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5일 수요일

최장집 칼럼 해제 Part 2 - 최장집 프로포절

[전편 줄거리]

Part1은 왜 최장집이 ‘다른’ 얘기를 하는지를 다뤘다. 모두들 “누구냐”에 집중하는 대선 한 가운데서, 그가 선거 ‘이후’를 말하는 것은, 한국 대통령들의 거듭된 실패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통령 ‘개인들’의 실패가 아니라 대통령 ‘제도’의 실패였고, 개성적이기 보다는 구조적 현상이었다. 나아가 제도로서 대통령의 필연적 실패의 동학을 ‘캠프정부’로 요약했다. 그것은 캠프정부-당정간 척력과 분리-무책임정치-정당(정치) 약화와 불신- 다음 캠프정부로 이어지는 악의 순환(vicious circle)이며, 한국정치가 빠져있는 하나의 덫(trap)이었다.

[Part2 시작]

사실 최장집의 이런 묘사와 설명이 그 자체로 새로울 것은 없다. 우리는 사실 다 알고 있으면서 못 본척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방안의 코키리다. 그러나 그것이 코키리인만큼 우리는 이미 충분한 상식화된 해법(conventional wisdom)을 갖느다. 기자나 전문가들이 “이미 답은 다 나와있다. 문제는 ~” 으로 시작되는 내용들이 그것이다. 먼저 대표적인 상식화된 해법을 살펴본다. 그리고 왜 그것이 해법이 되지 못해는지 논의해 본다. 그리고 최장집의 새로운 제안, 프로포절을 검토해 본다.


상식화된 해법은 ‘제도론’과 ‘실천론’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변화의 초점이 대통령이냐 정당이냐에 따라 여러 갈래의 제안들로 나뉜다. 먼저 제도론을 살펴보자. 이는 굉장히 친숙한 것이다. “무엇무엇은 제도 때문이다. 그러니 제도를 바꿔야 한다”로 압축된다. 예컨대 “지역주의는 선거제도 때문이니, 선거제도를 바꾸자” 같은 거다. 대통령과 관련해 보면, 문제의 심각성과 제안된 변화의 크기에 따라 몇 가지 안이 있다. 모두 익숙한 것이다. 먼저 ‘4년중임제’ 주장이다. 현행 ‘단임제’의 임기제한이 책임정치 구현을 방해하니 중임제로 바꾸자는 거다. 단순다수제 방식의 선거방식이 야기하는 대표성 부족을 문제에 주목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결선투표제’ 도입을 주장한다. 대통령제 내장된 위험은 너무 크고 근본적이라 작은 수선으론 어림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의회제(내각제)로 전면적 전환을 주장한다. 대통령에 관한 제도론은 항상 제안에 머물렀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개헌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당에 관한 제도론은 어떤가? 대통령과 달리 정당의 제도개혁은 일상에 가까웠다. 민주화이후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리고 크고 작은 변화들이 제안되었고, 그중 많은 것이 적용됐다. 내용에서도 권력구조, 공천제도, 당원제도, 운영, 정책, 자금 등 사실상 정당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뤄졌다. 최근 민주당 대선후보자 선출에 도입된 ‘오픈(모바일)프라이머리’는 한국 정당 제도변화의 길고 긴 리스트에 끝자락에 추가된 항목이다.

