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0일 화요일

[긴글] 정점에 다다른 촛불시위 무엇을 할 것인가?

<from daum blog, 작성일 2008.6.10>

정점에 다다른 촛불시위 무엇을 할 것인가?
  
1. 정점에 도달한 촛불시위

촛불시위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어쩌면 그 정점은 지난 6월6일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다가오는 6월10일 조직의 힘을 빌려, 광고의 힘을 빌려, 입소문과 수많은 구경꾼의 힘을 빌려 훨씬 더 많은 인원을 동원 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6월6일 이전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모습일 것이란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누군가가 학수고대해온 촛불시위의 끝은 의외로 빨리 올는지 모른다.

따라서 이글은 어쩌면 많은 이들의 기대와 바람에 반할는지 모른다. 특히 지난 10년간의 내상으로, 유권자 시민의 보수성과 온건함에 대한 절망으로, 사태의 전개를 그저 관망하다, 뒤늦게 눈이 휘둥그레져 죽기 전엔 다신 못 볼 것이라 여겼던 광화문 일대에 펼쳐진 이 해방공간을 만끽하고 있는 조직운동세력들에겐 참으로 섭섭한 얘기일 것이다. 그들에게 필자의 글의 첫 단락은 그래서 불길하고, 재수 없고 혹은 불온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당신들이 중요시하는 가치와 목표들에, 물론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차이라 하면, 그다지 과격하지 못하고, 상상력이 뛰어나지도 않으며,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기에 스스로 냉정하고 무책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굳이 사태의 주변자인 당신들에게 서두에서 한 마디 하는 이유는, 앞으로 그 누구보다 당신들의 행동들이 사태전개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신들과 나의 차이는 아마도 전술상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기를 고대한다.

이글은 지난 한달 간 전개된 필자나 당신들이 아닌 시민들이 내걸어온 여정을 돌아본다. 그리고 오늘의 위치를 점검한다. 그리고 하나의 끝을 제안한다. 그러나 미리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가 말하는 끝은 특정의 시공간상의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점이기보다는 선이다. 하기에 그 끝은 지금까지 힘들게 얻어온 것을 구체화하고 시민들이 승리하는 경험을 갖는 시작이다.

2. 어떻게 여기까지 올수 있었나?

무엇이 현재의 사태를 가능케 했나? 이념적으로 보수화되고, 지역주의와 사사로운 개인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최소한의 도덕성과 자질 그리고 기본적 매력조차 갖추지 못한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뽑을 만큼 비합리적이고, 타락한 것으로 “묘사되었던” 한국의 시민유권자들은 어떻게 백일도 채 지나지 않아 촛불하나 들고 거리로 몰려나와 “이명박 퇴진”을 서스럼 없이 외치게 되었나?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나? 가장 먼저 이 질문이 암시하듯, 그간 언론인, 정치평론가, 학자, 정치인 그리고 언론인들에 의해 유포되어온 한국 시민유권자들에 대한 이 같은 지배적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글의 전반적 흐름과 의도를 흐리지 않기 위해 한국 유권자에 대한 지배적 해석과 이에 대한 비판은 글 뒤로 돌린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한국의 유권자들에 대한 일반적 시각과는 달리, 선거 시 그들에게 제공된 선택지와, 투표행위 그 자체가 내재한 갈등구조가 고려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인 광범한 기권에 대한 분석이 포함된다면, “비합리적이고 타락한” 유권자라는 지배적 해석은 지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두 번의 선거결과가 말하는 것은 선거당시의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평가 즉 회고적 징벌이 압도했다는 것과, 이명박후보에 대한 선거지지 역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취약하기 그지없다는 점이다. 즉 한국의 유권자는 비합리적이지도 타락하지도 않았다. 이 처럼 교정된 시각은 이번 사태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반대방향으로의 성급한일반화에 대해 경고한다. 특히 야당과 조직운동세력들에서 이런 경향은 쉽게 발견된다. 그들은 갑자기 유권자 다수가 자당의 지지자가 된 것처럼 오인하거나, 혹은 대중들의 급진성, 좌경성이 크게 고양되어 자신들의 운동의 이념과 가치에 광범한 대중들이 동의하는 듯 착시하고 또 흥분한다. 이들은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저지른 동일한 오류를 범할 확률이 높다.

