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3일 월요일
[정치분석] 최장집 칼럼 해제 Part 1
이 글은 경향신문 8월 28일자 최장집 칼럼 [책임정치를 위하여]의 해제다. 칼럼을 ‘풀겠다’ 나선 것은 그 글이 별 반향 없이 묻혀서는 안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느 칼럼처럼 ‘박근혜 지지 표방’으로 오독되어선 안된다. 최장집의 모든 글이 주목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실 최장집처럼 한 분야에서 ‘대가’로 평가되는 씨니어 연구자들은 한 가지 화두를 얘기하고 또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끔 빼먹어도 된다. 또 비슷한 주제라면 슬쩍 훑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다. 왜 그런가? 세 가지 까닭이다. 첫째, 뭔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둘째, 뭔가 ‘새로운’ 얘기를 하고 있다. 셋째, 그러면서도 뭔가 ‘긴요한’ 얘기를 한다. 덫붙여, 씨니어 연구자의 글은 자주 형식과 내용에서 불친절하다. 좀처럼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는다. 요점은 종종 감춰지고 맥락은 자주 생략된다. 필자가 감히 안내를 자청하고 나선 이유다.
1. 어떤 ‘다른’ 이야기를, 왜 하는가?
민주주의는 선거시기와 선거간 시기로 구분된다. 또 전자는 대표(representation)의 과정이며, 후자는 책임(accountability)의 과정이다. 지금은 대선정국, 즉 선거시기이다. 즉 거의 모두가 “누가 될 것인가?” 또는 “누가 (안)되어야는가?”를 말한다. 유난히 불확실한 선거이니만큼 왈가왈부의 목소리도 크다. 바로 이 때, 최장집은 엉뚱하게 누구든 되고 난 ‘이후’에 대해 말한다. 즉, 그는 왜 ‘선거시기’에 ‘책임’에 주목하는 것일까? 그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 대통령들의 법칙에 가까운 실패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실천과 함께 한 이론가인, 또 한국정치의 기민한 관찰자인 그에게, 그것은 외면키 어려운 ‘방안의 코끼리’이다. ‘누구냐’에만 집중된 야단법석은 그래서 “다음 실패자를 누구로 할까요”로 여겨졌는지 모른다. 선거라는 ‘대표’의 과정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국민의 대통령(정부)(of the people)들이 왜 국민을 위한 대통령(정부)(fot the people)이 되는데 실패하는지를 최장집은 묻고 있는 것이다.
‘대표’의 견지에서 한국의 대통령들 간 차이는 작지 않았다. 먼저 당이 달랐다. 하기에 이념적, 지리적 기반도 달랐다. 출신 배경이 달랐고, 집중했던 사회계층도 달랐다. 통치 철학과 원리도, 그 행태와 스타일도 너무나 달랐다. 이렇게 다름에도 김영삼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모든 대통령은 실패했다. 모두 예외 없이 임기 말 바닥에 가까운 신뢰도와 지지율을 기록했다.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스캔들은 빠지지 않았다. 극심한 레임덕에 허덕였고 막바지엔 아무것도 하지말 것을 요구받았다. 자신이 만들다시피한 정당에서 내쫓겼고, 후임자로부터 정책적 차별화의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하나의 상자로 다른 재료들이 들어갔는데 똑같은 결과물이 나올 때, 우리는 상자를 봐야한다. 또, 잘 알다시피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형편 없었던 건 아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당선됐고, 높은 기대와 지지를 않고 출범했다. 그러나 열망은 예외 없이 실망으로 변했다. 즉 그것은 일회적이기 보다는 패턴이었다. 최장집이 민주화이후 한국 대통령들의 실패를 ‘제도로서 대통령’의 실패로 보는 까닭이다.
정치학에서 대통령’제’에 내장된 위험(the perils of presidentialism)은 잘 알려진 주제다. 의회제와 달리, 대통령제에선 행정부와 의회가 다른 정당의 수중에 들어가는 분점정부가 가능할 뿐 아니라 빈번하다. 이는 자주 제도간 교착과 마비로 이어지고, 최악의 경우 통치불능(ungovernable)과 헌정중단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최장집의 초점은 대통령제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한국적 ‘변형’에 맞춰진다. 왜냐면 한국 버젼의 ‘대통령제 위험’은 대통령(정당)과 의회를 장악한 야당간의 제로섬적 갈등과 대립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대통령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집권당간에 존재하는 구조적 척력(斥力), 그것이 만드는 ‘기묘한’ 당정분리, 그 결과로서 책임정부 구현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한국에서 문제는 여야간 관계에 앞서 당정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정 간 무엇이 대통령들을 거듭 실패하게 하나? 이를 위해 최장집은 ‘캠프정부’라는 개념을 만들고 ‘정당정부’와 대비시킨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또 그들의 통치는 공적 ‘정당’이 아닌 사적 ‘캠프’에 기반한다. 한국에서 대선은 정당이 치르는게 아니다. 선거경쟁을 통해 승자가 되고, 그래서 정부를 이루는 주체도 정당이 아니다. 그것은 캠프다. 그래서 민주당 정부, 새누리당 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다. 비슷한 호칭의 관행을 갖는 미국과도 다르다. 미국의 그것이 내용적으로 오바마 행정부(administration)와 의회 민주당의 공동 집권을 의미한다면, 한국은 문자 그대로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사람들의 정부를 의미한다. ‘캠프’는 특정 리더(잠정적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것은 정당 ‘밖’에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캠프의 물리적 소재(所在)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과 아이디어가 정당 ‘밖’에서 온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정당 구성원도 있겠지만, 캠프를 주도하는 이들은 대체로 당적을 갖지 않는 정치기업가들과 정치지식인들이다. 그들의 참여 동기와 목표도 천차만별이다. 개인적 이해에 이끌렸을수도, 공적 헌신의 수단으로 여겼을수 있다. 뭐든간에 캠프의 핵심은 개별 리더를 빼놓고선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 잠정적 사적 결사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민주적 책임의 사슬 밖에 위치한다.
