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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웨스트 윙을 마쳤다. 웨스트윙은 미국 백악관의 업무동의 공식명칭이다. 여기서 내가 마친 것은 Aaron Sorkin 원작의 미국 드라마를 말한다. 그것은 1999년 9월부터 2006년 5월 14일 까지 무려 8년에 걸쳐 방영되었고, 방송분량은 7 시즌에 154 에피소드에 달한다. 웨스트 윙은 허구의 민주당 바틀렛(Bartlet) 대통령(마틴 쉰 역)의 두 차례 임기동안 백악관 웨스트 윙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다룬다.
내가 이 드라마를 재밌게 본 이유이기도 하고, 미국 밖 사람들에게 이 드라마가 주는 가장 큰 덕목은 그것이 미국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어쩌면 미국 정치학 개론서 한 두권을 정독하더라도 어려울, 전반적 스케치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흔히 미국 정부/정치를 단순히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그 크기와 역할이 얼마간 확장된 버젼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정치는 다른 국가들의 그것과 단순히 양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르다. 미국은 현대 민주주의의 제도를 처음으로 만들고 실천해온 곳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미국의 민주주의 실험이 현재 여러 국가들의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다고 말해도 별 과장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제도와 관행에는 지난 200여년에 걸친 그들의 시도(trial) 그리고 실수(error)가 녹아있다. 그래서 미국은 현대 민주주의의 박물관 혹은 살아있는 화석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이런 점이 미국을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특징적인 민주주의로 만들며, 따라서 어설픈 관찰자, 연구자들이 당최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제공한다. 민주주의와 관련한 미국의 여러 제도, 원리 그리고 실천들이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여러 후발 민주주의 국가들에 수입, 이식되었다. 아마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제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그것을 하나의 총체로서 도입하지 못했으며 사실 그것은 가능치 않다. 각국가는 미국의 여러 제도적 셋팅이나 원리 혹은 실천들 가운데서 일부분 내지 한 단편들을 조각조각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미국의 제도적 예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역이 선거제도와 정당제도일 것이다. 아마 한국의 대부분의 정치학자들, 심지어 미국정치 전공자라 할지라도, 미국의 다양한 통치의 수준들에서 사용되는 각양각색의 선거제도를 꿰고 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선거와 관련된 모든 결정 권한이 각 주에 주어져 있고, 해당 주들은 건국과 연방 건설 이후 저마다 독특한 선거제도를 만들고 또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왜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투표함에 제대로 유권자의 의사가 던져지는지, 혹은 던져진 표가 제대로 세어지는지가 여전히 문제시 되는 것은(2000년 대선 처럼) 이런 복잡성에 일차적 이유가 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중선관위라는 선거를 총괄하는 중앙기구도, 전국적으로 단일한 투표 방법, 투표 용지, 캠페인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 각국들간의 선거제도의 차이보다도 미국의 여러 주들간의 선거제도 차이가 훨씬 더 큰 것이다.
정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대적 의미의 정당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그것이 유럽으로, 남미로 그리고 아시아로 건너갔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국가라면 모두가 복수의 경쟁적 정당체제를 갖고, 또 그것이 미국에서 기원한 바 자신들의 정당이 미국의 그것과 유사할 것으로 착각하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당 조직, 시민사회와의 관계, 국가 혹은 중앙 관료조직과의 관계, 정당간 경쟁의 양식 모든 것에서 미국은 가장 독자적인 모델을 갖는다.
그래서 웨스트 윙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탐구 없이 사실상 이해불가능한 미국정치와 미국정부에 대한 개괄적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장 쉬운, 그것도 즐거운 방법인 것이다. 웨스트 윙은 실제 그리고 지금 미국 정치의 여러가지 정치적 이벤트와 관행들, 중요 이슈들을 중심 소재 삼아, 그리고 실제 일어나는 민주, 공화 두 거대정당간의 협력과 경쟁, 입법(상하원), 행정, 사법부의 권력기구와 제도들간의 협력과 경쟁을 백악관에 한정되지만 주요 정치행위자를 중심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의료보험 개혁시도에서 잘 나타났듯이 미국에서 대통령이 주도한 법안이 통과되기 위해 의사당 본회의장 뒤편에서 어떤 거래와 협상이 일어나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누가 어떤 인센티브와 레버러지를 가지고 입법전쟁에 뛰어드는지 우리는 웨스트의 몇몇 에피소드를 통해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미국의 대법원(supreme court)의 대법관을 선정하는 과정 역시 얼마나 정치적이며, 그것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단순히 책으로서만 이해하기 무척이나 어렵다. 특히 한국처럼 뭔가 불편부당 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사 지명과정과 기준이 있는 것처럼 믿어지는 나라에서 이런 미국적 사고와 관행은 낯설고 어쩌면 터무니 없는 것으로 여겨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압권은 역시 선거이다. 미국에서 선거, 특히 대선은 거의 1년에 넘게 걸리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이다. 긴 캠페인을 통해 시민들의 이해와 요구는 표출되고, 선거 승리를 원하는 후보와 정당에 의해 집약된다. 특히 시즌 7에 나오는 바틀렛 대통령 이후 무명의 산토스라는 남미계 3선 하원의원이 민주당 후보 지명을 받고, 결국 공화당 매버릭 상원의원인 비닉에게 선거승리를 거두는 과정은 마치 지난 오바마의 대선 과정을 예견한 것처럼 흥미롭다. 여기서 우리는 인물(후보자) 중심의 선거, 중앙당의 역할, 러닝메이트 선정과정, 지역, 이슈, 종교 등 여러 사회인구학적 차이들에 대한 각 캠프의 전략, 전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웨스트 윙은 미국정치에 관한 가장 괜찮고 재밌는 시청각 교재이다. 다른 미드보다 아무래도 흡입력과 긴장감은 떨어진다하더라도, 그 구성과 주요 인물들의 내러티브 등은 어느 하는 놓칠 것이 없다. 그래서 웨스트 윙은 미국에서 수 많은 방송관련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추가1) 미드와 한드
최근 미국드라마를 많이 보게 되는데, 한국 드라마와 그 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것에 사뭇 놀란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미국 드라마에 감탄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그 스케일과 이를 뒷받침 하는 제작비와 테크놀러지 등이 아니다. 혹자들은 쉽게 스케일과 돈의 차이가 한드와 미드의 차이를 만든다고 치부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것일지라도, 완전한 사실은 아니다.