본격적으로 사태를 여기까지 밀고 온 추동력을 살펴본다. 이번 사태에 대해 이미 방송과 신문지면들 그리고 많은 정치논평자들에 의해 수많은 원인과 설명들이 제시되었다.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설명은 이명박대통령 개인적 특성에 집중한다. 그의 CEO라는 출신배경, 국정운영과 기업운영간의 차이의 몰이해, 잇따른 현(現) 정부의 페쇄적, 상층편향적 인적구성 그리고 전혀 정치지도자 답지 않은 말과 행동거지 등의 개인적 스타일 등, 모두 일리가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이슈에 집중한다. 쇠고기 이슈는 한 마디로 치명적인 것으로 알려진 광우병 위험이 완전히 통제, 제거되지 않은 채 미국산 쇠고기를 들여오겠다는 정부의 결정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그것이 파괴적인 이슈인 이유는, 정부의 발표대로 그 확률이 극히 낮다고 할지라도, 늘 접하게 되는 먹거리에서 자신들과 가족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우려를 확산된 데 있다. 아울러 그것이 한 개인의 노력으로 쉽게 그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많은 시민들의 강도 높은 저항을 불러왔다. 또한 광우병쇠고기 수입의 위험과 불안 앞에는, 돈의 힘을 빌려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극소수의 상층계급들을 제외한다면, 시민들 간의 연령, 지역, 성별, 소득에 있어 차이는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보편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쇠고기이슈는 촉발요인이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강조한다. 다른 이슈들, 예컨대, 대운하, 수도·의료 민영화 등 이 정부에서 계획되고 집행예정이 정책들이 하나같이 서민들의 불안과 우려를 자극했고 이것이 쇠고기 이슈를 기폭제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보다 구조적인 설명도 제기된다. 길게는 지난 10년 혹은 짧게는 노무현 정부 시절, 집권그룹들에 의해 언표화된 말과는 달리 한국의 정치경제는 IMF위기 이후 사실상 시장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로 지도되었고, 그로인해 시민들의 삶은 시장의 무자비함에 온전히 노출, 방치되어 왔다. 그 결과는 중산층의 붕괴, 저소득층의 만연, 비정규직 급증, 극소수 상층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노동인구의 소득과 고용불안 등을 핵심으로 하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다. 나아가 그것은 자살, 이혼, 강력범죄의 급증 등 사회해체로 이어졌다. 즉 이 설명은 유의미한 “정치적 제약” 없이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도 생략된 채 지난 10년 민주정부들에 의한 사회경제정책의 문제들이 누적된 결과가 역설적으로 이명박정부의 집권으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설명은 “민주파의 덫”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즉 지난 10년 실제 진행된 것은,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근본주의적 정책과 그 결과였다는 점에서, 기실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의 문제의 핵심의 근원은 “더 많은 시장”에 있었는데, 새로 집권한 보수세력들이 이를 모른채 (알고 싶지 않은채) “잃어버린 10년” “좌파정권 종식” 운운하며, 또 다시 “더 많은 시장”을 강조하고 과격하게 실행하니, 다수의 서민대중이 감내할 어떤 임계점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글에서 이상 언급된 요인들 가운데 어떤 것이 보다 더 중차대한 것인지, 혹은 근본적인 것인지 굳이 분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면 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일리가 있음을 넘어서 이번 사태는 이 모든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6월6일 시청 앞에 운집한 20만이라는 물리적으로 헤아리기 불가능한 촛불과 그 다채로움은 이명박대통령과 주변사람들이 생각하듯 혹은 생각하고 싶듯, 단일의 지도(指導)로, 특정한 이념과 이해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사태의 요인이 간명치 않고 복합적이라는 것, 그것이 어쩌면 여태껏 집권세력과 일부 신문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충수를 남발하고 우왕좌왕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필자는 하나의 설명을 더하고 싶다. 그것은 이번 광범한 사람들의 자발적 촛불저항이 “한국 민주주의의 작동방식과 내용에 대한 항의”이며, 이를 위한 시민들의 느슨하지만 강렬한 연대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필자가 추상적이고 막연한 “민주주의”를 가져온데 대해, “밥 먹여주지 않는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유권자의 염증을 몰라서 그러는가 하며 타박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폭발성과 보편성의 추동력은 필자가 보기에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내용과 깊이 관련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기대하는 것과 달리 소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관념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필자가 한국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항의라 말할 때의 민주주의는 절차적 수준과 그 질이다. 민주화이후 심지어 그 이전에도, 한국시민들에게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약간의 퇴보도 간과하지 않고 행동한다. 대표적으로 1997년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이다. 물론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개정된 내용 역시 저항의 핵심요인이었음에는 분명하지만, 중산층을 포함한 폭넓은 대중의 분노와 이에 대한 노동계의 총파업투쟁에 대한 지지로 이끈 것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자행된 ”날치기”라는 형식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시 동일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보수 야당들의 과반연합에 의한 다수의 폭정(tyranny of majority)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심판이었다. 이것은 급조된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원동력이었다. 이번 사태가 민주주의의 문제라는 것이 비단 6월1일 경찰의 폭력진압에서 시민들이 과거 5공의 체취를 느껴서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 상징이었다. 그보다는 시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절차와 내용으로 결정되는 것. 그리고 그 결정이후에도 이를 기만과 속임수로 모면하려는 현 집권세력들이 한국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한 항의로 해석되어야 한다. 인수위 이후 지속된 이명박정부의 행태가 시민들에게 각인시킨 요점은 현 정부에서 이뤄지는 중요한 의사결정의 당사자들-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 관료, 그리고 경찰-이 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민의 이익과 이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주권자인 시민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를 비추기보다는 기만하고 조롱한데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즉 민주주의 절차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주권자들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 사태의 폭발성과 보편성의 핵심요인은 아닐까? 특히나 의미 있는 것은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시민들의 이해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 단계 더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시민들은 대체로 최소요건의 절차 즉,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 내지 의사결정에 있어 기본요건에 있어서의 큰 하자가 아니라면 크게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선거를 통해 정당하게 집권한 정부라 할지라도, 그것의 권력행사와 주요 정책결정이 선거 뿐 아니라 일상적인 정치과정에서도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책임지고 응답할 것을 요구한 점이다. 아마도 이것은 다음 선거, 그것이 대통령이던 국회의원이던, 투표를 통해 현 정부를 심판할 기회가 너무도 멀리 있다는 절박함과, 변변한 야당마저 갖고 있지 못한 무력함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어쨌든 이점과 관련해서 이번 촛불시위는 한국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학습할 계기이며, 그 자체로 성과라 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더불어 이를 촉발시킨 이슈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다. 그간 정부와 여당 그리고 관료들이 알아서 관장하는 것으로 치부되던, 쇠고기, 의료, 환경, 민영화 등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한국유권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소위 “민생이슈”들이다. 한국유권자들의 삶과 관련된 구체적 이슈에 대한 정치적 반응은 다시 이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기존 정당을 자극하거나 혹은 새로운 정당을 출현시킬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이슈를 매개로한 민주주의 작동방식에 대한 항의가 대의제민주주의가 아닌 무언가의 실질적 수준에서의 요구로 혼동되어선 안된다. 현 수준에서 볼 때 시민들 다수가 대의제민주주의, 자본주의경제체제, 심지어 신자유주의와 무역개방 그 자체에 반대한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요컨대 필자의 촛불시위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말하는 것은 대의제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의 파괴적 결과에 대한 항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무엇이 문제인가?

