정희진의 "그들이 화학적 거세를 선호하는 이유"를 읽고

한 사회의 지배적 상식에 반론을, 그것도 효과적으로 제기하기란 힘든 일이다. 트라우마적 사건이 일어나고, 여론과 그 분노가 정해진 곳을 향해 내달릴 땐 더욱 그렇다. 해당 문제에 대한 전문지식만으론 부족하다. 여론에 굴복 또는 타협하지 않을 용기도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을 지혜와 끈기도 요구한다. 오늘 한겨레 정희진의 글이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을 통해서 나는 해당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해를 갖게 되었다.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논쟁] 정당 vs. 인물


최장집 "책임정치를 위하여"
한겨레 성한용 "대통령 선거의 몇 가지 상식"
한겨레 신진욱 "정당정치, 위기인가 기회인가?"

[읽어야 할 읽으면 좋을] 2012년 8월30일

1. 참 많이 듣던 레퍼토리. 시간나면 이런 것 모아봐야 할듯

이해찬 "모바일 경선은 세계 유례없는 정치혁신"

[읽고 생각하다] 이북 코스프레

페북 지인 중 한명이 링크한 8.15 행사에 관한 기사를 읽고 쓰다.
내가 기사를 읽고 페북에 남긴 반응과 여기에 대한 링크자의 댓글은 다음과 같다.
우와. 아직도 이런 걸 하고 있다니. 일단 놀랍고 그 생명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그런데 개콘 출품할 것도 아니고, 이런 "이북 코스프레"를 얘들이 왜 하고 있는 거지
이북 코스프레라고 할 것까지야.. 평화통일.. 진보진영의 대단합의 장 정도로 이해하심이 ^^;;
그리고 댓글에 대해 다시 쓰다.


‎^^ 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애들에게 조금 가혹하게 구는 것 같아서 맘에 걸리지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예나 지금이나 이쪽 친구들의 남북문제(통일) 고민이 '주체적'인 게 아니잖아요? 저쪽의 논리와 이해를 그대로 가져와 학습하는 것에 불과하지. 지금 달라졌다면, 저야 당장 반박할 근거는 없지만, 그쪽 어른들(통진당 NL)의 최근 모습과 발언을 보면 별로 그럴것 같지도 않습니다. 

둘째, 대학생들이 공적,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저는 지지합니다. 다만 그 문제영역으로 남북문제(통일)는 적절하지 않다고 봐요. 제가 볼 때 남북문제는 정치적으론 혹시나 발생할 불행한 파국을 막는 현상유지와 관리, 사회경제적으론 관여의 증대 이상의 고민이 나오기 힘들다고 봐요. 이는 현실에서 다소 미흡하나마 DJ의 햇볕정책으로 실제 구현된 것이고, 약간 개선점은 있겠지만, 이를 훌쩍 뛰어넘는 어떤 접근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통일운동 그룹의 남북문제에 대한 예의 감상적, 이상적 접근이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불어 모든 정치이슈들이 대중의 정치참여가 필요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제가 남북문제를 국제정치/외교의 이슈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급적 대중보다는 전문가와 엘리트의 손에 맡겨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셋째, 개인적으론 민주화이후 한국의 왼쪽 진영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고 퇴행을 거듭하는 주요 원인으로, 전 역사구조적 요인으로 통일운동 그룹이 민주화이후 한국의 왼쪽진영을 조직적으로 이념적으로 장악한 것, 그리고 그들의 시대착오성과 부적실성을 빼놓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통일운동을 통한 진보진영의 대단합'은 제게는 넌센스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젊을 땐 뭐든지 다 해보는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북의 사고와 문화를 흉내내는 일은 (제가 코스프레로 표현한)는 정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 친구들이 영어공부(토익과 같은 시험공부가 아니라 미국의 정론 주간지나 일간지를 읽고 토론하는 식의)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남북문제와 미국과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견을 건강하게 받아주실 것이라 믿으며...

2012년 8월 28일 화요일

[꽤긴글] 휴대폰 프라이머리

많은 이들이 충분히 지적했지만 현재 민주당 경선은 문제가 많다. 그것도 너무 많다. 모바일 프라이머리로 요약되는 현행 제도는 왜 문제인가?

먼저 그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한다. 지금과 같은 모바일 투표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라는 민주선거의 가장 기본적 원칙을 보장하지 못한다. 왜냐면 현재 장치로는 어떤 후보의 열성적 지지자가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의 휴대폰을 확보해 대리투표 하는 행위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첨예한 이해가 걸린 '정치의 세계'에서 유인은 존재하는데 막지 못한다는 것은 장려된다는 것이다. 과거 부정선거의 대명사인 독재시절 ‘고무신’ 선거도 결국 유권자를 투표장에 데려다 놓는데 머물렀지, 인주가 어디에 찍힐지 확정치는 못했다. 얼마전 국민들의 지탄과 조롱을 받은 통진당의 내부경선을 ‘태블릿 떼기’라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민주당의 그것은 ‘휴대폰 떼기’이다. 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둘 다 부정(이 허락된)선거다. 투표에 한정할 때, 물리적 출석 없는 참여는 민주적 참여가 아니다.

