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31일 월요일

[페이퍼] 멍청아 문제는 민주주의야

최장집 교수님 [민주주의론] 2007년 학기말 페이퍼


문제는 민주주의야! 이 멍청아 (It's Democracy, stupid)


박성진 (고려대 정외과 박사과정)

1. 2007년 대선에 관한 3가지 사실들

민주파의 희귀한 패배

결국 2007년 18대 대선은 이념적 견지에서 보수파, 경제적 기반의 측면에서 산업화 세력의 소위 ‘진보개혁세력’으로부터의 10년만의 정권탈환으로 종결 되었다. 기실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은 2002년 대선이라는 극히 예외적 경험의 학습의 결과로서 ‘네거티브 한방’과 ‘후보단일화의 무한 시너지효과’에 기초해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빠져 있던 일부 세력을 제외한다면 전 국민 누구나 알고 있던 것을 재확인 한 것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 놀라운 것이 될 수 없다. 정작 놀라운 것은 한나라당의 사실상 과반에 가까운 승리와 함께 그 보다 더 오른쪽을 표방한 이회창의 선전과 대조를 이루는 대통합민주신당, 문국현과 민노당의 소위 민주-진보 블록의 처참한 성적이 만들어 낸 일방의 압도적 승리(landslide)의 크기이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유례없는 보수블록의 압승(landslide)는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 민주화 이후 형성되었던 진보, 보수 간의 절묘한 균형으로 요약될 수 있는 한국 선거시장(electoral market)의 유권자 편성(alignment) 구조에 큰 동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성격과 원인이 무엇인가일 것이다. 특히 이번 대선결과는 지난 2006년 지방선거 결과를 재확인 한 것이라는 점은 무언가 한국 유권자의 집합적 지지패턴의 심대한 변화(realignment)가 진행 중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구조적 변화가 이념적 재정렬 인지, 혹은 대안부재가 만들어 낸 일시적 ‘동요’(turmoil)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고 추후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별개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번 압승이 한국 유권자들의 반(反) 민주주의 정향의 생성과 확산의 반영일지 모른다는 우려이다. 요컨대 이번 대선은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온 이른바 열망-실망의 싸이클의 종결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속된 민주정부의 부패, 무능과 노무현 정부의 결정적인 활약에 힘입어 한국 유권자들이 ‘민주파’라는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반대가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것으로 변한 것은 아닐까? 이번 대선압승은 어쩌면 유권자에 의한 그들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유보 즉 신(新) ‘유신’선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둘째, 이번 대선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일찍이 예견된 재앙적 패배와 여러 차례 보궐선거 등을 통해 감지된 민심의 ‘대이반’이 왜 집권 ‘민주파’들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어떤 의미 있는 반전의 기회도 만들지 못한 채 선진 민주정치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패배를 사실상 방관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 관해 무엇보다 설명되어야 할 점은 한나라당의 대승(大勝)이 아닌 민주파의 대패(大敗)이며, 이를 만들어 낸 민주파의 무능력과 무기력이다. 강권통치에 맞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성공적인 민주주의 이행을 가능케 한 것으로 평가되는 한국 민주파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최악의 대선: 정당 없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이번 대선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선거 전, 선거기간, 선거 후의 전 과정을 통틀어 이번 대선은 ‘최악의 대선’이었다. 먼저 각 당이 자신들이 본선에 내세울 후보를 선정하는 선거 전 과정은 어느 당 할 것 없이 비정상적이었다. 사실상 정당 자체가 오로지 대선 후보경선을 치루고자 만들어진 대통합신당의 극단적 사례를 논외로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가장 ‘정상’적이었던 한나라당의 문제 역시 적지 않다. 경선을 전후로 당내 유력 주자들의 사실상의 경선불복이 발생 하였으며, 내부자들조차 경선 후 당의 존립을 의심 할 정도로 당내 분파 간 갈등은 첨예했다. 문제는 갈등의 강도가 아니라 그것이 주로 게임의 룰을 둘러싸고 일어났다는데 있다. 게임의 룰 그 자체가 갈등대상이 되는 현실은 한국의 공직후보 선정과정의 수준을 잘 드러낸다. 일반 국민들을 광범하게 포괄하는 투표인단과 나아가 미디어의 여론조사 결과에 좌우된 한국의 주요 정당들의 경선(primary)은 어느 당을 막론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경선이 최선의 후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님을 유감없이 예증 하였다(Dahl 1970). 선거의 기능이 무엇보다 공직(public office)을 누군가로 채우는 것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누군가를 결정하는 것과 함께 공직에 부여된 권한과 임무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과 방향에 대해 전반적인 위임(mandate)의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BBK로 시작해서 끝난 선거로 인해, 각 후보들(정당들)의 주요 정책들은 물론, 어쩌면 대략적인 국정운영의 방향조차도 진지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예컨대 지난 대선시기, 노무현의 ‘수도이전’ 공약은 선거과정에서 끊임없이 강조되었고 또 상대당의 비판과 국민들의 검토를 거쳤다는 점에서, 대선결과는 ‘수도이전’ 공약에 대한 승인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과연 우리는 이번 대선에서 국민들이 이명박의 대표적 공약인 경부운하를 승인, 위임하였다 말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선거결과 역시 비정상적이다. 파당적 관점을 떠나서 유력 후보가 선거직전 제기된 특검의 기소대상이라는 점은, 앞으로 이것이 어떻게 해소될 것인가를 별개로, 이번 대선의 최종결과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를 어렵게 한다. 제대로 된 대선이었다면 상식적 견지에서 국민의 절반 이상으로부터 의혹을 받는 후보가 당선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좋은 정당과 경선을 갖추었다면 본선 이전에 그 정당의 대선후보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나아가 좋은 민주주의였다면 선거 이전 일상적 시기에 사법부의 독립적 검토에 의해 해당문제는 선거 이전에 해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 관찰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에 압도당해 이들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문제를 포착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이번 대선이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정당의 부재’이다. ‘대통합신당’, ‘이회창과 문국현’, ‘국민참여 선거인단’,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선정’ 등은 모두 한국 대선에서 정당의 존재감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키워드들이라 할 수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 핵심적 수단이자 한 국가의 민주주의 건강함의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적어도 이번 대선만을 두고 볼 때, 한국 민주주의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논평자의 2002년의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생각한다’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며, 아니 그 시점보다 더 나빠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더욱 나빠진 정당(체제)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문제에 대한 지배적 접근: 경제 중심적 설명