그렇다면 제도론은 왜 해법이 되지 못했나? 먼저 제도론, 종종 제도 ‘만능론’으로 빠지는 접근의 일반적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모든 제도는 각각의 장단점을 갖는다. 즉 완벽한 제도란 없다. 어떤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성과를 가져오는지는, 제도 그 자체보다, 맥락적, 내생적 요인에 크게 좌우된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제도는 수많은 다른 제도들과의 관계속에 위치하면, 그들과의 상보성의 문제를 갖게된다. 또 제도는 누가 운용하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를 낸다. 외국의 좋은 제도를 이식했을 때, 똑같은 모습으로 작동하지도, 기대한 결과를 좀처럼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여러번 경험했다. 정치제도는 아니지만 ‘학부제’나 최근 ‘입학사정관제’가 좋은 예일 것이다. 사실 제도론의 가장 좋은 반박은 한국 ‘정당개혁사’ 그 자체이다. 민주성, 대표성, 참여증진, 민심반영, 효율성, 생산성 등을 내걸고 끊임 없이 당의 제도를 바꿨다. 그러나 얼마나 나아졌나? 개중에서 가장 열심인 당이 바로 통합민주당이었다. ‘정당개혁의 정당’으로 평가할만하다. 그러나 결과는? 오늘 가장 정당의 꼴을 갖추지 못한 당이 민주당 아닌가? 굳이 통합진보당을 들먹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도론의 더 큰 문제는 현실적 차원에 있다. 제도를 바꾸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왜 대통령과 관련한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쉽다. 제도는 제도 내 행위자들의 상호협력과 경쟁을 지도하는 룰이다. 제도의 변화는 게임의 변화, 권력분포의 변화를 의미한다. 누구는 이익을 누구는 손해를 본다. 다시 민주당의 오픈프라이머리를 떠올리면 쉽다. 그래서 제도투쟁은 권력투쟁이며, 많은 갈등과 비용을 동반한다. 그래서 제도변화는 이를 지지하는 다수파를 형성하고 유지할 엄청난 리더십을 요구한다. 조직의 규모가 커질 수록 요구되는 리더십은 더욱 더 커진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다루는 ‘제도로서 대통령의 실패’를 포함해 한국정치의 많은 문제는 우리가 그런 리더십을 갖지 못한다는데 있다. 즉 우리는 뭔가 잘 되지 않아 끊임 없이 제도를 바라보지만, 사실 꼭 필요한 제도변화를 바꿀수 있는 정치/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제도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도가 아닌 실천을 강조하는 해법들은 어떨까? 실천적 해법은 주로 대통령보다는 정당의 변화에 집중했다. 강한 기득권을 가진 대통령이 스스로 변화하기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책임정당론’이다. 이는 최장집의 대표적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대표작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부터 일관되게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정당체제의 협애한 대표성의 문제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한국정당들이 사회의 중요한 균열과 이익들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정당이 그 사회적 기반을 갖지 못했기에, 한국 정당은 사회내 중요한 그룹의 이해와 요구를 잘 집약하지 못하며, 또 이를 정강정책으로 또는 실제 정책으로 실천해내지 못한다는 거다. 그래서 그는 정당 강화의 최선의 (그리고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정당이 사회내 중요한 생산자 집단(예컨대 노동)과 조직적으로 연결될 것을 제안했다. 이런 정당강화론이 비단 최장집 만의 목소리는 아니었고, 또 아카데미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그 문제의식은 그간 정당의 부분적 개혁 또는 전면적 재편 혹은 신당창당에 꾸준히 반영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실천론 역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거다.

실천론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첫째는 어렵다는 거다. 둘째는 지난한 과정을 요한다는 거다. 특히 정당의 사회적 기반과 관련된 변화는 더욱 그렇다. 정당은 크게 ‘이념’, ‘사회적 기반’, ‘조직’ 세 가지의 견지에서 변화 할 수 있다. 이념과 조직은 정당 엘리트들만의 결정으로 변화가 가능하지만 사회적 기반은 그렇지 않다. 예를들어 노동과 연대를 가정해보자. 당연히 그것은 정당 내 다른 리더들의 동의 뿐 아니라 파트너인 노조의 신뢰와 협력을 이끌어야 한다. 벌써 쉬운일이 아니다. 또 어렵게 성공하더라도 정당과 노조의 상층조직 및 리더들만의 협약은 기대한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할지 모른다. 정당처럼 노조 역시 조합원 대중에 뿌리를 갖지 못한 채, 허공에 떠있다면, 노-정간 지도부 협상은 단순히 엘리트들만의 정치적 이해교환 이상이기 어렵다. 그래서 그것은 오랜 시간 노력을 들인 시험과 실패의 반복, 그 결과로서 작은 성공모델과 경험의 누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엄청난 정치적 리더십의 함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민주화이후 정당개혁은 정당 리더십의 권한과 능력 그리고 물리적 임기를 가급적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최근년 최장집이 부쩍 리더십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머물던 곳이다. 그런데 이 막다른 골목에 숨겨진 탈출구를 이번 최장집 칼럼이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번 칼럼에 ‘새로운’ 것이 있다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제도로서 대통령 실패의 악순환, 무책임 정치의 함정에서 벗어날 새로운 방법 내지 전략의 단초를 드러내고 있다는 거다. 그렇다고 그가 고대 민주주의 문헌을 탐색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마법과 같은 제도를 발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제도 그 자체보다, 주어진 제도적 틀 속에서, 행위자들에 의해 펼쳐지는 ‘가능의 예술’을 중시하는 “정치학자”다. 그가 제시한 탈출구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아이디어다. 그것을 그는 단지 오늘의 정치맥락에 정교하게 위치시켰을 뿐이다. 이를 “최장집 프로포절”이라 불러보자. 그것은 차기 대통령의 ‘의회제적 정부운영’으로 요약된다. 즉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을 통해, 집권당을 정부구성과 운영의 주체로 세우고, 현재의 ‘캠프정부’를 ‘정당정부’로 바꿔내자는 것이다.