6월 8일 촛불시위에 참가했다. 그것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이리저리 광화문 앞을 돌아본 필자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고, 불안감은 커졌다. 사실 그것이 이글을 쓰게 만든 직접적 요인이다. 그날의 광경을 묘사해본다. 그날 모여든 시민들은 더 이상 즐겁고 유쾌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각하고 무거웠다. 시민들은 공권력하고 부딪힌 만큼이나 빈번하게 또 강렬하게 시민들끼리 부딪혔다. 그들 간의 작은 이견들은 쉽게 심각한 갈등과 충돌로 전화되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 있었다. 이전까지 집회현장을 채웠던 어린 학생들의 재기발랄함과 “까르르” 하는 웃음들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근심이 가득했다. 그곳은 바로 어제까지 민주주의의 실험장으로 극찬해 마지않던, 다채로운 개인과 집단들의 다양한 요구와 퍼포먼스의 장이 아니었다. 엄숙한 학생회의 깃발행렬이 재현되었고 어정쩡하게 위치한 방송차량의 획일적 구호와 노래가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곳곳에서 일부 시민들이 전의경들을 대상으로 또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과도한 적의와 악다구니가 퍼부어 대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그러면서 촛불집회 참여자는 자발적 시민에서 조금씩 동원된 대중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구호와 손짓은 힘을 잃고 의미 없이 반복되었다. 가장 큰 특징은 시위대와 시민간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 촛불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시위참가자와 인근에 놀러온 시민 간에 구분선이 존재하지 않다는 점이다. 시청으로, 종로로 그리고 광화문으로 볼일 보러 나온 사람, 놀러 나온 사람 모두 잠재적 시위대였다. 그들은 볼일이 끝나면, 술자리가 끝나면 쉽게 시위대에 어울렸고, 시위대 역시 언제든지 부담 없이 그 자리를, 다른 동료들에게 맡겨두고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간에 분획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나?