민주정부 수립 10년만의 보수파의 압승이라는 현상적 결과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필자가 ‘경제중심적 접근’으로 부르고자 하는 이번 선거에 대한 지배적 해석은 전문가들과 범부(凡夫)의 것 간의 큰 차이가 없으며 그 합의수준도 대단히 높다. 그러나 ‘회고적 경제투표’라는 전문가들의 설명보다 민생(民生)파탄에 대한 심판이라는 범부의 표현이 사실 더 정확하다. 요컨대, 이런 설명은 1992년 클린턴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슬로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Stupid, it's economy!)를 연상시킨다. 경제적 요인에 주목하는 이 접근은 보수파의 압승(landslide)은 회고적 견지에서 ‘경제’에 무능한 ‘민주파’에 심판과 전망적 차원에서 대기업 CEO 출신 후보의 경제회복 능력에 대한 기대의 결합이 만들어 낸 것으로 이해한다.

너무나 자명해 보이고 시중의 여론과도 일치하는 이 같은 진단에 이견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필자는 ‘문제는 경제야’식의 문제정의는 표층적 징후에 지나치게 주목함으로써 그 근원을 가린다는 점에서 사태의 절반 밖에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점이 지적 될 수 있다. 경제적 실패는 정치적 실패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대개의 경우 경제적 실패는 독자적 변인이기보다는 정치의 실패의 결과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절반의 문제정의는 잘못된 처방을 만들어 낸다. 메디슨이 말했듯이 잘못된 처방과 치료는 오히려 원래 질병 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문제가 비록 경제에서 드러났더라도 깊은 병원(病原)은 민주주의에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치료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경제야’ 식의 문제정의는 일정한 암묵적 가정과 논리를 갖는다. 경제와 정치 또는 시장과 민주주의가 각각 분리된 독자적 영역에 존재하며 각각 시장논리 또는 민주주의라는 다른 원리에 지도되어야 한다는 가정이 그것이다(최장집, 2007, 85). 이런 가정은 종종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양립불가능(incompatible) 하며, 어느 일방의 희생시킴으로서만 다른 것을 개선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로 연장된다. 이 접근에는 정치적 색깔에 따라 두 가지 변종이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 과잉론’이며, 다른 하나는 ‘실질적 민주주의론’으로 이름 붙일 수 있다. 전자가 현실에서 지속적 경제발전을 위해 과잉된 민주주의를 경계한다면, 후자는 시장의 맹위에 무기력하기만 한 ‘절차적’ 민주주의에 불만을 갖는다. 따라서 그들은 절차적 수준에 머물렀던 정치민주화에서 사회경제적 영역으로의 경제민주화로 전진을 요구한다. 그 지향, 수단에서 크게 다르지만 두 관점 모두 문제가 경제에 있으며,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글의 주요한 문제의식은 유례없는 보수파의 압승이라는 결과, 이를 만들어낸 과정으로서의 최악의 대선, 이를 진단하고 설명하는 경제 중심적 접근이 모두 밀접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문제의 다른 측면을 반영한 다는 것이다.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이다. 예컨대, 보수파 압승이라는 대선결과는 ‘민주파’의 민주주의의 이해와 실천에서의 무능과 한국 유권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과 유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문제이다. ‘최악의 대선’ 과정은 ‘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결과에 다름 아니며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결핍(deficiency)에 다름 아니다. 마지막으로 경제가 압도하는 지배적 접근이 원래 질병보다 더 나쁜 결과를 줄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주주의다(It's democracy, stupid).

이글은 거듭해서 왜 문제는 민주주의인가를 답하고자 한다. 글의 구성은 대선이 제기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를 토대로 구성된 네 가지의 토픽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각 부분은 다시 질문과 주요 민주주의 이론가들의 논의 그리고 함의로 이뤄진다. 다뤄질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 자체인가 아니면 그것의 효과 때문인가? 둘째, 왜 민주주의는 절차적 견지에서 말해지고 평가되어야 하는가? 셋째,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와 책임성은 왜 중요한가? ‘민주파’의 실패와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넷째, 왜 정당 없이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는가?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저하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2. 우리는 왜 민주주의 그 자체를 지지해야만 하는가?
여기에서는 이번 대선이 징후적으로 드러낸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유권자의 우려스러운 태도를 다룬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유신’ 이라 불릴 만한 반(反) 민주주의적 정향을 담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원인은 무엇보다 지난 10년간 소위 집권 ‘민주파’의 무능력이다. 그들은 ‘민주’, ‘개혁’, 그리고 ‘진보’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하였으나, 돌이켜 보건데 그들이 실제 행한 것은 기득 관료나 대기업이 압도하는 시민사회에서 발의된 현상유지 혹은 보수적 내용을 답습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자기정파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역설적으로 민주파들은 민주화의 성취 이후 민주주의의 발전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았다. 유권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의 확산에 그들이 끼친 폐해 중 다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무엇보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주파로 호명하고, 최소한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의 완성을 선언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둘째, 그 같은 호명과 선언의 결과 이후 전개된 재난적 사회경제적 결과들이 마치 민주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처럼 오도되게 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특정 시기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결과들과의 관계는 단선적이기 보다는 중층적이며 복잡하다. 따라서 스스로를 ‘민주파’로 참칭하는 특정의 정치분파의 정책결과 또는 업적과 민주주의는 동일시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특정정파가 만들어낸 파괴적 사회경제적 상황의 결과로서 형성되고 동원된 반(反) 민주주의적 유권자의 정향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드러낸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어려움은 그것이 “위대한 정치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만들어 낸 지적 기획의 결과(물)”로써 “이론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잘 정립된 정치 이념”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갈등이 누적되면서 표출되고, 이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위기가 발생할 때 이를 해결하려는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로 나타나는 즉 “현실의 정치 공동체에서 일정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발전했다”는 점에 있다(최장집 2007, 24-25). 개념에 내재된 발생론적 복잡함과 더불어 현대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바람을 민주주의에 귀속시키는 경향은 민주주의에 관한 무수히 많은 정의들을 만들어 내며 이해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이런 어려움과 결과로써 야기되는 개념적, 이성적 추론의 혼란을 극복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단순화하고 일상화할 수” 있기 위해서 민주주의로 가는 “열쇠”가 필수적이다(최장집 2007, 18). 절차적(procedural) 견지에 입각한 최소주의적 개념화를 통한 민주주의의 이해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가장 좋은 출발점이다.  

