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3일 고시유보 어떻게 볼 것인가?
1. 유화국면의 도래
6월 3일 정부는 그간 적나의 경찰 물리력과 보수신문의 이데올로기적 보호망에 의거해 시민 절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18일 타결된 미국산쇠고기 협상 고시를 강행하려는 기존의 강경기조에서 한발 후퇴하여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관보게재)의 유보를 발표하였다. 이는 전국민적 항쟁으로 치닫는 시민들의 분노와 항의에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일단 굴복한 것이며, 시민들의 작은 승리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MB정권하의 100일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이것이 현 집권세력들의 현 사태에 대해 진정한 반성, 성찰 그리고 근본적 대책마련이라는 낙관적 시나리오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시중의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는 낙관적 시나리오 보다는 일단 관보게재 유보를 통해 한편으론 날로 격화되는 저항을 진정시키고 다른 한편으론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여론무마, 국면전환, 전통적 지지층 결집용 대책들을 쏟아냄으로써 국면반전을 꾀하는 즉 기만술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또한 바람직할 것이다. 필자는 6월 4일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상황을 일종의 ‘유화국면’으로 이해코자 한다.
아마도 6월4일부터 전개될 유화국면은 실질적인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두 수준으로 구성될 것이다. 전자의 수준에선 부분적 재협상(이를테면 30개월 수입의 한시유예), 중폭이상의 인적쇄신(대통령실장 교체 포함 등), 지지층 결집(친박인사 복당), 대통령의 대국민사과 등이 중요한 내용을 구성할 것이다. 후자의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선 한동안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던 보수신문들이 심기일전해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다. 먼저 정부가 굴복했으니 “이젠 지켜보자”는 식의 “시민자제론”을 확산시키고, 재협상요구가 미국의 심기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우려와 향후 재협상 역시 국민들의 눈높이에는 못 미칠 것이라는 예견하고 오히려 국민의 요구를 낮출 필요성을 반영하는 재협상-한미FTA무산-대미무역분쟁-한미동맹악화-국제신인도하락-경제파탄으로 이어지는 논리의 사슬을 주축으로 하는 “공포의 동원”이 이뤄질 것이다. 아울러 지난국면에서 자신들의 힘을 무력화시킨 핵심요인이었던 일반시민과 전통적 조직운동세력의 연대를 가르는 “분리전술” 등도 쉽게 예상된다.
이 글은 이런 특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유화국면에서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시민들의 혼란스러움과 야당들이 우왕좌왕으로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에게 오히려 정국주도권을 내주는 것을 막고자하는 작은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2. 고시유보의 두 가지 특징과 질문
6월3일 고시개제유보는 유화국면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3일 정부 액션의 형식과 내용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농림수산식품부가 한나라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관보 게재(고시) 유보를 행정안전부에 요청”한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그것은 굳이 대통령이 아닌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의 건의를 정부가 수용한 모양새를 취했다는 점이다. 둘째 그 내용이 고시철회 혹은 재협상선언이 아니라 고시, 보다 정확히 사실상 발표된 고시의 관보 게재-의 유보라는 것이다. 이런 형식과 내용과 관련해 두 가지가 질문될 수 있다. 하나는 한나라당의 뒤늦은 소란스러움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이번 발표가 내용적으로 시민들의 요구에 상응하는 실질적 진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이다.
(1) 한나라당의 뒤늦은 소란
먼저 형식상의 특징은 이번 정부의 액션의 진의를 엿볼 수 있는 작은 단서이다. 인상적인 것은 20%라는 사실상 최저수준으로 곤두박질한 대통령지지도와 그것이 야기한 통치력의 상당한 훼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지시 혹은 대국민 담화의 형식이 아니라 굳이 한나라당의 건의를 수용한 모양새를 취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을 사태해결의 “발의자”로 만들려는 시도는 5월 3일 여러 수준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이날 오전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대통령 회동을 통한 정국 수습방안 건의를 필두로 홍준표 원내대표의 “국민이 성났을 때는 항복해야”라는 발언, 그리고 한나라당18대 첫 의원총회에서 쏟아져 나온 정부에 대한 성토와 질타로 이어졌다.