칼럼을 통해 최장집 프로포절의 두 가지 특성 내지 원칙을 추출해볼 수 있다.

첫째, 변화의 출발점은 대통령이다. 주지하다시피 최장집은 대표적 정당론자다. 그는 그래서 항상 정당의 변화 또는 정당의 충격이 정치체제와 한국 사회경제의 개선과 발전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문제의식을 집중해 왔다. 그런 그가 이번 칼럼을 통해, 처음으로 변화의 출발점으로 대통령과 그로부터 나올 수 있는 행위에 주목한 것이다. 과거 그가 ‘제왕적’으로 묘사되는 가공할 권력을 가진 ‘임기 초반’ 대통령이 스스로 변하기는 지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을 했다면, 그런 대통령의 가공할 권력과 의지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현재와 같은 나쁜 악순환에서 한국 정치가 빠져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게 된 듯 하다. 게다가 한국의 헌법은 총리직의 존재와 명목상의 권한들에서 보듯 대통령제와 의회제적 요소가 혼합된 것이다. 차기 신임 대통령의 의지만 있다면, 능력과 제도적 토대는 마련돼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제도가 아닌 실천이다. 최장집 프로포절은 개헌론을 담고 있지 않다. 나아가 권력구조나 제도의 중요한 변화도 요구하지 않는다. 즉 제도론이 아니라 다시 실천론이다. 즉 헌법과 중요한 법률의 변화 없이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으로 ‘의회제적’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임 대통령이 최초의 정부구성과 운영의 권한을 출신정당(집권당)에 넘겨 줘, 정당정부를 작동시켜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프로포절의 요체는 이른바 “율리시즈 협약”(ulysses pact)으로 불리는 것이다. 율리시즈 협약은 “사람을 현혹해 바다로 뛰어들게 만드는 바다 요정 사이렌 에 맞서 율리시즈가 스스로를 배의 돛에 결박하고 항해에 나선 이야기”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장기적/근본적 이해와 안녕을 위한 단기적/부분적인 자기구속적 제약(self-binding restraint)인 것이다. 율리시즈가 스스로 미쳐버려 바다에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을 포박한 것처럼, 신임 대통령이 개인과 국가 공동체 모두에 치명적인 실패를 가져올 캠프정부 운영의 욕구를 버리고, 정부구성과 운영의 권한을 집권당에 넘기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속한다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원칙을 요체로 하는 프로포절은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할까? 거칠게 스케치 해보자 (단, 아래 내용은 실제 법률, 명령, 규칙, 준칙 등을 전혀 검토하지 않은 말 그대로 스케치다)

먼저 정부출범이전이다. (1) 총리는 당에서 결정된다. 사실상 총리 선출권을 정당이 갖는다. 적어도 대통령의 최종비토를 전제로, 총리선정의 이니셔티브를 당이 갖는다. 그래서 대통령에 이어 당 서열 2위인 당 대표가 총리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가급적 정해진 임기(1년)는 보장된다. (2) 정당이 새정부 인수과정을 관장한다. 차기 총리내정자가 당연직 인수위원장이 된다. 그는 대통령 당선자와의 협의를 통해, 당의 주요 의원들을 주요 분과(부처) 위원장을 임명한다. (선거로 할 수도 있다). 상당한 수의 국회의원, 전문위원, 당료 등도 희망과 명령에 따라 분과로 배치된다. 인수위원에서 증가된 정당 몫만큼 기존 관료 출신 쿼터는 줄인다.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를 입당을 전제로 영입한다. (3)정부인수위원회는 당의 선거 정강정책을 토대로, 출범 전까지 다음정부 부처별 국정과제와 주요정책들을 입안한다. 그리고 부처별 실제 정부 참여 인사의 명단을 확정한다. 그리고 정부가 출범한다. (4)인수위원장은 총리로, 각 분과 위원장은 장관으로, 또 분과 팀원들을 각 부처의 컨트롤 타워로 ‘조직적으로’ 들어가 정부를 인수한다. (5) 정부의 일상적 운영은 이렇게 구성된, 총리, 장관들을 주축으로 이뤄진다. (6)대통령은 총리를 통해 전반적 국정관리와 조율, 국방과 외교, 그리고 대통령이 선정한 중대/장기 과제에 집중한다.

대통령의 율리시즈 협약에 바탕한, 의회제적 정부운영은 어떤 연쇄적 영향을 만들수 있을까? 그것은 과연 정당정부의 작동으로 이어져, 대통령의 필연적 실패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나? 긍정적 견지에서 한번 상상해보자.