2012년 8월 27일 월요일

[읽고생각하기] 두 백치미

황진미의 멘붕권하는 사회-사는게 아니무니다 를 읽었다. 재밌는 글이다. 개콘은 내가 정기적으로 시청하는 유일한 TV프로다. 이 코너는 개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박소영이 가장 좋다. 행동거지와 대사 하나하나 다 좋다. 황진미 설명대로 캐릭터의 재미는 ‘적반하장’에서 나온다. 그러나 박소영 캐릭터의 요체는 사실 ‘소통불가-백치’다. 백치니 말이 안통하고 말이 안통하니 우기는 거다.

2012년 8월 25일 토요일

[생각] 아! 민주당

2010년 1월 15일 난 티스토리 블로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난 지금 민주당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뿐 아니라, 말해야 하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 역시 느낀다.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면 잘 안된다. 머릿속엔 하고 싶은 말들이 떠도는데 왜 글로 이어지진 않을까?
누구나 민주당을 말한다. 민주당이 갑자기 한국정치의 핵심문제로 부상한듯 하다. 진보적 성향의 언론들과 교수들, 논평가들 목청에 핏대를 세우며 민주당의 1에서 10까지 문제를 지적한다.

어쩌면 그들의 말, 조언, 충고들은 대체로 틀리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 그렇게 이것저것 온갖 얘기 가져다 하는데, 몇개라도 얻어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난 사실 그들이 민주당의 문제를 지적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들 자신들이 민주당의 문제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민주당, 그리고 현 지도부와 주요 인사들은 사실 언제나 그들에겐 열심히 반응해 왔다. 그들의 공식적, 비공식적 조언과 충고를 과도하게 집착해 왔다. 사실 민주당은 그들이 이끄는데로 왔다. 즉 그들의 충고에 따라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다들 자기가 말한 그대로 안 했다고 아우성이다. 그 입들을 다물게 할 수 없을까?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이야기 꺼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 그러면 잘 말할 수 있나? 그런 이야기를 잘 전달할 지식과 재주,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 의지를 가졌나? 잘모르겠다.
한 가지 확신은 내가 지금 민주당에 관한 것을 정리하고 뭔가를 쓰지 않는다면, 다른 작업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 왜 이렇게 됐지.....

2012년 8월 말 난 여전히 동일한 화두와 거의 동일한 수준과 방식으로 씨름하고 있다.

2012년 8월 24일 금요일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서평] 현대민주주의,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작성일: 2009.6.21>

리뷰 - 절반의 인민주권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역, 후마니타스, 2008)


현대 민주주의,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샤츠슈나이더의 1960년작 『절반의 인민주권』은 매우 짧은 책이지만, 누구나 손꼽는 정치학의 고전이다. 그러나 이 책을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갈등과 정치, 이익집단과 정당, 균열과 정당체제, 인민주권과 민주주의 등 정치학의 핵심 주제들을 망라하고 있어서다. 따라서 본 서평은 『절반의 인민주권』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밝히는데 우선 집중한다. 그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저자가 서문 첫 문장에서 밝힌, 정치조직에 관한 이론을 수립하려는 목적의 책이 왜 『절반의 인민주권』이란 제목으로 나왔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당시 미국 민주주의를 ‘이론의 위기’로 진단하고, 인민의 주권을 활용하는 방식의 변화를 역설한 저자의 진단과 해법이 이 제목에 축약되어 있으며,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해 매우 큰 시사를 갖기 때문이다.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짧은글] 독도방문 설명하기

나는 이번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즉흥적 결정의 소산으로 본다. 한번 언급하였듯이, 한국 대통령의 임기말 독도사랑은 그 자체로 특별할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갈 수 있는 곳도 크게 제한되는, 천덕꾸러기 레임덕 대통령에게 독도는 큰 반대 없이 뭔가 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제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할지라도, 과장된 수사난 비정치적 반일 제스쳐가 아닌 대통령의 물리적 방문으로 표현된 사랑은 평범한 일은 아니다. 쉬운 결정도 아니다.