이는 그 직전까지의 한나라당의 행태와 크게 대비된다. 사실 한나라당은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달아온 현 시점까지 어떤 의미 있는 반대의 목소리도 낸 적이 없다. 지난 5월19일 강재섭 대표가 당에서는 국정쇄신안을 건의하겠다 허풍치곤, 정작 당일 회동에선 “밥만 먹고” 오히려 대통령에 누를 끼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돌아왔다. 지난 쇠고기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의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협상결과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표출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부안을 대변하는데 급급했다. 특히 안상수, 이한구, 심재철 등 당시 지도부는 오히려 정부보다 더욱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내어 사태를 격화시킨 당사자들이다. 이와 관련해 소위 당내 비주류인 친박(朴)세력 역시 큰 차이가 없다. ‘대운하’ 이슈와 달리, 쇠고기 이슈에서 박근혜 의원을 비롯한 친박의원 그 누구도 책임 있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최근 인터넷에서 박근혜의원에게 붙여진 ”복당녀“란 별명은 시민들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외면한 채 자신들만의 정치이슈, 즉 복당문제에만 골몰한 그들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어쨌든 이랬든 그들이 돌연히 재협상을 주장하고 정부를 강하게 성토하고 나섰다. 이 같은 뒤늦은 자성과 대정부 비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일차적으로 그들 역시 제한적인 수준에서나마 민심수렴창구들을 가진 대중정치인이기에, 최근 전개되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게다가 청와대 앞까지 밀려든 시위대의 정권퇴진요구, 경찰 폭력진압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확산, 보수언론의 논조변화 등 역시 그들의 사태인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과 사태를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근원적 대책에 나서게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즉 심각성을 인식하더라도 얼마든지 엉뚱한 해법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문제가 관련된다. 첫째 이명박 정부는 곧 한나라당 정부이다. 즉 당이든 청이든 그 구성원들은 이념적으로 대체로 동질적이며 비슷한 세계관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당-청간의 사태에 대한 인식의 갭이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은 당청과 시민들 간의 갭에 비하면 무의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두 사건은 이럴 가능성에 설득력을 더한다. 많은 서민대중들이 연일 쇠고기문제로 아스팔트 위에서 전의경들과 밤새 대치하는 그 와중에, 서초구 출신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은 밤잠을 설쳐가며 “문고리를 부여잡아” 18대 국회 첫 법안 발의의 영애를 차지했다. 문제는 그 법안이 전체인구의 3%에 혜택을 주는 “종부세감세안”이었다는 데 있다. 세수부족을 이유로 유류세감면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당지도부의 사전적 만류 혹은 사후적 문제제기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현 사태에 대한 당의 평균인식의 수준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하겠다. 다른 사례는 며칠 전 서울 강동의 김충환 의원이 보궐선거 지원 유세도중 쇠고기 문제에 항의하는 시민과 충돌한 사건이다. 김의원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 할지라도, 최근 격화된 시민들의 분노와 불만을 김의원이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론 충분하다. 요컨대 설령 당이 청에 비해 조금 진전된 사태인식을 갖는다 하더라고 그 차이는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다.
둘째 대통령제가 만들어낸 제도효과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설령 한나라당에서 대통령과 확연히 다른 의사를 가진 일부 의원들이 존재할지라도, 유의미한 반대를 공개적으로 하기란 현행 대통령제하에서 난망하다. 이는 지난 총선 당시 대통령 형인 이상득 불출마를 골자로 하는 집단항명이 단 몇시간만에 흐지부지 된 것에서 잘 드러났다. 또한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도 대통령의 문제 있는 결정들에 대해 당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지도부들이 집권기간 내내 반대 한번 해보지 못하고 함께 몰락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이 문제는 이명박 정부만의 현상이기 보다는 대통령제와 그 권력작동메커니즘의 제도효과가 만들어 낸 구조적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이상의 논의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록 그 모양새가 한나라당의 발의의 형태를 취했으나, 그것이 청와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한나라당의 상황인식과 타개노력의 소산이기 보다는 선거를 앞둔 여론무마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다시 이는 이번 유화국면이 낙관적 시나리오로 흐르기 보다는 기만술 따라서 더 큰 파국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당청간의 이 같은 역할 분담과 타협을 가능케 한 것은 결국 코앞에 다가온 6.4 재보선이다. 이는 지난 대선이후 지금까지 집권세력이 대운하 정책을 다뤄온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정리하면, 한나라당의 발의라는 형식을 갖춘 6월3일 관보게제 유보는 집권세력 특히 한나라당을 주축으로 사회적, 시민적 요구를 정부에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적극적, 의미 있는 행위자로 나서는 신호로 볼 근거는 현재로선 없다. 따라서 고시유보가 겉으로는 마치 한나라당이 국민들에 굴복한듯하며, 그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대변하겠다며 와글와글 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선거를 앞둔 한나라당의 다급함 -그것도 대통령의 사전 양해하에 이뤄진-을 반영하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2) 사태개선 가능성의 희박함과 한국시민의 불행
