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5일 금요일

[읽고 쓰기] 왜 트위터는 지속될 것인가

<from tistory, 작성일 2010.1.15>

1. David Carr의 Why Twitter Will Endure 을 읽고 쓰다. 이글 은 뉴욕타임즈 1월 1일자에 실렸다. 저자는 뉴욕타임즈의 문화 섹션 기자이자, 기업 섹션에서 미디어 부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 그는 트위터와 처음으로 조우했던 2007년 한 컨퍼런스에 대한 묘사로 글을 시작한다. 당시 저자는 이미 과도하게 집착했던 Facebook에 그리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각종 RSS feeds와 이메일에 충분히 압도당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을 침입할 웹 기반의 마지막 한 가지를 갈구하고 있었다. 
    
트위터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던 듯 하다. twitter(v. 재잘거리다)라는 명칭부터 진부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고, 마치 스스로 자신의 미래가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리라 암시하는 듯 보였다. 명칭에 더해 140자로 제한된 문자 공간으로 요약되는 그 아이디어 역시 휴대폰 문자 메시지에나 어울릴법한 것이었고, 그 속에서 뭔가 지적이고, 의식을 공유할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할 것이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첫인상은 곧 여지없이 깨지게 되는데, 왜냐면 트위터가 그 컨퍼런스의 가장 주된 뉴스 플랫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많은 참석자들이 트위터를 통해 무대 위 패널들에 대한 설명과 비판적 논평을 거의 실시간을 쏟아내는 것을 보구, 그는 스스로 전문가적 필요(professional nessity)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필자는 그로부터 1년 후의 변화를 말한다. 트위터는 그의 사고를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전에 가능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왜냐면 이전과 같이 희뿌연 상태로 30여분씩 인터넷 검색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서도,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그날 그날의 뉴스와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감각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편으로 깊이 사고하는 능력의 상실에 대한 우려를 하면서도, 그것이 트위터를 통해 얻는 것에 비하며 충분히 지불할 만한 것이라 여긴다. 

이런 경험은 필자를 트위터를 개발한 회사조차도 오래지 않아, 친구나 또는 낯선 이들을 향해 쫒고 쫒기는 1억명의 가입자를 확보할 것이라 자신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고, 또 오래 지속될 것이란 확신으로 이끈다. 

그에 따르면 이런 견해는 필자만의 것은 아니다. 대표적 인물이 Steve Johnson인데, 그는 6월 TIME에 트위터에 관한 가장 수준 높은 기사(링크 참조)를 게제한 사람이다. 해당 기사를 통해 죤슨은 "트위터가 점점 더 상하수도 배관(plumbing *b는 묵음입니다)을 닮아가고 있으며, 배관은 영속성을 가진다(eternal)"고 요약한바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론 필자는 트위터의 특성과 장점을 설명한다.

특히 그는 겉으로 보기에 단발마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불협화음(cacophony) 속에서 뭔가 유용한 것을 찾는다는게 과연 가능키나 한 것인가라는 트위터를 처음 접하는 누구라도 가졌을법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당신이 누구에게 묻고 있는지", 또 보다 중요하게 "당신이 누구를 쫒는지(follow)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트위터가 누구나 (자신이 원한다면) 아무라도 쫒을 수 있지만, 반면에 호혜성(reciprocity)에 대한 기대치는 아주 미약하다는 고유의 특성에 기인한다. 즉, 자신이 쫒는 사람을 주의깊에 조직한다면, 트위터는 각 분야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오는 항상 꺼지지 않는 정보의 원천(always-on data stream)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트윗이 놀라울 정도로 필수적이고, 시의적절한 정보의 사슬(link)로 가득차 있기때문이라 강조한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누군가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는지 알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트위터에 대해 평가절하 하곤 한다. 필자는 이에 대해 "그 누군가가 진정으로 트위터에 정말 serious한 사용자라면, 복잡하게 연결된 세계에 대한 가장 명석하고 최신의 시각을 준비하며 점심을 들고 있을지 모른다"고 가볍게 일축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가 보기에 트위터는 특히 언론계에 종사자들에 가장 유용하다. 그러나 유용성이 비단 그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는데, 자신이 속한 분야 혹은 산업을 이끄는 사람들이 무엇을 읽고 생각하는지를 알수 있게 된다는 점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던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트윗의 유용성에 이해, 필자는 트위터의 기본 매커니즘을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트위터의 초심자들은 트위터에서 뭔가를 발행하는 것(즉 트윗)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 행위, 메시지 작성과 전송으로 구성되는, 자체는 너무나 간단해서 처음에는 사람들은 쉽게 다른 이들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처음에 필자 역시 트위터에서 뭔가를 알리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이 모세가 아니라는 것을, 트위터도 그 사용자들도 내가 생각하는 것을 심사숙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1년이 지난 후 필자가 깨닫게 된 트위터 서비스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방송되는 집합적 목소리(wired collective voice)를 듣는데 있다는 것 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난후 한 컨퍼런스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노트북을 켜 놓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면, 웹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수많은 분신들이 보내주는 트윗을 통해, 블랙베리를 통해서도 충분히 소화할 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트위터를 통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훨씬 적은 시간을 인터넷 사용에 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필자는 처음 트위터를 접하곤 압도당하고 하는 사용자를 위한 절묘한 비유를 제공한다. 그는 트위터를 "과거를 향해 흘러 내려가는 거대한 정보의 강으로" 그리고 그 강에 자신이 "아주 잠깐씩 컵을 담근다"고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알아야 하는 대부분은 바로 그 컵에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 컵이 애플과 같다면, 그 속에는 태블릿 PC의 데모버젼이, 혹은 아마존과 같다면,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종이책 보다 킨들의 판매량이 상회했다는 사실이, 혹은 그것이 의료개혁법안을 닮았다면, 그 속에서 지난 상원에서의 투표결과가 담길 것이라고 말한다