촛불시위에 참여한 여러 시민과 단체 간의 이견(異見)과 시위의 모습이 변화된 가장 큰 원인은 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한 달이나 지속된 전 국민적 분노와 항의에도 여전히 어린 전의경들을 방패삼아 시민들을 협박하고 조삼모사식 대책으로 조롱하는 이명박대통령과 집권세력의 행태는 참여자들의 분노를 점점 더 자극했다. 그렇게 분노한 시민들이 많은 대중들이 군집한 상황에 놓일 때 그들은 “뭔가 해야겠다”는 강한 강박감을 갖는다. 이런 식의 “평화적인” 방식이라면 “이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었다. 그것은 다시 조급함과 과격함으로 전화된다. 그것은 “물리적 수단을 동원한 청와대 진�”이라는 타개책으로 쉽게 집중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명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 않느냐. 가야된다. 가서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 최초의 분노가 이 지경에 도달하면, 그들의 적의의 대상은 비단 이명박과 경찰에 특정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수단에 동의하지 않고, 그 진정성을 몰라주는 현장 지도부와 시민들에게도 향한다. 필자가 본 어떤 학생은 ”시민들은 청와대 진격하고 또 맞고 있는데, 이렇게 맥주나 들이키고, 마치 밤 소풍 온 것처럼 뭐하는 짓들이냐고, 왜 음악을 틀어대냐“며 주변의 시민들과 매섭게 대책위를 몰아세운다. 어떤 아저씨는 버스에 오르는 시위참가자를 향해 ”비폭력“과 ”내려와“를 외치는 어린 학생들은 매섭게 꾸짖는다. ”무슨 시위대가 경찰편을 드냐고 저 사람을 응원해야 된다고.“

그날 “대책위”는 난감한 듯 해 보였다. 그들은 이전과 달리 방송차량을 철수하지 않고, 집회장에 어정쩡하게 위치시켰다. 따라서 전술과 관련한 불만은 방송차량으로 집중된다. “폭력”, “비폭력” 양자 간의 대립이 따라서 방송차를 중심으로 격화된다.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래도 저래도 욕 먹는다. 그래서 그들이 한 것은 양쪽의 요구를 동시에 받는 것이었다. 때로는 청와대로 가자고, 버스를 끌어내자고 “으샤, 으샤” 선동하다가 이내 “비폭력”을 외친다.

6월 6일 이후 우리는 지고 있다. 어쩌면 촛불시위는 변질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적인 원인은 이명박정부가 아니라 우리내부에 있는 듯하다. 우리 안의 분열과 불신, 그리고 갈등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떠한 방법(물리력)을 써서라도 청와대로 가겠다”는 전술과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정리와 합의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은 청와대진격전술의 폐기일 수밖에 없다.