낙관적 시나리오를 기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두 번째 이유는 발표된 내용이다. 그것은 고시철회 혹은 재협상 선언이 아니라 관보게재 유보였다. 이는 다시 한나라당의 요구를 받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미국에 30개월 이상 수입금지를 요청하겠다는 발표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에 의해 받아들여질지도 미지수이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을 끌다 현재 국민들의 요구수준에는 터무니없이 못 미치는 미세한 조정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아마 지난번 고시강행 직전의 “추가협의” 때의 기만의 재판일 것이다. 사실 “고시강행”은 MB정부의 확고한 그리고 유일한 선택지로 판단된다. 지난달 말 이미 여론이 격화될 때로 격화된 상황에서도 정부는 대통령의 외유에 맞춰 이미 내부적으로 경질이 확정된 정운천 장관을 통해 고시를 강행했다. 이는 협상과정에서조차 별다른 실권을 갖지 못했던 주무부처 장관 정운천에게 마지막까지 악역을 맡긴 뒤 해임함으로써 정국을 반전시키려도 의도로 밖에 볼수 없다. 그렇다면 이번 액션은 진정 뭔가 다른 선택지를 집권세력이 모색하고 있는건가? 결론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보인다.
만약 정말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하려” 했다며, 그리고 사태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다면, 굳이 개제유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기보다 고시철회와 전면재협상을 선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간의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MB정부의 행태로 보아 희박한 시나리오가 아닐수 없다. 그럴 정부였다면, 애초에 그런 협상결과 만들지도,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악화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상황은 처음 협상보다 더욱 좋지 않다. 왜냐면 재협상이 의미하는 것은 애초의 협상이 졸속이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며, 국가간 협상을 뒤엎는다는 외교적 부담을 떠안아야 하고, 대운하와 함께 한나라당과 MB가 알고있는 유이한 경제정책인 한미 FTA 조기타결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며, 미국의 심기를 상당히 불편하게 함으로써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적 터부라 할 수 있는 한미동맹의 훼손까지를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 모두는 그들에겐 자신들의 존재이유에 대한 자기부정에 가까운 여겨질 것이다.
아마도 실질적 재협상이 전개되고 상당한 성과를 가져오는 유일한 경우의 수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MB정부가 아닌 미국에서 특히, 미국농축산업계의 전략과 이해, 인식이 변화로부터 가능할 것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장사꾼인 그들로서도 미국쇠고기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이 그처럼 격렬히 전개되고 또 장기화되어 연일 외신을 장식하는 것은, 추후 일본, 중국 등 협상이 임박한 타국과의 협상력에도, 또한 전반적인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신뢰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대통령, 국회의원 등 자신들의 대표가 아니라 미국축산업자들이 단기적 이익을 중시하느냐, 장기적 이익을 도모하느냐에 그네들의 이익과 건강이 달려있다는 것이 한국 시민들의 가장 큰 불행이라 할 것이다.
3. 후기
사실 이글은 6월3일 고시유보 발표이후 시작되었다. 글의 완성이 늦춰지는 동안 전개된 사태는 사실 이글의 논의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글은 고시유보를 신호탄으로 정부의 정교한 디자인에 의한 유화국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이에따라 발생할지 모르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혼란과 어려움을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로선 두 가지 모두 기우에 가까웠다. 시민들은 고시유보가 또 다른 기만과 사기라는 것을 단박에 간파해버렸고, 정부 역시 정교하게 디자인된 일련의 유화책들을 하나씩 풀어내기 보다는, 단기적 여론무마와 임기응변식 대처에 급급한 걸로 보인다. 즉 필자는 시민들의 역량과 수준을 과소평가한 반면에, 집권세력의 역량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글의 중요한 의도중 하나를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모든 문제의 근원을 지나치게 MB개인으로 집중함으로서 상대적으로 시민들의 직접적 분노에 빗겨 서있는 사태악화의 핵심 원인제공자인 한나라당을 예의주시해야한다는 것과, 또 그럴때만이 언제든 향후 한나라당이 마치 사태해결의 주도자인양 등장하는 상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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