주제와 관련하여 최소주의적 관념에 기초하여 민주주의를 옹호한 쉐보르스키(Przeworski )의 논의(1999)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의 유권자들의 고민이 필요한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하고 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는 그것이 만들어 내는 혹은 만들 것으로 가정되는 효과들과 독립적으로서도 지지될 만한가?’ 이다.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에 관한 최소주의적 정의는 무엇인가? 이런 관념은 슘페터(Schumpeter)의 정의에 토대를 두는 데 그는 민주주의를 단지 “통치자가 경쟁적 선거에 의해 선택되는 체제”로써 정의하였으며, 그것이 ‘최소주의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포퍼(Popper)식의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이다. 포퍼는 민주주의를 “시민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정부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로 문자 그대로 최소적으로 정의한 바 있다(1962, 124). 쉐보르스키가 최소주의적 개념을 옹호하는 방법은 독특하고 강력하다. 그는 자신의 글의 목적이 “(국가들 마다) 선출방법, 제도적 특징, 문화적 전통 그리고 사회조건들이 무엇이던 간에, 단순히 정부가 자유롭게 선출된다는 그 사실만의 결과들을 검토 하는 것”임을 밝힌다(1999, 25). 그리고 글의 전반에 걸쳐 집요하게 ‘단지’ 선거가 특정의 결과를 산출하기에 충분한 것인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런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선거 그 자체가 가치가 있다(valuable)’는 점을 보여 줌으로서, ‘경쟁적 선거의 존재’, 달리 말하면 순전히 ‘정부가 자유롭게 선출된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에 관한 정의적(definitional) 특징으로 충분하며 그 자체로 지지될 만한 것임을 증명한다.
그가 선거가 산출할 것으로 널리 가정되는(그래서 그가 기각하고자 하는) 3가지 무언가(x)는 다음의 질문에 잘 요약된다. “만약 통치자가 경쟁적 선거를 통해 선택된다면, 정치결정이 합리적(rational)일지, 정부가 대표적(representative)일지, 소득분배가 평등주의적일지, 생각할 좋은 근거가 있는가?”(Przeworski 1997, 25) 차례대로 그러나 간략하게 살펴보자.

먼저 경쟁적 선거는 합리적 결과를 도출하는가? 그의 결론은 합리적일 것으로 기대되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투표라는 집단적 결정이 갖는 방법적 부족함(deficiency) 때문이 아니라 한 사회 내 개인 이익들의 기본구조, 즉 개인 이익들이 서로 경쟁적(갈등적)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정부가 인민(the people) 또는 적어도 다수(majority)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때, 정부는 대표적(representative)이라 말해진다.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주장은 민주주의가 체계적으로(systematically) 정부가 대표적이 되는(to be representative)’ 메커니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Przeworski 1997, 32).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와 대표간의 연계 역시 분명하지 않으며 문제가 많다. 그의 결론은 만약 인민이 완전한 정보(fully informed)를 갖지 못하거나, 개인들의 이익들이 동질적(homogenous)이지 않다면, ①정부는 소수파의 희생을 대가로 자신들 또는 다수파의 이익을 선호하거나, 그도 아니면 ②모든 이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이익 혹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선거와 대표를 이어주는 두 가지 메커니즘 -전망적 기대(투표)와 회고적 투표- 그 어느 것을 통해서도 정부가 시민들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유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Przewoski 1997, 38).

마지막으로, 1인1표의 보통선거권으로 상징되는 정치영역의 평등이 경제영역의 평등으로 이끄는가? 대부분의 일상적 경험은 ‘그러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평등효과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강한 기대는 여전하다. ‘중위수 투표자 이론’으로 대표되듯이 이렇게 믿을 합리적 근거도 존재한다. 쉐보르스키가 보기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하에서 자본의 사적 소유권(private ownership)이, 민주적 과정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결과의 범위를 제약하며, 조세의 자중손실 발생 등의 경제적 이유와 이념적,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충분한 불평등의 공존은 예외적이기보다는 일반적인 것이다. 즉 선거에 의한 정부교체는 경제적 평등으로 이끄는 결정적 열쇠가 될 수 없다.

이상 선거를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다른 제도적 특징들로부터 고립적으로 다룬 그의 분석의 결과는 단순히 선거에 의한 통치자(rulers)를 선택한다는 사실만으로 합리성, 대표, 그리고 평등 그 어느 하나도 자연스레 도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선거의 존재’로 국한된 최소주의적 개념을 옹호해야 하는가? 쉐보르스키는 단순히 정부교체의 가능성과 ‘투표에 의한’ 정부 교체를 구별하고 각각이 만들어내는 효과 2가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사소한 것(Is it little?)인지를 도리어 질문한다. 그의 옹호는 먼저 사람들이 폭력을 통한 갈등해결 이나 유혈사태(bloodshed)를 피하기를 원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한다. 첫째는 단지 정부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 폭력을 피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즉 정부가 교체될 수 있다는 단지 그 가능성은 갈등하는 정치세력들이 폭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룰에 순응하게 만든다. 두 번째는 ‘투표에 의해서’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그것은 바로 참가자들의 복종(complusion)이다. 결정이 투표에 의해 이뤄지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것과 다른 견해에, 또는 자신의 이익과 모순되는 결정에 순응해야만 한다. 보다 정확하게 투표는 강제에 권위를 부여한다. 갈등은 규칙에 따라 진행되고 제약됨으로서 규제된다. 결국,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기적은 경쟁하는 정치권력은 투표의 결과를 복종해야만 한다”는 것에서 나온다(Przeworski 1997, 49).

