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세상읽기] 김별아의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를 읽다.
삶이 또는 삶의 자세가 어때야 한다며, 잘 난천 온갖 충고를 쏟아내는 글들에 대해 전혀 취미를 갖지 않지만, 이 글의 담담함과 겸손함에 끌렸다.몇몇 구절을 옮겨 본다.
~ 그때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죽지 않겠다! 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위에서 뻗어 내민 손을 잡는 순간 죽음의 공포로 무겁게 늘어졌던 내 몸은 삶을 향해 솟구쳤다. 그랬다. 삶은 본능이었다. 치사하고 더럽고 구차하지만, 갸륵하고 애틋하고 미쁜 욕망 혹은 의지.
~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밧줄을 움켜잡고 산다. ~그럼에도 때로는 그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헐떡거리며 묻는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그 자신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심리를 묘파한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인간이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게 던질 만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삶으로부터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기에 행동을 통해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묻기보다는 대답해야 한다.
~시험공부 대신 산행을 선택한 아이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게 더 어려운지 산을 타는 게 더 어려운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때 미망을 깨우는 포효처럼 내 귓가에 들려온 중1 녀석의 우문현답.
“그야 당연히 산을 타는 게 더 어렵죠! 공부는 하는 척할 수도 있지만 산은 타는 척할 수 없잖아요?”
할(喝)! 열세 살짜리의 말이 그토록 어렵고 무겁던 질문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산은 타는 척할 수 없고 삶은 사는 척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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