4. 왜 청와대로 가려는가?

다시 말하지만, 최근 촛불시위와 관련해 시민들 내부의 균열, 갈등 그리고 불신은 소위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한 청와대 진격” 전술과 크게 관련된다. 이에 대한 논의와 합의는 그래서 긴요하고도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청와대로의 물리적 수단을 동반한 진격투쟁” 전술은 그것이 시민들의 분노와 화가 어느 정도인지를 반영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갈수도 없고 갈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먼저 왜 갈수 없는가? 지난 6월1일 발생한 청와대 앞(경북궁 역)으로 진출은 우발적 결과였다. 예상과 달리 많이 모인 시위참가자와 세 갈래로의 가두행진, 그리고 이에 대한 경찰의 예측 및 대응실패의 복합적 결과였다. 예상치 못했기에 사직동 방향의 대비가 기본적으로 허술했고, 거기에 순간적인 경찰의 차량기동에 있어 실책이 더해졌다. 그 순간을 시위대가 때마침 돌파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것은 그날 진압이 그동안의 상대적 온건한 진압기조를 뒤엎고, 무리수와 여론의 역풍을 자초하면서까지 강경기조로 나서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된다. 그러나 그날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경찰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경찰버스에는 하루가 다르게 온갖 종류의 보완책들이 추가되고 있다. 이를 물리적으로 뚫겠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시위참여자들의 엄청난 신체적 상해와 연행과 구속, 그리고 전의경들의 상해를 동반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돌파한다고 해서 청와대를 가서 이명박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청와대 인근이다. 거기선 어쩔 것인가? 이제는 청와대 경호실과 어쩌면 군(軍)을 뚫어야 한다. 그들이 초청하지 않는 한 이런 위험과 손실을 무릅쓰고 갈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왜 갈 필요도 없는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주장과 요구, 그리고 분노와 화를 풀어내고 시민들과 소통하기에 충분한 광장을 갖고 있다. 촛불시위가 매일 개최되는 시청광장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세종로는 이미 권력의 심장부, 거기도 역시 청와대 인근이다. 꼭 효자동, 삼청동이라는 굳이 협소하고, 경찰에겐 민감한, 따라서 위험한 장소에 갈 필요는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곳으로 진출하는 것의 유일한 효과는 가능한 한 청와대에 접근하여 이명박의 수면을 방해함으로써, 시민들이 잠 못자는 것을 얼마간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둘째, 너무나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한다. 말했듯이 경찰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머리와 힘을 투여해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이를 뚫기 위해선 많은 시민들 그리고 또 다른 우리의 시민들인 전의경들의 크나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누군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희생을 감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셋째, 청와대진격 투쟁이 가져온 혼란과 희생은 곧 만만찮은 역풍이 될 것이다. 조중동은 촛불시위의 변질과 폭력성을 노래할 것이다. 문제는 조중동이 아니다. 최소한 어제정도의 광경을 접했던 수많은 온건한 시민들에게 촛불시위는 더 이상 아이들을 동반하고 나올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런 고도의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에 이번 촛불집회의 상징이라 할 청소년들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 나아가 이러한 역풍은 시민과 과격시위대를 분리시킨다. 참가자 내부에서 “이건 아니다”란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시민다수와 분리 고립되는 순간 과격한 시위자들의 연행은 더 이상 신나는 “닭장투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의 행군”이 된다. 이를 감내할 사람은 많지 않기에, 급격히 강경파 뿐 아니라 촛불 전체는 감소할 것이며, 신념과 확신에 찬 소수의 강경파는 참혹하게 공권력에 짓밟히고 산화할 것이다. 그때 여론은 이미 그들을 48시간 만에 풀려나오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넷째. 그들이 나오게 하면 된다. 굳이 안 나온다고 쳐들어갈 필요가 없다. 굳이 이명박이란 개인이 시위대중 앞에 나타날 이유도 그래서 해결될 문제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런 쇼를 경계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미 변복과 변장을 한 채 청와대 참모들, 한나라당 의원들 수많은 집권세력들이 다녀갔을 것이다. 그리고 민심을 전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시민의 힘에 저항하고, 거짓말로 때우고, 인적쇄신의 쇼를 준비하는 그들을 보면, 그렇게 정탐하고 돌아간 이들이 촛불시위가 내분으로 곧 자중지란을 일으킬 것이라 보고해서가 아닐까?