내 생각에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스토리, 혹은 이야기 꺼리이다. 미국 드라마는 너무나 다양하고 전문적이다. 기업, 테러, 정치, 의료 등 그 소재가 무엇이든 우리는 그 분야의 문외한으로 잘 알기 어려운 수 많은 풍부한 이야기와 정보 그리고 재미를 얻는다. 하다못해 코믹 시츄에이션물 조차 미국 사회 혹은 가족의 여러 단면들을 엿보게 해준다. (최근 MBC 지붕뚫고 하이킥은 이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한다)
그러나 한국드라마에서 소재는 단순히 남여 주인공의 직함으로 환원된다. 본격 의료(병원) 드라마는 단순히 의사 또는 의대생이라는 직함을 가진 남여 주인공이 병원에서 환자를 앞에 두고 자행하는 애정물로 전락하기 일쑤며, 기업드라마는 대기업의 '실장' 혹은 '팀장' (주로 회장 사장의 자제들이다) 똑똑하고 이쁜 여자 직원들을 대상으로 회사에서 벌이는 애정행각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최근 한국드라마에서 말해지는 소재의 다양성은 결국 애정행각을 벌이는 주인공들의 직함과 배경화면의 다양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는 심지어 사극에서도 이어진다. 선덕여왕은 어떤 경계선에 위치하다 결국 안전한 한국식 드라마로 돌아간 예가 아닐까? 초기 미실과 덕만의 다른 정치관, 권력관의 경쟁을 보여준 풍부한 내러티브는 한국 사극 답지않다는 후한 평가를 줄수 있었지만, 결국 제작진은 이를 중심으로 끌고 가지 못했다. 그럴 실력과 의지를 갖지 못했으리라. 그들이 시청률의 변동에서 항상 선택한 것은 결국 가장 안전하고 그리고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애정물로의 도피이다. 비담과 선덕여왕의 러브신이라니?
추가2) 한국 엘리트의 미국 수용에 대하여
한국 사람들 특히 한국의 지도층과 주류들은 미국을 좋아한다. 아마도 한구의 지도층과 주류가 미국에 대해 갖는 짝사랑과 집착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미국적 제도, 문화, 그리고 사고방식 그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한국드라마 혹은 제작진들의 그것처럼 편향되어 있고, 제멋대로이다. 한국의 드라마 제작진들이 미드와 헐리우드를 흠모하며, 미국드라마의 외양만 배끼는데 급급한다. 그것이 잘 안될 경우 제작비와 시장의 규모의 차이를 강조하며 애국심을 강조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미국 드라마를 끌고 가는 가장 기본적이며 절대적인 요소라 할 스토리에 대해서, 어쩌면 큰 비용 없이 가능한 부분에 대해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배우려는 노력은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 결과는 스토리가 엉성하거나 엉성하기 그지 없이 미국 드라마와 영화의 외양만 흉내낸 (그러나 그마저도 제작비 차이로 어설픈) 드라마의 양산이다. 아마 아이리스가 대표적이 아닐까? 온갖 미드와 헐리우드 영화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장면은 다 가져다 놓았고, 그 점에서 너무 훌륭해서 한 10분 정도만 본다면 우와 헐리우드랑 한국 드라마랑 이제 차이가 없구나라는 착각을 가지게 되지만, 그 이상의 시간을 넘어서면 도대체 이야기가 진행이 되지 않는다. 얘와 얘는 왜 갑자기 사랑에 빠졌고, 왜 복수를 결심하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야기 곳곳이 텅텅 비어있다. 그냥 "그림만 봐라 좋잖아" 하고 강변하는 듯 하다. 사실 그림은 좋다. 김태희에다 김소연까지 볼 수 있으니.
한국의 지도층은 미국의 많은 제도를 흠모하고 그것을 한국에 가져오기 위해, 주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기를 쓴다. 그러나 정장 그 제도가 작동할 수 있는 기본적 원칙과 조건, 즉 스토리와 맥락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 그렇게 사외이사제를, 혹은 입학사정관 제도, 혹은 주소지 부여 방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또 그러는 중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에서 잘 될리가 없다. 사외이사가, 수학능력, 학부제, 입학사정관이, 길 중심의 주소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과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때 이렇게 외삽된 변화와 개혁은 대체로 그 이전 상태 보다 더 나쁜 것이기 쉽다. 평가의 공정성, 학교 교육의 정상화, 가정배경의 학생성적에의 영향 등의 중요한 기준에서 수능이 학력고사보다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최근 정치권과 미디어에서 논의되는 미국식 대통령 4년 중임제로의 개헌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수정 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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