[짦은글] 박종우 보도와 한국언론과 군중주의

지금 한국사회를 휩쓰는 이 기운을 군중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한국 언론과 기자들에게 '네티즌(의 의견)'은 여론 집약을 위한 여러 원천 중 하나(그것도 신뢰도에서 많이 떨어지는)가 아니라 여론의 전부가 돼 버린 듯하다. ‘디지털취재부’ 등의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순전히 네티즌들의 의견만으로 구성되는 황당한 기사가 크게 늘었다. 또 그런 종류의 기사의 범주도 연애, 스포츠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활용면에서도 단지 시민들의 의견 스케치를 넘어, 파워트위터리안이나 네티즌 투표의 형식을 빌어 기사 자체의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이르렀다.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짧은글] 코칭의 실패

이번 올림픽을 관전하며 여러번 맞닥뜨린 흥미로운 현상이 있는데 바로 코칭의 실패이다. 경기에 나선 선수들, 대부분 어렸던 친구들은 참 분투했다. 많은 이들이 환경적 제약과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 성취를 이뤘다. 그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열광하고 성원했다. 그들의 목에 걸린 메달의 색깔과 갯수에, 또는 흔히 말해지듯 국가로 돌려진 영광에, 우리가 그런 것은 아니다. 평범한 우리네들과 달리, 스스로를 물리적, 정신적 극한으로 밀어 붙여, 기어이 넘어 서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 설령 넘지 못하더라도, 인간 한계를 향한 그들의 도전과 좌절에 우리는 감탄하고 숙연해졌다.

문제는 그들을 지도하고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 어른들이다. 이 글은 선수들의 기대 이상의 선전에 가려진 코치(칭)의 분명한 실패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코치는, 구체적 직무로서 코치직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이들로 한정되기 보다는, 한 선수의 재능과 노력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와 보상으로 이어지는데 협력하는 모든 사람과 제도로 넓게 정의한다. 그래서 코치는 선수와 팀을 구성하는 코칭 스태프 뿐 아니라, 관련 협회와 단체 그리고 전문가 그룹 나아가 정부부처에 이르는 관련된 사회적 제도와 메커니즘 전반을 의미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끝나지 않는 1초’로 운위된 펜싱 신아람 논란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또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이 사건을 사태로 만든 것은 틀린 ‘판정’ 이 아니다. 그것은 틀린 ‘어필’이다.

물론 당시 경기에서 심판의 판단, 또 이를 돕는 기계장치와 그 운용자의 실수 내지 오류는 존재했다. 또 그것의 직접적 피해자로 신아람 선수가 갖는 부당함 내지 억울함에 공감하고 편들게 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그러나 모든 스포츠 경기(어쩌면 경쟁 일반에서)에서 그것을 관장하는 인간과 기계의 오류와 실수는, 그것이 시스템적이거나 명백한 의도와 계획의 산물이 아닌 다음에는(또 그렇더라도 명백하게 입증되기 전까지는), 경기의 일부이다. 최고의 인력과 자원이 동원된다는 올림픽에서도 그렇다. 그 역시 사람이 주관 하는 것이며, 첨단장비의 도움을 받더라도 (심지어 받았기 때문에) 실수와 오류의 완전한 제거는 불가능 하다. 문제가 없게 사전에 노력하고, 그래도 일어난다면 사후에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따라 교정하거나(수영 박태환의 사례), 또는 장기적으로 끊임없이 개선(비디오 판독 도입 확산)해 나갈 따름이다.

