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6일 토요일

[읽고 생각하다] 통찰의 힘

조효제의 독일에서 다시 생각하는 전태일 를 읽고 쓰다 - 통찰의 힘

1) 총평

나는 이런 글을 참 좋아한다. 그 이유는 그의 첫 문장에 있다. 


백 마디 이론이나 분석보다 잠깐의 인상, 짤막한 관찰이 더 깊이 기억될 때가 있다.

조효제 교수의 이번 칼럼은 특정한 이론이나 분석틀에 현실을 끼워 맞추지 않았다. 그 반대이다. 그것은 생활 속의 짧은 경험에서 추상해 낸다. 필자가 말한 잠깐의 인상 또는 짤막한 관찰이 항상 좋은 통찰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양자를 이어주는 것은 전적으로 글쓴이의 깊고 진든하게 생각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그 능력에 따라, 양자를 잘 결합시키냐가 결국 좋은 글과 어줍짷은 글을 나눌 것이다.

2) 현실묘사의 힘

그가 그려낸 있는 그대로의 관찰은 어떤 최신의 사회과학 이론과 또 이에서 나온 이론적 개념들의 도움 없이도 그 자체로 강력하다. 독자들은 그냥 그가 그려주는 한 독일 도시의 잡화점의 풍경을 따라서 상상하면 그만이다.

3) 보도블록

개인적으론 난 보도블록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보도블록 한 장에도 한 사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담길 수 있다 믿기 때문이다. 난 한국의 보도블록이 참 엉망이란 걸 자주 느껴왔다. 문제는 그것이 거의 매년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는 보도에도 말이다. 왜 수많은 예산을 들여, 그렇게 자주 보도블록을 교체하는데, 그 결과는 더 나쁜 보행환경으로 이어졌을까? 이 것이 내가 길을 다니며 던진 질문이다. 조효제 교수의 칼럼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그것은 한 사회에서 (육체)노동의 보상체계의 문제, 즉 어떻게 그 가치가 평가되는가와 크게 관련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보도블록은 지방행정가의 입장에선 아마도 예산소모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거나, 기껏해야 외적 환경개선의 흔한 소재일 뿐일 것이다. 이 작업은 아마도 여러차례 복잡한 발주-수주의 관계를 거쳐 아마도 아주 조그만 건설회사에 배당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산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직접 그 작업을 담당하는 업체의 몫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짤려나간 몫마저도 온전히 직접 현장에서 노동하는 이들에게 배분되는 것도 아닐것이다. 그들의 노동에 대한 보수는 그가 행하는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 노동-자본의 힘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최저임금에 상응해서 결정될 것이다. 쥐꼬리만 보상이 돌아오는 지루하고 고단한 노동작업에, 동료 시민이 매일 걸어다니는 길을 관리한다는 어떤 부가적 가치가 더해지긴 어렵다. 그저 할당된 양을 최대한 빨리 뒤업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전부다. 여기서 숙련과 장인정신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오히려 그 반대 일것이다. 엉망진창으로 깔아야, 더 빨리 다시 그 일을 담당하게 됨을 회사도 그 노동자도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도블럭이 어떠냐는 단순히 보도블럭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회의 노동의 정치적 위치, 사회적 가치, 경제적 보수의 문제인 것이다.




백 마디 이론이나 분석보다 잠깐의 인상, 짤막한 관찰이 더 깊이 기억될 때가 있다. 노동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독일에서 마주치는 노동자들에 대한 인상이 그렇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그것은 원칙일 뿐 실제 삶 속에서 그 원칙이 지켜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낀다. 그런데 일상의 차원에서 독일 사회의 평등성은 확실히 우리보다 앞서 있다.

동네 슈퍼마켓 계산대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 기름과 먼지로 범벅이 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가 함께 서 있는 광경을 흔히 본다. 그 사람의 앞뒤로 아주 고급스런 복장의 부인, 그리고 넥타이 정장 차림의 신사가 같이 줄을 서 있다. 이런 광경이 기본적으로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광경에서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복장의 사람들, 한눈에도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런 표정으로 서로 눈인사를 하기도 하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모습을 이색적으로 바라보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될 판국이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노동자는 계산을 끝낸 뒤 카운터 직원과 한참 동안이나 즐거운 ‘담소’를 주고받는다. 바로 뒤에 화려한 의상을 걸친 귀부인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중에 말이다. 그 노동자나, 카운터 직원이나, 뒤에 서 있는 부인이나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광경을 딱 집어 뭐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직업적·계급적 격차가 있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거리나 이질적 의식이 우리 사회보다는 확실히 적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슈퍼마켓에서의 내 관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후 3시 혹은 밤 9시쯤이 되면 카운터 직원들이 교체된다. 조금 전까지 계산을 하던 아주머니 직원이 어느새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장바구니를 들고 매장에서 물건을 고른다. 그런 뒤 계산대에 가서 여느 손님과 똑같이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쇼핑을 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별것 아니면서도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집 앞에서 보도블록을 깔고 있는 일꾼을 본 적이 있다. 네모나게 깎은 손바닥 반만한 작은 돌을 보행로 바닥 땅에다 망치로 박고 있었다. 그 넓은 보행로 전체에 그런 식으로 돌을 하나하나 토닥토닥 도토리 심듯이 보행로를 깔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작업에 걸리는 시간이나, 거기에 투입되는 정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 보였다. 일꾼은 돌멩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망치로 박으면서 노동 자체에 몰입하고 느긋하게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노동하는 한 인간이 몰입해서 일에 진정으로 빠져 있는 광경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며칠 후 동네 슈퍼마켓에서 그 일꾼이 작업복 차림으로 장을 보러 온 것을 보았다. 그 사람 역시 수많은 손님들 사이에서 전혀 구분되지 않고 똑같이 한 사람의 손님으로서 장을 보고 천천히 계산을 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꿈꿨던 사회가 이런 식으로 인간화된 사회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일의 성격에 따라 직업의 특징이 다르더라도 모든 인간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사회 말이다. 노동을 진정으로 즐기고 몰입할 줄 알며 누구로부터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공동체에 속한 노동자들의 세상, 이것은 계급의 문제나 노동시장의 문제 차원을 벗어나 우리 사회의 정신의 문제,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태일 열사는 사십년 전에 이 점을 이미 꿰뚫어 보았고,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자신을 오롯이 바쳤다. 그의 시선이 준열하면서도 또한 따뜻한 것은 아마 그의 이런 혜안, 열사의 이미지 뒤에 서려 있는 소박한 인간애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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