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1일 토요일

[짧은글] 코칭의 실패

이번 올림픽을 관전하며 여러번 맞닥뜨린 흥미로운 현상이 있는데 바로 코칭의 실패이다. 경기에 나선 선수들, 대부분 어렸던 친구들은 참 분투했다. 많은 이들이 환경적 제약과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 성취를 이뤘다. 그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열광하고 성원했다. 그들의 목에 걸린 메달의 색깔과 갯수에, 또는 흔히 말해지듯 국가로 돌려진 영광에, 우리가 그런 것은 아니다. 평범한 우리네들과 달리, 스스로를 물리적, 정신적 극한으로 밀어 붙여, 기어이 넘어 서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 설령 넘지 못하더라도, 인간 한계를 향한 그들의 도전과 좌절에 우리는 감탄하고 숙연해졌다.

문제는 그들을 지도하고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 어른들이다. 이 글은 선수들의 기대 이상의 선전에 가려진 코치(칭)의 분명한 실패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코치는, 구체적 직무로서 코치직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이들로 한정되기 보다는, 한 선수의 재능과 노력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와 보상으로 이어지는데 협력하는 모든 사람과 제도로 넓게 정의한다. 그래서 코치는 선수와 팀을 구성하는 코칭 스태프 뿐 아니라, 관련 협회와 단체 그리고 전문가 그룹 나아가 정부부처에 이르는 관련된 사회적 제도와 메커니즘 전반을 의미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끝나지 않는 1초’로 운위된 펜싱 신아람 논란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또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이 사건을 사태로 만든 것은 틀린 ‘판정’ 이 아니다. 그것은 틀린 ‘어필’이다.

물론 당시 경기에서 심판의 판단, 또 이를 돕는 기계장치와 그 운용자의 실수 내지 오류는 존재했다. 또 그것의 직접적 피해자로 신아람 선수가 갖는 부당함 내지 억울함에 공감하고 편들게 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그러나 모든 스포츠 경기(어쩌면 경쟁 일반에서)에서 그것을 관장하는 인간과 기계의 오류와 실수는, 그것이 시스템적이거나 명백한 의도와 계획의 산물이 아닌 다음에는(또 그렇더라도 명백하게 입증되기 전까지는), 경기의 일부이다. 최고의 인력과 자원이 동원된다는 올림픽에서도 그렇다. 그 역시 사람이 주관 하는 것이며, 첨단장비의 도움을 받더라도 (심지어 받았기 때문에) 실수와 오류의 완전한 제거는 불가능 하다. 문제가 없게 사전에 노력하고, 그래도 일어난다면 사후에 주어진 절차와 규정에 따라 교정하거나(수영 박태환의 사례), 또는 장기적으로 끊임없이 개선(비디오 판독 도입 확산)해 나갈 따름이다.