최장집의 묘사에 더해, 거칠게 캠프정부의 일생을 따라가보자. 먼저 임기초반이다. 캠프는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로 옮겨온다. 캠프가 있기에 신임 대통령에게 정당의 도움은 절실치 않다. 오히려 인사와 정책에서 원치않는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당은 부담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당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건 아니다. 임기초반 여당과 여당 내 반대자들로부터 나오는 반대 만큼 언짢은 것도 없다. 게다가 양자간 힘의 관계에서 대통령 우위는 압도적이다. 신임 대통령의 첫 번째 과업은 그래서 집권당 권력구조와 배열의 전면적 개편이다. 그것이 흔히 정당개혁으로 불려진다. 캠프출신의 정치인이 당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정당개혁, 즉 당의 대통령 친위화는 마무리 된다. 간혹 이 과정이 순탄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것이, 신당 즉 ‘대통령의 당’이다. 집권당은 의회 내 거수기로 전락하고, 대통령과 캠프정부의 독주는 시작된다.
그러나 집권 초, 집권당 무력화는 결과를 갖든다. 정당은 대통령의 정치적 팔(political arm)이다. 그것을 잃었다는 것은, 대통령과 시민사회 사이의 연결 고리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과 빠르게 괴리된다. 충성스런 지지그룹과 세력들 역시 하나둘 떠나간다. 캠프인사들에 더해, 초기 정당이 제거된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관료와 거대이익으로부터 파견된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정당의 기능을 대신할 수도 하려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대통령이 자신들의 이해에 복무할 때만 함께 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임기말 상황은 완전히 뒤집힌다. 권력은 당으로, 보다 정확히 차기주자들로 빠르게 옮겨간다. 이젠 정당이 대통령을 밀어낸다. 인기 없는 대통령과 그의 실패한 정책들은 다음선거에 부담이다. 차별화와 탈당의 요구가 터져나온다. 그러나 제도적, 문화적으로 ‘강력한’ 한국의 대통령제에서, 집권당이 우위에 서거나 남은 국정을 주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과 정은 말 그대로 분리된다. 서로 영향력을 끼칠 능력도 의지도 없다. 당에 군림했던 ‘제왕적’ 대통령은 당과 자신을 분리시킨 결과로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약한 대통령이 된다. 당은, 보다 정확히 말해 대권을 향한 캠프들의 느슨한 연합은 마치 현 정부와 그 실패는 자신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다음 선거를 준비한다. 다음 캠프정부가 태동하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최장집 칼럼은 우리가 알고있으면서도 애써 못본척하는 ‘방안의 코끼리’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제도로서 한국 대통령의 필연적 실패와 그 핵심원인으로 캠프정부 현상이다. 캠프정부 하에서, 민주적 책임정치의 두 축이 되어야 할, 대통령과 집권당은 서로를 밀어내고 분리 된다. 끊임 없이 상호대립과 부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시민의 이해와 요구에 지속적으로 응답하고, 선거 때 말했던 것을 실천하는 책임정치는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무책임 정치의 덫에 빠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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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논의>
대통령과 당을 분리시키는 척력은 원천은 어디인가? 먼저 그것은 오랜 독재경험에서 비롯된 강력한 대통령제의 유산, 허약한 시민사회와 정당, 그리고 짧은 민주주의 경험 등의 구조적, 역사적 조건에서 만들어진다. 보다 직접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제도간 권력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당정간 권력의 현격한 차이는 참여와 협력의 유인을 떨어뜨린다. 일방적 독주를 허용한다. 결정과정에 참여 없는 당이 책임을 느낀기는 쉽지않다. 둘째, 정치적 시계에서 차이도 있다. 단임 대통령이다 재선의 욕구를 갖지 않는다. 그래서 일상적 시민들의 평가에서 곧잘 벗어난다. 역사의 평가를 운운하며 큰 거 한방을 노린다. 메가프로젝트에 몰두한다. 반면에 집권당은 곧 다음 선거를 치러야 한다. 유권자들의 일상적 평가에 민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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