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내주신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이하 WS)의 창립3주년 전진대회 안내와 첨부된 논평 잘 보았습니다.
2. 논평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복지(국가)에 대한 두 가지 접근을 구분함. 전자(복지)는 국가가 그 시민들에 제공하는 혜택 내지 서비스의 집합, 후자(복지국가)는 이를 가능케하는 제도화된 체계로 이해.
둘째, WS의 지향은 후자(복지국가)에 맞춰있는데 반해, 박근혜의 그것은 기껏해야 시혜적 견지에서 양적 복지의 증가에 불과한 것.
셋째, 복지에 대한 어떤 그룹 또는 정치세력이 접근을 판별하는 준거는 결국 조세정책(감세냐 증세냐)이며, 감세와 '진정한' 복지국가는 공존할 수 없는 것.
넷째, 복지국가로 진전은 복지국가의 철학과 가치를 공유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의 형성과 연대로만 가능. 복지국가를 중심으로 단일대오의 '정치세력화' 만이 그간 민주파의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고, 박근혜의 '유사' 복지에 대항할 수 있음.
3. 이런 요약에 기초한 저의 인상 내지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복지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이분법적 도식화의 문제
- '복지 대 복지국가'라는 구분은 겉으로는 이상해보이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선별적 시혜로서의 복지(프로그램)"에서 "보편적 권리로서의 복지(entitlement)"로 발전해온 유럽의 역사적 경험과 여기에서 도출된 이론적 자원에 기초해 있다 여겨집니다.
- 문제는 영국의 경험에 압축되어있듯이, 양자 간의 관계의 성격이 대립적, 상호배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인 발전단계에 있어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지(프로그램)의 양적 누적이 일정한 임계점을 넘고, 그것이 사회적, 정치적 힘과 동력을 만들어 낼 때, 일어나는 질적전환이 '복지국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렇게 볼때, 내세울 만한 변변한 복지프로그램도 없고, 그 총량 역시 너무도 미미한 한국에서, 하기에 복지 프로그램의 광범한 수혜집단과 그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조직화가 사실상 부재한 한국에서, "단순한 복지프로그램 증가는 기만이다. 우리는 완전한 형태의 복지국가를 원한다"는 식의 접근은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그것이 어떤 의미있는 구체적 '사회적 힘의 관계'와 '유권자 지지시장(정치적 선호)의 변화'에 근거를 두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슬로건 이상이긴 어렵다 평가됩니다.
둘째, 이분법적 이해가 만들어내는 부정적 정치전략/전술
- WS에 있어 피아구별의 식별띠는 '감세냐 증세'냐이며, 정치적 투쟁의 주요 전장은 조세정책으로 옮겨집니다.
- 문제는 조세영역은 진보파가 가급적 피해야 하는 전장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감세를 중심으론 한 복지증대 전략/전술은 효과적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증세'는 언제나 또 어느 곳에서나 우월적 선거전략이나 구호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의 경험이 말해주듯이 조세정책은 가장 정치화/이념화 되기 쉬운 영역이며, 유권자 대중은 보수당과 민주당의 세금정책을 둘러싼 이념화된 전쟁에서 늘 일관된 선택을 합니다. 즉 증세 보다는 감세를 원하는 것이죠. 설령 그것이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이해에 반하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선거에서 "시민들의 돈을 더 걷어 더 좋은 정부를 제공하겠다"는 정당과 "돈을 더 걷지 않거나 덜 걷고라도 더 좋은 정부 제공할 수 있다"는 정당이 경쟁할 때, 대중들이 후자에 더 기울 것이란 예상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설령 대중이 후자의 주장이 불가능하거나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채더라도 말이죠. 그것이 시민 교육의 강화와 같은 나이브한 대책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 따라서, 조세정책(이슈)은 가급적 탈-정치화 해서, 보이지 않는 전문적 영역에 맡겨두고서 (마치 한국은행 금융위원들이 금리를 결정하듯)고 실제 노동정책/복지정책에서 싸움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또 유리할 것 같습니다.
셋째, 노동없는 정치세력화의 문제
- 최근 미국의 중간선거 이후 쏟아져 나오는 불평등 심화에 관한 논의들을 보면, 근래들어 미국이 급격하게 '바나나리퍼블릭' 혹은 '승자독식의 경제'로 전락케 된 핵심 원인으로 해당 시기 전개된 '노동의 조직력(정치력)의 약화'를 이구동성으로 지목합니다.
- 한국도 미국과 큰 추이에서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민주화 개방과 함께 형성된 조직노동과 이후 일정 기간동안의 폭발적 성장세가, YS정부시기까지의 한국 노동의 임금과 근로조건의 뚜렷한 향상과, 그 결과로서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득분배를 이끌었다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IMF를 기점으로 조직노동이 크게 힘을 잃으면서, 그 결과가 현재 한국의 '양극화' 혹은 '승자독식의사회경제'가 아닐까합니다.
- WS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복지국가를 위한 '정치세력화'와 주된 연대의 대상이 제도정당과 그 소속정치인, 시민단체 명망가, 그리고 유사-정치인에 준하는 학자들에 맞춰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논의에서는 노동문제에 대한 고민(노조 조직률의 문제, 비정규직문제)도 이를 담기위한 인격화된 대표성도 찾기 어렵습니다.
- 이런 이해가 틀리지 않다면 WS의 '복지국가'와 박근혜의 '복지증대'가 현실에선 별다른 질적 차이를 갖지 않을 듯 합니다.
넷째, 운동적 접근의 문제
- 이메일에서 잠깐 언급하셨듯이, 마지막으로 WS를 이끄는 이데올로그들의 이슈화 방법 내지 행태의 문제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 그것은 제가 최근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미국의 언론인/학자들의 크게 대조적이라 흥미롭습니다.
- 미국의 리버럴 이데올로그은 지식인으로서의 행태와 상향식 접근을 갖습니다. 그들의 고민은 미국이 당면한 사회경제적 문제들(불평등, 무역적자, 실업)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에 답하기 위해 직접 경험적 연구를 진행하거나, 그런 연구들을 섭렵합니다. 이런 지난하고 끈기있는 작업등을 통해 문제는 먼저 학문적으로 이슈화됩니다. 이후 관련 이해단체와 정치세력들과 교류하고, 그 이론적, 경험적 자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결과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슈화 합니다. 지식인의 문제의식으로 상향식으로 접근하는 것이죠.
- 이에 반해 한국의 진보적 이데올로그들은 미국의 그것과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 그들의 최우선적 관심은 특정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다가올 선거결과에 직접 맞춰집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 하고 피해야하는 것은, 어떤 사회의 참혹한 상태가 아니라, '박근혜 정부 출범' 혹은 '한나라당의 집권연장'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지식인이기보다는 정치꾼에 가깝습니다. 시민일반과 공동체 전반의 사회경제적 궁핍 보다는, 다음 정치적 주기에서 개인적 정치적/사회적 자원의 궁핍을 고민하고, 해법을 궁리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서 나온 것이 '무상급식'이고 또 '복지국가'입니다.
- 최근 진보파 일각에서 쏟아져나오는 '빅텐트론'이나 '국민의 명령' 등이 다가올 대선에서 한나라당과 맞서기 위한 조직적 전술이라면, WS의 '복지국가'는 내용적 전술정도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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