이처럼 스포츠 세계에서 실수/오류와의 공존의 불가피성을 받아 들일 때, 신아람 사태가 판정이 아니라 어필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제목도 ‘신아람 오심’ 보다는 ‘신아람 점거/눈물의 시위’가 보다 정확할 것이다. 불편해도 말이다. 사태를 이렇게 달리 보는 것의 함의는 크다. 먼저 한국 네티즌의 ‘공공의 적’이 된 82년생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판은 더 이상 사태의 원인제공자가 아니다. 경기장 시계도 그렇다. 그것은 신아람 선수, 보다 정확하게는 부당한 판정에 직면해 그녀가 선택한 항의의 방법, 즉 경기장을 떠나기를 거부하고(점거) 눈물로 호소하는 행위에 있다. 필자는 올림픽 일반, 문제가 된 펜싱에서 부당한 판정에 대한 공식적 항의의 요건과 절차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신아람 선수의 그것이 공식적인 것도 정상적인 것도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사태가 판정이 아닌 항의(의 방식)의 문제라는 주장이 “모든게 신아람 선수의 잘못이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분명한 오류들과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닥치고’ 승복하는 것은 그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쳐온 이들에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희박한 가능성에도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정해진 규정과 절차를 따라서 이뤄져야 했다. 그녀가 선택한 방식, 즉 경기장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눈물로 호소하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억울한 이들이 자주 선택하는 원초적 방식이며, 또 어떤 면에서 매우 ‘한국적인’ 방식이지만, 스포츠에 어울리는 것으로 보긴 어렵다. 그것은 그 성격과 양식에서 결국 정치적 시위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치적 시위를 어필의 정당한 방식으로 용인한다면, 전체 올림픽은 커녕 축구 한 게임조차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행위, 항의를 위해 선택한 표현양식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다. 아니 더 큰 잘못과 책임은 신아람 선수가 아니라 그녀의(를 위한) 코치(칭)에 있다. 코치의 역할은 결국 선수의 재능과 노력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와 보상으로 최대한 연결되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한 코치의 책무는 평시에는 경기력 향상을 지도하는 것이며, 올림픽과 같은 시합기간에는 선수의 퍼포먼스와 결과에 영향을 끼칠 다양한 외부적 요인들을 통제해서 선수들을 보호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신아람 사태는 이 지점에서 코칭이 완전히 실패한 것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경기에서, 시합을 통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 넣은 것으로 신아람 선수의 역할은 끝난 것이며, 그러해야 했다. 판정과 관련되어 이후 발생한 모든 과정은 온전히 코치와 지원조직의 몫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그녀를 경기장에 방치했다. 그녀가 억울하고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전세계가 시청하도록 했다. 냉정히 말한다며 그들은 원하는 결과(판정번복)를 얻기 위해 퇴장거부(점거와 경기진행 방해)라는 정치적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것도 눈물 흘리는 어린 여자선수를 맨 앞에 내세우는 감정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신아람 선수가 원하고 선택한 것이라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코치의 책무로 선수의 보호를 말할 때, 거기에는 ‘선수 그 자신’으로부터의 보호도 들어간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는 극한의 경쟁에 노출된 나이 어린 선수들이 결과를 위해 과정을 또 현재를 위해 미래를 기꺼이 희생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선수 그 자신으로부터 선수를 보호 하는 것 코치에게 주어진 가장 어렵고 중요한 역할 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코치들 또 코치들의 코치들(협회와 유관조직)이 했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먼저 빠르게 사태파악을 한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방식으로 할수 있는 최선의 어필을 해야 했다. 그 가능성이 설령 크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코치는 무엇보다 선수를 위로하고 안정시켜야 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 경기(3-4위전, 단체전)가 남아 있다는 것을, 나아가 이번 경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다음 선수권, 올림픽), 어쩌면 경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인생)을 일러주고 설득해야 했다. 이건 사실 뭐 특별한 얘기도 비법도 아니다.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대부분의 선수와 코치가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그날 경기장에서 1차 코칭의 실패의 효과는 경기장에 머물지 않았다. 처음의 파장과 책임을 면하기 위한 코치들의 절박한 그러나 다시 부적절한 행동들이 이어졌다. 특별상과 특별메달 논란이 그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그리고 더 큰 코칭의 실패로 이어졌다. 미디어와 전문가 그리고 오피니언 리더들은 그날 “뭔 일이 일어 났는지”를 대중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코치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어린 친구가 서럽게 우는 그 장면에만 집중 했고 흥분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과도한 흥분에 휩싸였다. 경기장 밖에서의 2차 코칭의 실패는 우리 네티즌들이 온라인 국경을 넘어 행사된 폭력이다

어제 축구 대표팀 박종우 선수의 메달 보류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시간이 꽤 흐른 시점에서 신아람 사건을 다시 들추고, 글을 쓰게 된 것도 이 소식 때문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 역시 동일한 문제, 즉 코칭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들의 온정적/희망적 보도와 달리, 해당 문제에 있어 IOC와 각종 세계 경기단체들의 기본원칙과 대응은 분명하고도 확고하다. 제기된 이슈의 정당성과 보편성과 무관하게, 경기장으로 정치적 이슈를 가져오려는 어떠한 시도는 금지되며, 그 위반에 대해선 무관용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확립된 것으로 선수라면 가져야 되는 상식이고, 또 국제대회에 나서는 선수들에게 코치들이 제일 먼저 숙지시켜야 하는 교양 중의 교양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한일전에 걸린 이해관계는 너무 컸다. 두 국가 모두 불가능하다 여겼던 올림픽 메달을 두고 다퉜고, 한일간의 오래된 역사적 라이벌 의식이 더해졌다. 선수들이 감정적으로 동요될 가능성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코치들은 이런 경기외적 영향과 기운, 그리고 그것이 선수들의 내면에 끼칠 동요 양자 모두를 적절히 통제하고 선수들을 보호해야 했다. 게다가 당일 대통령의 ‘생뚱맞은’ 독도 방문까지 있었다. 아마 이 소식은 선수들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코치들, 선수단, 협회는 이런 모든 상황이 선수들의 우발적 충동적 행동으로 이어질수 있음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했다. 박종우 사건은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경기장에서 코칭은 또 실패했다. 그리고 그 잘못과 책임에 벗어나기 위해, 미디어와 전문가 즉 코치의 코치들은 엉뚱하게 IOC 또는 일본을 비난한다. 독도가 우리땅이 아니더냐고 한다. 일본의 고자질 때문이라 한다. 2차 코칭의 실패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네티즌들은 또 다시 전투에 소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