가장 먼저 정당의 변화를 이끈다. 정당이 실제로 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하기에, 정당의 위상과 역할은 획기적으로 강화된다. 정치의 주무대는 더 이상 청와대나 정부부처, 그리고 인근한 고급식당들이 아니다. 그것은 집권당 당사와 의사당으로 빠르게 옮겨 올 것이다. 국정을 이끄는 주인공은 더 이상 대통령 측근 정치인, 청와대 수석관 비서관, 관료출신 또는 외부영입 장관들이 아니다. 당에서 선출된 총리와 장관들(그래서 정치인들)과 정당에서 파견된 그들의 보좌팀이 될 것이다. 또 국정참여와 운영을 통해서, 당 소속 정치인들과 참모들의 실력과 능력은 크게 증가 될 것이다. 이는 다시 다음 선거, 정부 준비하는데 있어 자산이 될 것이다.

둘째. 수많은 공직희망자 그리고 공직 관계자들의 인식과 행태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지금처럼 특정 정치인과 캠프에 ‘올인식’ 정치입문의 유인은 크게 줄어 들것이다. 정부 출범후 관료와 정치인들의 극심한 줄대기 관행 역시 사라질 것이다. 이당, 저당, 이 캠프, 저 캠프를 떠도는 정치낭인들의 기회주의적 행태는 줄어들것이다. 공무원을 제외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빨리 정당원이 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증대시킬 것이다. 좋은 뜻을 품은 젊은이들은 일찍 정당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셋째. 대통령의 결단에서 촉발된 변화는 대통령 자신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권한과 권력을 제한 했기에, 과거 대통령들과 같은 ‘보여주기식’ 메가 프로젝트를 추진할 유인과 능력이 크게 제한될 것이다. 물론 변화된 상황에서도 그는 중차대한 국가과제들을 수행할 권한을 갖지만, 그 역시도 총리를 비롯한 정당정부 리더들과 협의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선거에 일상적 국민적 평가에 영향받는 정당리더들은 예를들어 ‘4대강사업’ 같은 국민의 반대가 큰, 그러나 사업의 추진목표와 효과는 의심스러운 메가프로젝트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넷째. 야당도 변화될 것이다. 집권당이 의회제적으로 운영되는데 야당이 이에 상응하는 변모를 보이지 않기란 어렵다. 과거 유럽에서 노동자 정당의 조직변화를 보수정당들이 모방했듯이, 야당들은 집권당의 조직구성과 운영을 모방하게 될 것이다. 그들 역시 예비내각(shadow cabinet)을 구성할 것이며, 여당의 정책대안과 프로그램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반대를 조직할 것이다.

다섯째, 전반적 정치문화도 변화도리 것이다. 정당이 곧 정부이기 때문에, 정부와 의회간 교감의 수준이 크게 높아지며 불필요한 갈등은 사라질 것이다. 의사당에서 경쟁은 집권당의 복지장관과 야당의 예비복지장관이 치열하게 논쟁하는 의회제 형태로 빠르게 변모할 것이다. 물리적 폭력과 꼼수는 사라지고 논리와 설득이 평가될 것이다.

이제 정리해 보자. 현재와 같은 캠프정부, 그리고 무책임정치는 결국 대통령 개인과 한국 정치공동체 모두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필연에 가까운 실패, 대통령 누구도 예외이기 어렵다. 대통령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과 권한, 대통령으로부터 분리된 집권당과, 정부를 견제하는데 실패하는 야당, 한국 대통령의 실패는 구조적이다. 대통령 개인이 아무리 삼가하고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실패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캠프에 있다면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저들을 무려 5년동안 통제할 수 있겠는가? 이는 대통령 만의 손실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손실이며, 대통령만의 불행이 아니라 국민전체의 불행이다.

변화는 대통령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 방법은 율리시즈 협약이다. 즉 자신과 공동체 예견된 실패를 막기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권한을 정당정부에 넘겨주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제약하는 것이다. 그래서 견제와 균형의 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 대통령 자신과 국가 공동체의 이해와 안녕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는 개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개헌에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개헌논의만 하느라 발생하는 사회적 논란과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는다. 그러나 상응하는 제도 변화 없이 최고 지도자의 결단과 의지에 맡겨진 ‘좋은’ 실천을 결국 한계에 봉착한다. 그 전에 경험에 바탕해 상응하는 형식적 제도변화를 이뤄내야 한다.

문제는 결국 다음 대통령이 이것을 하겠냐는 것이다. 3부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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