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4일 금요일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서평] 현대민주주의,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작성일: 2009.6.21>

리뷰 - 절반의 인민주권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역, 후마니타스, 2008)


현대 민주주의,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샤츠슈나이더의 1960년작 『절반의 인민주권』은 매우 짧은 책이지만, 누구나 손꼽는 정치학의 고전이다. 그러나 이 책을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갈등과 정치, 이익집단과 정당, 균열과 정당체제, 인민주권과 민주주의 등 정치학의 핵심 주제들을 망라하고 있어서다. 따라서 본 서평은 『절반의 인민주권』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밝히는데 우선 집중한다. 그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저자가 서문 첫 문장에서 밝힌, 정치조직에 관한 이론을 수립하려는 목적의 책이 왜 『절반의 인민주권』이란 제목으로 나왔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당시 미국 민주주의를 ‘이론의 위기’로 진단하고, 인민의 주권을 활용하는 방식의 변화를 역설한 저자의 진단과 해법이 이 제목에 축약되어 있으며,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해 매우 큰 시사를 갖기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 민주주의가 이론의 위기인 것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이전시대에 기원을 두고, 또 민주주의를 보지도 못했던 철학자들에 의해 정식화된 민주주의의 고전적 관념이 여전히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정작 실제 실천되는 민주주의의 이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관념은 ‘인민에 의한 통치’로 요약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 연원한 이 개념은 왕(1인) 또는 귀족(소수)이 수행한 역할을 대체하는 인민(다수)을 상정한다. 문제는 이런 비유가 다수의 인민이 왕과 귀족이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는 관념을 만든다는데 있다. 공적사안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이나 마을회관에 운집해, 심의하고 결정에 도달하는 목가적, 낭만적인 이념형이 그려지고, 나아가 직접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오해를 강화시킨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이런 관념에서 한 정치체제의 민주주의의 수준은 결국 대중의 참여정도와 지식의 크기의 함수로 환치된다는 점이다. 이는 왜 그간의 무수한 논의가 대중의 무관심과 무지(無知)에 대한 기술적, 규범적 판단에 허비되는지를, 그러고도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냉소만을 유포시키고, 아예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까닭을 설명한다.
 
인민의 역할에 대한 고전적 관념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단호하다. 그는 그것이 일종의 ‘망상’에 가까운 것이며, 민주주의 이론을 과도하게 적용한 ‘우스꽝스러운 결과’이며 결국 시민들이 하고 있는 것, 또는 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패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정의” 하는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 하는 민주주의의 정의를 시도한다.

그렇다면 현대적 민주주의, 그 속에서 시민의 ,역할은 어떻게 정의되나?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절반(semi-)의 인민주권‘으로 압축된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그것은 접두어 ‘semi-’의 두 가지 사전적 의미, 즉 준(準)과 절반(半)의 의미를 모두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먼저 그것은 중요한 속성을 공유하지만 질적으로 다른 준(準) 주권이다. 왜냐면 주권의 소재가 “1인”에서 “다수”로 변화는 것은 단순히 권력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이 갖는 원래의 최고권·절대권의 관념은 판단의 최종단계의 소재(所在)를 의미하는 ‘궁극적(ultimate)' 권력으로 전환된다. 이는 우리가 현실에서 실천하는 인민주권이 왕이 행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즉 통치할 대표의 선출이나 현정부의 신임에 대한 판단이란 모습을 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런 의미의 전환이 주권이 갖는 본질적 가치의 훼손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면 인민의 권력은 결정의 ‘수’가 아니라 그것이 내리는 결정의 ‘중요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완전치는 않을지라도 충분한 것“ 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어떤 조건에서는 양적으로 반토막난 주권이 되기도 하다. 이는 현실의 정치가 갈등의 체제라는 성격과 관련되는데, 왜냐면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은 갈등의 영향을 받아 정치에 관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정치체제에서 어떤 갈등이 어떻게 다뤄지냐의 문제는 대중이 아니라, 정치조직(대표적으로 정당)과 그 리더들의 관장사항이라는 데 있다. 즉 현실의 민주주의는 “경쟁하는 정치조직들과 리더들이 만들어 낸 대안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보통의 시민이 선택하는 정치체제”인 것이다. 따라서 정당대안들이 경쟁적이지 않거나, 제출된 대안이 사회의 갈등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할 경우, 오로지 그 가운데서 판단해야 하는 인민의 궁극적 권력의 가치는 절반이 된다.

 ‘준-절반의 인민주권‘이라는 일반대중의 권력과 한계가 동시에 고려된 새로운 관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통치” 보다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통치”에 가깝다. 달리말해, 민주주의는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일종의 협력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이해할 때, 결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과제는 대중에게 불가능한 것을 강요함으로서 그 힘을 엉뚱하게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준(準) 주권의 한계 속에서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정치체제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선거를 중요하게 만들고, 투표를 가치 있게 만드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갈등, 경쟁, 조직, 리더십, 책임성이 현대 민주정치의 키워드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박성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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