요컨대, 쉐보르스키의 논의의 결론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민주주의와 그 것의 효과는 단선적 인과관계에 있지 않다. 둘째, 그런 효과들과 무관하게 민주주의는 ‘폭력의 회피’와 ‘갈등의 규제’의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서 지지될 만하다. 만약 이번 대선을 통해 표출된 한국 유권자들의 태도가 필자의 분석대로 ‘반(反) 민주주의’적 정향을 갖는 것이라면, 이는 바로 결론 중 첫 번째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일 것이다. 한 사회의 특정의 사회경제적 결과는 여타의 정치, 사회경제적 제도와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두 번째 결론과 관련하여 한국의 유권자들은 쉐보르스키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할 필요가 있다. 폭력의 회피와 갈등의 규제 그것만으로 사소한 것인가? 그마저도 누리지 못해서인가?

<보론> 칼과 슈미터의 민주주의에 관한 일반적 관념

이상의 쉐보르스키의 최소주의 관념의 옹호는 소위 선거주의(electoralism)과는 다른 차원의 논의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역시 인정하듯이 선거가 민주주의의 질(quality)이나 생존을 결정짓는 충분요건이 아님을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실 민주주의 구성하는 실천과 제도 메커니즘이 선거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슈미터와 칼이 제시한 민주주의에 관한 일반적(generic) 개념은 선거에 국한한 정의 보다 더 현실에 가깝다. 그들은 비록 그 자체가 충분적 요건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며 정의적인 요인들의 집합을 통해서, 치자와 피치자간의 관계를 조직화하는 독특한 체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지배의 체제, 공적영역, 시민, 대표, 경쟁과 협력, 그리고 선거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들임을 잘 보여준다.

현대 민주주의는 공적영역에서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의 경쟁과 협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공적영역에서 통치자가 시민들에 대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하나의 지배의 체제이다(Schmitter and Karl 1996, 50).

3. 둘째, 왜 민주주의는 절차적 견지에서 말해지고 평가되어야 하는가?

쉐보르스키, 슈미터와 칼의 논의에서 보듯이 민주주의는 선거를 중심으로 한 정의적 개념들을 통해 다가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여전히 논란이 있는 경쟁적 개념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로버트 달은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가 절차적 최소(procedural minimal) 요건을 제공한다. 그는 이를 위해 다른 학자들처럼 현실에서 나타난 제도나 실천 또는 그에 관한 이상을 토대로 귀납적으로 일반화 전략을 채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인간 공동체(association)에 관한 최소한의 가정을 공유하는 인간들(demos)이 스스로 통치 가능한 결사체를 만들고자 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의 통치를 평가를 위해 필요하고, 공동체가 결정에 도달하는 민주적 절차를 구체화 기준들을 연역적으로 끌어낸다. 따라서 논리의 결과로서 도출된 기준들 전부를 충족시키는 결사체는 절차적 견지에서 완전히 민주적이다 말할 수 있다. 부연하면 달(Dahl)이 이끌어 낸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준’은 아래 각주(22)에서 소개된 인간 공동체에 관한 5가지 가정에서 연역된 것으로, 이는 구체적인 절차나 방법을 의미하기 보다는 해당 공동체에서 결정이 만들어지는 절차들이 평가되는 준거(standard)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로버트 달이 제시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준 (the criteria of procedural democracy)들을 살펴보자. 첫째, 정치적 평등 (political equality)이다. 이 기준은 구속력 있는 결정을 만들기 위해 제안된 모든 절차들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평등의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는데, 이는 결정이전 국면에서의 사회성원(demos)의 표출된(expressed) 선호가 동등하게 고려해야 하고, 결정국면에서 각각의 시민(demos)이 동등한 표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는 효과적 참여(effective participation)이다. 이는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최종적 결과에 관한 자신의 선호를 표출한 적절(adequate)하고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계몽된 이해 (enlightened understanding)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시민들의 계몽이 그다지 관련 없다는 주장은 어리석거나 사실과도 다르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인민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최선이라고 믿는 것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은 ‘인민에 의한 지배’ 체제이며, 인민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최선인가를 알기 위해 계몽(enlightened) 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선호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각각의 시민들은 결정시한 내에서 결정될 문제에 대한 자신의 선호가 무엇인지를 확인(validating)하고 발견할 적절하고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넷째, 의제의 최종적 통제(the final control of the agenda)이다. 그는 마케도니아에 정복당한 아테네와 나찌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명목상의 의회는 외세지배 이후에도 존재하지만 중요한 외교안보적 사안의 논의, 결정에서 배제된 사례를 예로 들며, 절차적 민주주의 기준은 사소한 문제 뿐 만이 아니라 구성원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모든 문제에 관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기준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문제가 절차적 민주적의 수단에 의해 결정 될지 않을 지를 결정할 배타적(exclusive) 기회가 그 사회성원들이 주어짐을 말하며, 그것이 ‘최종적’ 통제인 것은 민주주의에서 인민이 최종 결정권자(final say), 또는 주권자(sovereign)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기준은 포함의 기준(a criterion of inclusion)이다. 이것의 의미는 명확한데, 시민(demos)에는 단기체류자를 제외한 결사체의 모든 성인 구성원을 포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 결과로서 하나의 체제가 다섯 가지 모든 조건에 근접할 때, 절차적 견지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달(Dahl) 역시 현실세계의 어떤 체제도 이런 기준을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없으며, 기껏해야 절차적 민주주의에 근사(近似) 할 수 있을 뿐임을 인정한다. 그러함에도 이런 기준들이 중요한 이유는 ①여러 대안적 절차들, ②서로 다른 체제들 간, 또는 ③한 체제내의 시간에 따른 변화들을 비교할 때, 절차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상대적 가치를 판단하는 준거(standard)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이 요약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맥락의 견지에서 그리고 주어진 문제와 관련하여 왜 민주주의는 절차적 견지에서 접근되어야 하나? 쉐보르스키의 최소주의 개념의 옹호와 마찬가지로 왜 민주정체(democratic regime)가 만들 것으로 가정되는 결과들과 독립적인 견지에서 논의되어야 하는가?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관념은 왜 부적절하고 민주주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