흔히 트위터의 한계로 지적되는 한정된 공간과 문자 메세지로부터 발전된 서술 양식이란 표현의 한계는 필자는 상당한 이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가 볼 때, 최고의 트위터인들은 링크, #(해쉬 태그)와 코멘트 등을 적절히 사용해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정확한 의사소통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덫붙여 그는 다른 표현매체(아마 이메일, 직접대화 등)를 통해 접촉할 때 견딜 수 없게 만들곤 했던 많은 알고 지내던 전문가들이 트위터의 구속 속에서는 의외로 흥미로운 사람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필자가 볼 때, 트위터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놀라울 정도로 주문자 맞춤형(customizable)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마치 한 나라 전체가 한 TV 시리즈의 마지막 회에 혹은 몇몇 지성인들의 소규모 회동에 고정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 수 있다. 달리말해, 트위터의 정수는 바로 스스로 정의하는(self-defining) 그룹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른 웹공간에 비교해 사용자들이 훨씬 더 좋은 매너를 갖게 한다는 부수적 효과로 이어진다. 그는 트위터 공간에서 당신은 당신의 아바타이며 당신의 아바타는 바로 너라고 비유한다. 저자가 볼 때, 이런 공간에서 자신이 말한 무언가에 대해 어떤 이들이 비난할 때, 얼뜨기처럼 행동하지 않는게 좋다고 권유한다. 왜냐면, 들은 당신이 아니라 자신을 쫒는 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쓱싹 내려 버리고, 관심을 끊으면 된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저자는 소셜 미디어에 관한 저작을 쓴 Clay Shirky의 논의를 빌어, 트위터어 원척적 수용력(raw -capability)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트위터는 무엇보다도 "가볍고, 끝없는 유용성을 가지고 있기에,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할 수록 더욱 더 이런 점은 나아질 것이기에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라" 예측하였다. 기업들, 기관들이 점점 더 트위터를 이용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트위터는 점점 더 많은 중요한 대화들이 이뤄지는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여기서 트위터의 중요한 사회적 속성이 나오는데, 필자는 트위터가 Shirky가 알고리즘적 권위(algorithmic authority)라 일컫는,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정의하는 것"을 돕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설명한다. 즉, 각양 각생의 사람들이 동일한 순간에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뭔가 중요한 것임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트위터의 역할은 "네트워크화된 지성의 고동"에 그치지 않는다. 마법에 가까운 실용적 유용성도 높기 때문이다. 트위터는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어떤 종류의 넷북을 사야하는지, 혹은 이를 살 때, 늘어선 긴 줄에서 항의할 때도 유용하다. 

여기서 필자는 트위터가 제공하는 단점을 잠깐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이러한 풍요로움에 비용이 없을 수는 없다. 사람들은 흔히 이메일과 인터넷이 시간을 소모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은 트위터를 얻을 때까지 유보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왜냐면, 트위터에는 당신에게 일어났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기에, 트위터를 하게 되면, 그것은 더욱 더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인다.

그러나 잘 사용한다면, 트위터는 개인적, 사회적 긴장을 감소시켜준다. 그 일례로, 미국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발생한 항공기 테러 사건을 든다. 많은 뉴스들이 교통대란의 시점에서 금요일 테러 여파가 토요일 아침 여행객들에 끼칠 영향을 혼란스럽게 떠들어 댔지만, 이를 혼돈을 정리한 것은 새로운 항공안전 지침을 언급한 한 사람의 트위트였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트위터의 앞에 놓인 전망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최근 커져가는 트위터의 정보 헤게모니가 확고하지는 않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특히 최근 몇주간에 심각한 서비스 정지 사태가 일어났고, 기업과 정부 모두 트위터 플랫폼의 안정성에 대해 우려도 만들어 내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웹상에서 존재할 때, 많은 영리한 녀석들이 트위터를 정신나간 혼돈으로 빠트릴 궁리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을 든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비관적 우려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웹에서 원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나의 트위터 갱들이 나와 함께 할른지를 보장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의 몇몇 팔로우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을 모세로 만들지는 않는다며, 글을 마친다.