이처럼 스포츠 세계에서 실수/오류와의 공존의 불가피성을 받아 들일 때, 신아람 사태가 판정이 아니라 어필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제목도 ‘신아람 오심’ 보다는 ‘신아람 점거/눈물의 시위’가 보다 정확할 것이다. 불편해도 말이다. 사태를 이렇게 달리 보는 것의 함의는 크다. 먼저 한국 네티즌의 ‘공공의 적’이 된 82년생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판은 더 이상 사태의 원인제공자가 아니다. 경기장 시계도 그렇다. 그것은 신아람 선수, 보다 정확하게는 부당한 판정에 직면해 그녀가 선택한 항의의 방법, 즉 경기장을 떠나기를 거부하고(점거) 눈물로 호소하는 행위에 있다. 필자는 올림픽 일반, 문제가 된 펜싱에서 부당한 판정에 대한 공식적 항의의 요건과 절차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신아람 선수의 그것이 공식적인 것도 정상적인 것도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사태가 판정이 아닌 항의(의 방식)의 문제라는 주장이 “모든게 신아람 선수의 잘못이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분명한 오류들과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닥치고’ 승복하는 것은 그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쳐온 이들에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희박한 가능성에도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정해진 규정과 절차를 따라서 이뤄져야 했다. 그녀가 선택한 방식, 즉 경기장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눈물로 호소하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억울한 이들이 자주 선택하는 원초적 방식이며, 또 어떤 면에서 매우 ‘한국적인’ 방식이지만, 스포츠에 어울리는 것으로 보긴 어렵다. 그것은 그 성격과 양식에서 결국 정치적 시위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치적 시위를 어필의 정당한 방식으로 용인한다면, 전체 올림픽은 커녕 축구 한 게임조차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행위, 항의를 위해 선택한 표현양식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다. 아니 더 큰 잘못과 책임은 신아람 선수가 아니라 그녀의(를 위한) 코치(칭)에 있다. 코치의 역할은 결국 선수의 재능과 노력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와 보상으로 최대한 연결되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한 코치의 책무는 평시에는 경기력 향상을 지도하는 것이며, 올림픽과 같은 시합기간에는 선수의 퍼포먼스와 결과에 영향을 끼칠 다양한 외부적 요인들을 통제해서 선수들을 보호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신아람 사태는 이 지점에서 코칭이 완전히 실패한 것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경기에서, 시합을 통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 넣은 것으로 신아람 선수의 역할은 끝난 것이며, 그러해야 했다. 판정과 관련되어 이후 발생한 모든 과정은 온전히 코치와 지원조직의 몫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그녀를 경기장에 방치했다. 그녀가 억울하고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전세계가 시청하도록 했다. 냉정히 말한다며 그들은 원하는 결과(판정번복)를 얻기 위해 퇴장거부(점거와 경기진행 방해)라는 정치적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그것도 눈물 흘리는 어린 여자선수를 맨 앞에 내세우는 감정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신아람 선수가 원하고 선택한 것이라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코치의 책무로 선수의 보호를 말할 때, 거기에는 ‘선수 그 자신’으로부터의 보호도 들어간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는 극한의 경쟁에 노출된 나이 어린 선수들이 결과를 위해 과정을 또 현재를 위해 미래를 기꺼이 희생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선수 그 자신으로부터 선수를 보호 하는 것 코치에게 주어진 가장 어렵고 중요한 역할 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코치들 또 코치들의 코치들(협회와 유관조직)이 했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먼저 빠르게 사태파악을 한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방식으로 할수 있는 최선의 어필을 해야 했다. 그 가능성이 설령 크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코치는 무엇보다 선수를 위로하고 안정시켜야 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 경기(3-4위전, 단체전)가 남아 있다는 것을, 나아가 이번 경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다음 선수권, 올림픽), 어쩌면 경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인생)을 일러주고 설득해야 했다. 이건 사실 뭐 특별한 얘기도 비법도 아니다.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대부분의 선수와 코치가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그날 경기장에서 1차 코칭의 실패의 효과는 경기장에 머물지 않았다. 처음의 파장과 책임을 면하기 위한 코치들의 절박한 그러나 다시 부적절한 행동들이 이어졌다. 특별상과 특별메달 논란이 그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그리고 더 큰 코칭의 실패로 이어졌다. 미디어와 전문가 그리고 오피니언 리더들은 그날 “뭔 일이 일어 났는지”를 대중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코치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어린 친구가 서럽게 우는 그 장면에만 집중 했고 흥분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과도한 흥분에 휩싸였다. 경기장 밖에서의 2차 코칭의 실패는 우리 네티즌들이 온라인 국경을 넘어 행사된 폭력이다

어제 축구 대표팀 박종우 선수의 메달 보류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시간이 꽤 흐른 시점에서 신아람 사건을 다시 들추고, 글을 쓰게 된 것도 이 소식 때문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 역시 동일한 문제, 즉 코칭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들의 온정적/희망적 보도와 달리, 해당 문제에 있어 IOC와 각종 세계 경기단체들의 기본원칙과 대응은 분명하고도 확고하다. 제기된 이슈의 정당성과 보편성과 무관하게, 경기장으로 정치적 이슈를 가져오려는 어떠한 시도는 금지되며, 그 위반에 대해선 무관용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확립된 것으로 선수라면 가져야 되는 상식이고, 또 국제대회에 나서는 선수들에게 코치들이 제일 먼저 숙지시켜야 하는 교양 중의 교양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한일전에 걸린 이해관계는 너무 컸다. 두 국가 모두 불가능하다 여겼던 올림픽 메달을 두고 다퉜고, 한일간의 오래된 역사적 라이벌 의식이 더해졌다. 선수들이 감정적으로 동요될 가능성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코치들은 이런 경기외적 영향과 기운, 그리고 그것이 선수들의 내면에 끼칠 동요 양자 모두를 적절히 통제하고 선수들을 보호해야 했다. 게다가 당일 대통령의 ‘생뚱맞은’ 독도 방문까지 있었다. 아마 이 소식은 선수들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코치들, 선수단, 협회는 이런 모든 상황이 선수들의 우발적 충동적 행동으로 이어질수 있음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했다. 박종우 사건은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경기장에서 코칭은 또 실패했다. 그리고 그 잘못과 책임에 벗어나기 위해, 미디어와 전문가 즉 코치의 코치들은 엉뚱하게 IOC 또는 일본을 비난한다. 독도가 우리땅이 아니더냐고 한다. 일본의 고자질 때문이라 한다. 2차 코칭의 실패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네티즌들은 또 다시 전투에 소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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