지난 민주정부 하에서 민주정부가 만들어 낸 사회경제적 결과들에 대해 민주주의 관점에서 가장 체계적인 비판을 전개해 왔던 최장집은 최근 그의 저서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통해 ‘민주주의는 왜 절차적 민주주의인가’를 답한다. 그의 관심이 여전히 민주주의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강조점에 있어 변화는 명확하다. 그것은 “왜 한국의 민주주의가 왜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개선시키는데 실패 하였는가”에서 “민주주의는 왜 절차적 민주주의인가”(2007, 86)로의 핵심질문의 변화에 요약된다. 그의 초점의 이동이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이 약해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확산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더욱 파괴적인 정치, 사회경제적 결과를 조장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방식은 소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크게 관련 된다.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내용적 측면을 강조하는 이들, 즉 실질적 민주주의론자들은 민주주의 원리와 실천을 정치적 영역에서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확대, 적용할 것을 주장하며, 절차적 민주주의와 구분되는 실질적 민주주의란 개념을 사용한다. 여기서 실질적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사회경제적 수준으로 확대되어 그동안 소외되었던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이 증진되고, 배분적 정의에 입각한 복지정책을 통해 부와 소득의 분배구조가 개선되는 현상을 일컫는다”(최장집 2007, 84). 그러나 최장집이 보기에 이 같은 개념은 민주주의의 절차적 수준과 독립적인 ‘실질적’ 차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상정한다는 점에서 이분법적이며, 또한 절차적 수준의 민주주의 발전이 실질적 수준으로 나가야한다고 희망한다는 점에서 단계적이다. 즉 민주주의의 개념과 단계를 두 개로 구분한다는 것이다(최장집 2007, 86).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분법적 혹은 단계적 접근은 왜 기대와 달리 민주주의의 이해와 실천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 먼저 이론적 차원으로, 이런 구분은 상정하는 것과는 다르게 실질적 민주주의가 절차적 민주주의와 구분되어 어떤 체제적 원리나 제도적 특성을 가지지 않으며 그 결과 기존의 논의와 다른 이론적 추론의 장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실질적 민주주의는 평등이나 복지 등의 이념과 정책을 강조하거나 어떤 그룹의 이념이냐 목표를 지칭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최장집 2007, 86).

둘째, 더욱 심각한 문제는 개념의 부정확한 사용이 실천적 차원에 주는 혼란과 부정적 효과이다. 먼저, 이런 이해는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절차적 제도화와 실질적 내용을 구분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최장집 2007, 85). 왜냐하면 “실질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작동하고 실천되는 과정에서 민주정부가 만들어 내는 정책 내용과 결과를 지칭” 하기 때문이다(최장집 2007, 85). 이로서 특정 정부 혹은 특정정파(소위 ‘민주파’)의 구체적 정책결과들은 쉽게 민주주의 그 자체의 문제로 전화한다. 또한 다른 부정적 효과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절차적 수준의 민주주의에 대한 경시로 이끈다는 점이다.
셋째, 실질적 민주주의의 개념을 불러오지 않고서도 절차적 견지에서 여전히 의미있는 논의의 진행이 가능하며, 또 그게 더 낫다는 것이다. 앞서 가장 일반화된 절차적 민주주의의 요건을 제시한 로버트 달은 자신의 기준들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려우며, 기준들은 한 나라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준을 평가하기 위한 준거로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최장집 역시 한국의 민주주의는 달이 제시한 기준이나 목표에 크게 미달함을 지적하며, “현재의 한국의 민주주의가 보통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까닭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내장하고 있는 어떤 본원적 한계 때문이기 보다는 현실에서 실천되는 민주주의가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준에 크게 미흡하기 때문”으로 보았다(최장집 2007, 89).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FTA 문제가 실질적 측면 즉 정책내용의 진보-보수에 따른 호불호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준과 규범이라는 절차적 측면에서 접근가능하며 그럴 때 그 비판이 더욱 강력하다는 것을 설명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이상의 논의는 대선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지배적 접근인 경제적 접근이 그것이 지향하는 정치적 색깔과는 별개로 큰 결점이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경제성장’을 강조하던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에 초점을 맞추던 경제적 요인에 주목한 진단과 처방은 실제 문제를 만들어낸 민주주의에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정의된 당면한 사회과제를 해결하는데 (절차적) 민주주의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인식한다는 점에서 같다. 최장집의 논의는 이처럼 다르지만 같은 두 관점을 동시에 정확하게 겨냥한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에 문제가 있다면, 그 이유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이다”(최장집, 2007 94).