3. 나의 배관/트위터를 뚫을 수 있을 것인가?이렇게 읽고, 번역을 마친 후 든 첫번째 생각은? What are you doing now? 아! 나는 지금 왜 이거 번역하고 있을까? 그러나, 카의 글에서 이것저것 배울 수 있었어. 중요한 사실 몇가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트위터는 배관을 닯아 있다. 
2) 많은 추종자(follower)의 존재가 당신을 모세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발행(publication)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말라.
3) 자신이 따를 이들을 잘 조직화 할 수 있을때, 트위터는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정보 혹은 정보로의 링크를 제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
4) 트위터 서비스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의 집합적 목소리를 듣는 것에 있다는 것.
5) 요컨대, 트위터는 많은 개인적, 사회적 유용성을 가지는 도구라는 것.

그러나,저자 카의 설명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트위터 역시 결국 우리가 사는 실제의 시공간을 초월할순 없다는 것이다. 

즉 저자가 말한 개인적 유용성은 일단 트위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증가될수록 커질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 유용성이 단순히 사용자 수의 함수가 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면, 그것은 결국 사회 각 분야에서 풍부한 정보와 깊이 있는 식견을 갖춘 트위터들이 많이 존재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시 전체 사회의 문화적, 지적, 기술적 수준이 높아져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 경험에 비춰 트위터에 대한 나의 인상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1)말 그대로 단순한 재잘거림(진짜 밥먹는 것만 얘기하는 이들)의 경쟁
(2)가식적, 의례적, 이쁘고, 멋진 말들의 향연(그런말들은 미니홈피나 꾸미는데 사용하라구 제발)
(3)여러 정치인 혹은 조직들에 의해 내뿜어지는 가벼운 주례사 논평 혹은 사실 보다는 일방적 주장에 치우친 당파적 악다구니
(4)그 세계의 질서 수호를 자임하는 적지 않은 수의 모세들, 그들은 사람들에게 트윗계로의 안정적 진입 혹은 성공을 위해 자신을 거처야 한다는 것을 강조, 또 그런 행위들을 또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

즉 이런 여러가지 모습의 '불협화음'이었다.  

또한 트위터의 성공요인은 그 작동 매커니즘은 바로 "상호호혜성"에 대한 기대나 부담이 현저하게 줄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한국의 트위터에서 만나는 것은 한국적 변형. 즉 맞팔로윙의 횡횡과 모세들에 의한 팔로윙 늘려주기 등.. 그것이 트위터의 중요한 메커니즘 작동을 방해하고 있는듯 하다.

 
또 트위터의 메커니즘의 핵심은 "자신이 원한다면 그 누구의 얘기도 들을 수 있고, 또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하는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양자간의 자연스런 불일치와 간접성에 있다. 이것이 자신이 말을 듣는 집단과 말을 하는 집단간의 기묘한 공존-비동시적 동시성-을 가능케 하고, 그것의 효과는 여타의 논의의 공간들에서 나타나는 격렬하고 적나라한 부딪힘을 완화하거나 막아주는 작용을 하는 듯. 따라서 맞팔로잉의 추천과 확산 이를 권유하는 모세들은 글쎄다.

마지막으로 한국 주류사회나 기득질서는 미국과 같은 다양한 이해집단,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학문, 정치, 사회, 언론 조직 등이 아주 허약하거나 부재하다고 할 수 있어. 전체 권력/힘의 균형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기업(자본)과 국가는 강력한데 시민사회는 허약하다는 것(푸트남 식으로 말하면, 사회적 자본의 부족).
웹이든, 트위터의 터미널이던 결국 전체 한국사회를 축약하거나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수밖에 없어. 한국사회에 원래(originally)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희미하게 존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 난망할 것이다. 

이런 다소 우울한 첫인상에서 나온 엉뚱한 결론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지 않기 위해서. 특히 한국사회의 각 분야의 리더들과 대표선수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번역과 해석을 통해 전달되는 세계가 아니라 실제 세계를 알기 위해서.
미국 소비자들이 현대차에 죽고 못 살고, 유럽인들이 옴니어를 최고의 스마트폰으로 여기고, 영국 프리미어가 박지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비와 원더걸스가 미국 팝계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온갖 가십거리들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외국어 특히 영어를 잘 하는 것이 필요해. 엉뚱하고 우울한 결론.

어쨋든 과연 이런 상황 속에서 저자 카가 말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나의 그리고 당신의 트윗 배관을 우리는 뚫고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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