3.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와 책임성은 왜 중요한가?
앞서, 이번 대선에서 가장 놀라운 점으로 예견된 재앙적 패배와 여러 차례 거듭된 민심의 경고의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집권 ‘민주파’들이 그 같은 패배를 사실상 방관했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유권자들은 그처럼 지난 10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었는가? 먼저 두 번째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역시 ‘경제’ 관리의 실패이다. 그러나 의아스러운 점은 ‘민주파’는 전반부의 집권을 통해 성공적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정상궤도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후반부 집권동안 역시 노무현 정부가 거듭 강조하듯이 성장률, 주가, 실업률 등 주요 거시경제지표의 측면에서만 볼 때 혹독한 결과를 받을 정도로 나빴다고 말하기 어렵다. 문제는 경제로되 ‘다른’ 경제이다. 소위 ‘양극화’, ‘비정규직 양산’ 등의 경제총량의 차원이 아닌 분배적 차원에서 그들의 실패는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가능하다. 그들은 결국 ‘다른’ 경제를 유권자들에게 제시하고 설득할 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배적 차원의 경제악화가 총량적 차원을 중시하는 그룹의 압승으로 귀결된 대선의 아이러니 역시 설명해 준다. 그러나 문제가 총량적 혹은 거시경제지표들로 대변되는 ‘경제’가 아닌 ‘사회경제’로 바뀔 때, 사회적 분배문제의 악화가 성장과 기업친화적 정당의 지지의 증가로 이어지고, 더 많은 재분배와 사회복지를 요구하는 경향을 가진 저소득 계층이, 상대적으로 고소득층에 가까운 정당에 대한 지지가 증가로 나타난다면 -이는 이번대선이 보여주는 것- 더 이상 경제문제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보다 구체적으로 대표와 책임의 문제이다. 민주주의의 견지에서 그리고 대표와 책임의 개념을 통해서만 우리는 ‘민주파의 희귀한 패배’ 뿐 아니라 대선이 보여준 ‘로빈후드 역설’도 설명할 수 있다. ‘민주파’는 누구를 대표하는가? 또 어떻게 자신이 대표한다고 자임한 그룹에 대해 반응해왔는가?

이전까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특정의 결과와 독립적인 최소주의적 정의와 절차적 요건을 살펴봤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특정의 결과들과 선형함수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지 정치, 사회경제적 결과들과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합리성, 대표, 평등 그리고 다른 중요한 긍정적 목표 혹은 가치들의 개선과 긍정적 상관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폭 넓은 믿음과 또 이를 뒷받침 하는 경험적, 역사적 근거가 존재한다. 동시에 그 관계의 편차가 국가마다 크게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무엇이 민주주의와 그 결과들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그 비밀의 열쇠는 우리가 채택하는 민주주의가 대의제(representative) 민주주의라는 것에 있다. 도시국가(city-state)에서 국민국가(nation-state)로의 공동체의 규모(size)의 성장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달은 이 같은 역사적 변화가 민주주의 실천적, 이론적인 중요한 변화들을 초래하였다(Dahl 1986). 먼저, 대표(representation)이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의회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에, 대표는 대규모의 정치체제에서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되었다. 둘째, (민주주의의) 무제한적 확장(unlimited extension)이다. 대표가 규모의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자 민주정의 크기에 대한 물리적 제약은 제거되었고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셋째, 참여의 제약이다. 규모의 증대로 정치참여의 어떤 형태들은 더욱 제한되게 된다. 넷째, 다양성(diversity)이다. 정치단위의 성장은 도시, 인종, 역사, 신화 종교 등의 견지에서 구성원의 구성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다섯째, 갈등(conflict)이다. 동질한 시민구성이 이질적인 것으로 변화됨으로서 정치 균열이 다양해지고 갈등이 심화 되었다. 이익 간 갈등이 비정상적 상태이기보다는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Dahl 1986, 227-228). 이상의 공동체 규모의 증대가 만들어낸 변화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출현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역시 지배의 한 형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Przeworki, Stokes and Manin 1999, 1). 지배의 체제라는 것은 피치자와(the ruled) 통치자(ruler)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다른 지배의 형태들과 결정적으로 차이를 갖는 것은 대표의 존재, 즉 통치자가 대리인이라는 점에 있다. 즉 지배하는 이들이 선거를 통해 지배받는 이들에 의해 선출된다는 점이 민주주의와 다른 대안적 체제를 차별 짓는 요체이다. 요컨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리인 즉 통치자가 주인 즉 피치자를 지배하는 ‘특수한’ 주인-대리인 관계에 기반 해 있으며, 따라서 한 사회의 민주주의의 내용은 양자관계의 건강함을 반영하며, 이는 다시 대표(representation)와 책임성(accountability)의 개념으로 표현된다.

많은 민주주의 연구자들은 대표(representation)를 민주주의의 정수로 다뤄왔다. 그러나 흔히 사용되는 Pitkin (1967)의 ‘공공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이라는 대표(representation)의 정의는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Przewosrki et al. 1999, 2). 바꿔말하면, 일반적으로 “정부는 그들이 인민(the people)을 위해 최선인 것을 하고, 적어도 시민들의 다수(majority)의 최선의 이익에 맞게 행동한다면, 대표적(representative)이다“ 이해는 규범적으로 매력적인 목표라는 점에서 넓은 합의가 존재하며, 개념의 최소주의적 핵심을 지시하지만 보이는 것처럼 명확하지만은 않다. 예컨대 대표되는 이익과 관련해서, 이익은 누가 정의하느냐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혹은 시간의 문제와 관련해서 시민들은 대표들의 행위가 자신의 이익임을 전망적(사전적)으로 판단하느냐 사후적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서도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시민들에게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하도록 할 수 있는 권력을 보유한 정부는 왜 시민들의 최선의 이익에 맞게 행동하는가? 왜 정부는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가? 그리고 어떤 기제를 통해 작동하는가? 먼저 쉐보르스키 등은 전자와 관련하여 가능한 4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1) 오직 공공정신(puplic-spirited)을 가진 이들만이 스스로 공적서비스를 담당하고자 할 것이며, 그들은 공직에 있는 동안 권력에 의해 부패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2) 스스로 공부를 맡는 사람들은 동기(motivation)나 능력에서 차이가 남지만,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효과적으로 좋은 후보들을 골라낼 수 있기 때문에, 좋은 후보들만이 공직을 유지하며 공공서비스에 헌신할 수 있음. (3) 공직에 있는 이들이 시민들과 다른 어떤 이익과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지만, 시민들은 그들의 표를 너무 덕(virtu)의 경로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이들에 대해 자신들의 표로써 공직에서 제거하여 더 이상 그 과실을 누리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위협할 수 있음. (4) 분리된(separate) 정부권력이 서로 그들은 인민들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도록 하는 방식에서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을 하기 때문에. 이중에서 첫 번째 설명은 나름의 설득력을 갖지만 이런 이유라면 권위주의 하에서도 누가 독재자이냐에 따라 인민의 이익에 최우선적으로 복무하는 대표는 가능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이론의 핵심은 체계적으로 정부가 대표적이게 유도하는 체제라는 점에 있다(Przeworski et. al. 1999, 4).

두 번째, 세 번째 설명은 대표에 관한 두 가지 모델 즉 위임(mandate) 모델과 책임성(accountability) 모델을 요약하는데, 전자는 전망적(prospective) 견해, 후자는 회고적(retrospective) 견해에 기반 한다. 전망적 견해는 선거의 사전적 위임 기제로서의 역할을 강조 하는데, 선거에서 각 정당과 후보들 정책이 제안, 경쟁하고 이 때 승리한 정책 프로포절이 다음 정부가 추구해야 내용을 결정함으로써 대표는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회고적 견해에서 대표는 선거의 책임성 기제를 통해 확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선거는 정부가 과거의 자신들의 행위들의 결과에 책임지게 하는 효과를 갖기에, 투표자들의 회고적 평가를 예상하는 정부는 다음 선거에서 시민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평가될 정책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표의 위임모델은 정치인, 투표자 모두 충분한 정보를 가질 때만 작동한다. 현실에서 유권자는 충분한 정보를 갖기보다는 합리적으로 무지(rationally ignorant)하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정확한 위임은 불가능해진다. 무엇보다 어떤 민주체제도 대표들은 정치인들 선거공약에 의해 구속을 강요받지 않으며, 이럴 강제할 어떤 제도적 장치를 갖지 못한다는 제도가 내재한 약점은 정부를 사전에 전망적으로 통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회고적 관점에서 만약 시민들이 정부가 그들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였는가의 여부를 판별 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제제할 수 있다면, 즉 시민들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현직자를 재선시키며 그렇지 않은 이들을 낙선시킬 수 있을 때, 정부는 책임적(accountable)이며 대표는 작동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문제는 상존한다. 무엇보다 다시 정보의 문제이다. 투표자들이 정책이 집행되는 조건도 최종 결과에 있어 정책의 효과정도 역시 정확하기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럴 때 단순히 최종 결과를 관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되게 정부가 행동했는가를 추론은 가능하지 않다. 즉 회고적 투표는 투표자가 정책결정 전반에 대한 이해와 정보가 충분하지 않을 때, 대표를 강제해 내지 못한다. 이상의 논의는 대표에 관한 전망적 메커니즘 뿐 아니라 회고적 메커니즘 역시 정부가 시민들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유인하는데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투표자가 처한 어려움은 그들이 가진 투표라는 하나의 수단을 통해서 좋은 정부를 구성하는 것과 선출된 정부를 잘 행동하도록 인센티브의 제공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데 있다.
이상의 논의는 우리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정체를 가질 때 당면하게 되는 문제의 핵심을 요약한다. 그리고 처음의 문제제기에 왜 민주파가 그 같은 반감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과로서 처참한 패배를 사실상 방관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단순히 사회경제적 문제의 차이를 갖지 않음은 그 자체로만 말해질 수 없다. 그것은 대표와 책임성의 개념을 통해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즉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 완전한 정보를 갖지 못하고, 사회의 이익구조는 기본적으로 경쟁적인 상황에서 누구를 대표하고 어떻게 지속적 책임을 담보해 낼 것인가의 문제는 민주정치의 내용을 결정짓고, 따라서 유권자의 정치세력에 대한 평가-전망적이던 회고적이던-를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요체이다. 한국 민주파의 실패는 자신 들의 정치계급(political class)이 아닌 누구를 대표해왔나? 그리고 그간 유권자들이 보낸 강한 저항과 분노의 신호들에 어떻게 반응해왔나? 그들은 경제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대표하고 또 일상적으로 책임지는데서 실패했다. 민주파는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도 실천하는데도 실패했다.

4. 정당은 어떻게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이번 한국대선의 큰 폭의 유권자 변동(swing) 혹은 대선과정에서 나타난 이회창, 문국현 현상은 한국이 여전히 정당민주주의를 제도화 시켜 내지 못함을 증명한다. 왜 정당이 민주주의의 내용과 관련해 중요한가? 그것은 어떻게 시공간적 민주주의의 편차를 설명하는데 기여하는가? 왜 어떤 학자는 정당 없이 민주주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를 만든 것은 정당이라고 까지 단언할 수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Schattschneider 1942). 정당은 민주주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의 역사를 선거와 대표와 시민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마냉의 논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보기에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민주주의'이다(Manin 1997). 대의제 민주주의가 지배적 통치의 형식으로 채택되면서 즉, 선거권확장에서 비롯된 선거민(electorate)의 확대는 유권자와 대표 사이의 개인적 관계에 의존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점에서 시민들은 더 이상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당의 색깔을 갖는 사람에게 투표한다. 그리고 확대된 유권자를 동원하기 위해 관료와 조직을 가진 정당이 설립되었다(Manin 1997, 253). 앞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주인으로서의 유권자와 대리인으로서의 대표의 관계와 거리에 의해 요약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관계와 거리는 정당의 역할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정당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투표하며, 이전시기 명사중심의 의회민주주의와 가장 차별적인 현상은 정당민주주의에서 대표와 유권자간의 사적연계의 붕괴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선진유럽국가들을 중심으로 쉽게 확인되는 놀라운 선거결과의 안정성에서 증명될 수 있다. 마넹이 보기에 선거결과의 안정성은 대개 사회경제적 요인들에 의한 정치적 선호의 결과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즉 정당 민주주의에 선거에서의 균열은 계급분할을 반영하기 때문이다(Manin 2004, 257). 이런 의미에서 대표성은 사회구조의 반영이 된다(2004, 256). 그는 피쯔르노의 ‘투표는 계급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진술을 인용하며, “대부분의 사회주의적 또는 사회민주주의적 유권자들에게 그들이 던지는 투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과 운명의 문제였다. 는 투표를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 같은 논의는 왜 오늘날 제기된 대의민주주의 위기가 주로 의회민주주의와 정당 민주주의를 구별하는 바로 그 특성이 퇴색한 탓으로 돌려지고 있다는 마넹의 논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Manin 2004, 242). 그는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대의정부를 민중통치에 더욱 근접하게 하는 것, 이른바 유권자와 특정 정당 및 의회대표 사이의 동일시, 아울러 정강에 기초한 대표의 선택을 말한다(2004, 242). 요컨대, 켈젠이 강조하였듯이, “민주주의가 정당 없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환상이거나 위선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정당정부(Parteienstaat)다”(1929, 20; Manin 2004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정당은 대표와 시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사회학적 정당론을 개척한 립셋과 로칸의 논의를 살펴본다(Lipset & Rokkan 1967). 그가 보기에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갈등의 대리인인 동시에 통합의 도구이다. 그는 전자와 관련하여 부분으로서의 정당이라 칭한다. 이때 정당은 한 정치체 내의 ‘분획’, ‘갈등’, ‘대립’를 위해 존재한다. 물론 전체주의 정당들을 사례로 ‘부분’ 아닌 정당의 가능성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립셋과 로칸이 보기에 이런 정당들 조차도. 비록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경쟁하진 않지만, 여전히 더 큰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속의 다른 세력들에 대해 ‘반대’를 행한다. 그들은 민주적 정당과 달리 공직, 지지를 놓고 경쟁하진 않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동원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은 사회 내 갈등을 조직하고 반대하는 부분으로서의 정당의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동시에 정당은 통합의 도구이다. 그 출현이래로 정당은 정치적 동원의 핵심적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국지적 공동체들을 국가 전체 또는 보다 넓은 연합체로 통합시키는 기여해 왔다. 아울러 정당은 지역을 교차하는 커뮤니케이션 구축함으로써 정당체제는 시민들의 불만으로부터 오히려 국가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로쓰의 표현처럼 ‘정당체제 내의 제도화된 갈등의 통합적 역할’을 통해 정당은 갈등하는 이익표출을 위한 정규적 통로를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수많은 국가체제들의 안정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당의 두 역할을 립셋과 로칸은 ‘갈등과 통합의 변증법’으로 언명한다. 기득계급과 소외된 계간간의 명시적, 잠재적 갈등들의 표출을 위한 통로의 개방은 초기 국면의 체제내 힘의 균형을 허물곤 하지만, 장기적으로 각 정치체들을 강화하는 경향 보여줌. 특히 정당의 변증법적 두 역할은 갈등하는 이익을 명확히 하고, 집약한다는 의미에서 표출적 기능(expressive function)과 대립하는 수많은 이익과 견해의 대변인들에 협상과 요구의 조정, 압력의 집약을 강제하는 도구적, 대표적 기능(instrumental, representative function)에 의해 달성된다.
요컨대, 지금까지 마넹의 정당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와 립셋과 로칸의 정당의 변증법증 기능은 ‘정당부재’로 요약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내용적 특성하에서 왜 한국대선이 왜 최악의 대선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는지, 또는 왜 민주파들이 엄청난 패배를 당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전에 그런 광범한 유권자의 저항과 경고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한국의 선거시장이 그처럼 유동적인지를 설명한다. 대의제 민주주의하에서 민주주의의 내용은 거의 전적으로 정당체제의 성격과 정당의 능력과 기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5. 마치며
이상의 민주주의에 관한 최소주의적 개념, 절차적 요건의 내용과 중요성, 대표-책임성의 논의 그리고 정당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왜 각 국가에서 민주주의의 이해와 실천이 대표, 평등, 합리성, 통합 등 바람직한 가치들과 관련하여 그 성과에 있어 현격한 편차를 보이는가에 대한 대답을 준다. 먼저 민주주의의 내용적 차이는 최소주의적인 ‘선거에 의한 정부교체’라는 그 사실만의 단선적 함수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는게 중요하다. 둘째, 그보다는 절차적 민주주의 논의가 말해주듯이 각 나라가 절차적 요건들을 어느 정도 그 이상에 근사(近似)시켰나에 따라서 그것의 성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현대 민주주의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점은 그것이 대리인이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독특한’ 주인-대리인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하나의 통치체제라는 점을 의미한다. 독특한 주인-대리인 문제를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제도와 실천이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따라서 그것의 내용은 현격히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어떤 대표, 책임성의 메커니즘을 갖느냐의 문제에 다름 아니며, 즉 선출된 대표를 어떻게 선거시기 뿐만 아니라 상시적으로 인민의 이익에 복무하게 하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한국적 맥락에 지금까지의 논의를 적용하면 다음의 함의가 도출될 수 있다. 첫째, 단순히 경쟁적 선거에 의한 정부교체라는 최소적 견지에서 민주주의는 갈등의 규제와 폭력의 회피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절대적으로 옹호되어야 할 가치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최소요건의 효과-폭력회피의 갈등의 제도화-조차 정당의 미발전으로 인해 크게 발휘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한국유권자들의 반(反) 민주주의 정향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절차적 요건에서 말해지고 강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요건과 그것이 기반한 가치에 입각할 때, 한국 사회가 처한 곤경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장으로의 대체를 말하거나 다른 독립적 이론적 체계를 갖지 못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불러들이는 것은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될 수 없으며 병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셋째,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 문제는 독특한 주인-대리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와 책임의 원리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 문제해결 열쇠이다. 한국 민주파의 문제는 바로 이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함에서 비롯된 바 크다. 넷째,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절차적 요건의 이상과의 근사한 정도, 대표와 시민의 관계와 거리와 더불어 정당은 민주주의 과정과 내용을 결정하는데 있어 결정적이다. 지난 대선은 무엇보다 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집약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섯째, 종합하자면 지배적 관점과 달리 현재 한국의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이다. 핵심문제 영역은 절차적 요건들, 대표-시민의 관계와 거리, 정당의 역할과 기능에 맞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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