요컨대, 청와대를 갈수도 없고 또 갈 필요도 없다. 따라서 시위대의 분열과 불신, 그리고 갈등의 원천인 “청와대진격” 전술을 즉시 폐기되고, 시민들과 네티즌들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주장해온 시민들 내지 단체는 이젠 자제해야 한다. 철저하게 비폭력 전술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단순히 이 자리를 지키고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오히려 경찰버스를 끌어내는 것보다, 현 집권세력에게 더 한 두려움의 원천이다. 굳이 밤마다 땀과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다른 공간을 노리기에 앞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을 울분과 비장미가 아니라 다시 웃음과 해학으로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에 광화문은, 서울광장은, 아니 청계광장도 충분하고 소중한 장소이다. 강권력으로 무장한 권력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그에 상응하는 물리력이 아니다. 물리력에 대한 시민들의 철저한 비폭력저항과 조롱이다. 물리력 대 물리력 그것은 집권세력들이 원하는 구도이다.

5. 온라인, 오프라인의 두 지도부에게

이번 촛불집회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특정의 지도부와 배후가 존재하지 않는 자발적 흐름이었다는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누구의 수고도 없이 절로 이뤄져 온 것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지난 한 달간의 촛불시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두 개의 상황실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직접 조직하고 지도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유지되는 데 지원조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지도부가 아니라 상황실이다. 다들 알겠지만, 온라인 상황실은 인터넷 포탈 다음의 “토론의 성지” 아고라다. 그리고 오프라인 상황실은 광우병국민대책위다. 아고리언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밤에 잠들지 않고 24시간 상황실을 유지한다. 그들의 관심과 역할은 다양하다. 쇠고기 협상 내용과 과정의 문제점의 적극적 폭로한 것도, 조중동의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무력화시킨 것도, 폭력진압의 실상과 가해자들을 고발해 공권력의 오남용을 저지시킨 것도 다 그들의 활약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고라는 현재 촛불시위의 모습을 만들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의 광우병국민대책위의 수고도 평가되어야 한다. 특히 촛불시위 초기 자신들을 앞세우지 않고, 시민들에게 저항의 공간을 온전히 제공한 점은 평가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특정의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는 것을 절제하고, 그것이 전 국민적 축제의 장으로 변모하는데 광우병국민대책위는 크게 기여했다. 다양한 시민들의 요구와 의견,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불신과 불만에도 여전히 수고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은 점도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 두 개의 상황실이 흔들리고 있다.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고 있다. 어쩌면 앞서 묘사한 6월8일의 변화된 촛불시위 광경은 두 개의 상황실의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의 원천은 다시 “물리력을 동반한 청와대 진격” 전략과 관계된다.

따라서 필자는 두 상황실 모두에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두 상황실 모두 6월 6일 이전 촛불시위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지도부이기를 자임하지 말고 그동안 충실해 해왔던 상황실의 역할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지도의 역할은 시민들에게 맡겨라. 시민들은 아마 스스로 촛불시위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두 상황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청와대진격투쟁“ 전술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촛불시위가 계속 ”비폭력축제“의 장이 될 것임을 참가자들에 홍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착되기 위해 한시적으로 대책위는 참가조직이나 시민단체 등을 대상으로, 아고라는 자원봉사단을 모집해 경찰과의 대치선에서 불필요한 폭력과 자극행위를 할지 모르는 일부 시민들을 자제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지나치게 시위현장에서 격화되곤 하는 반(反) 촛불시위자, 조중동/SBS 기자, 심지어 사복경찰에 대한 적의도 자제되어야 한다. 그들의 활동은 촛불시위가 건강하게 예전처럼 진행된다면 그 활동의 위력은 미미하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과도한 경계가 쉽게 참가자들간의 불신을 조장하는 듯하다. 이참에 그들도 촛불시위 공간내에서 용인되고, 어울리도록 할 필요가 있다.
굳이 각 조직별로 몇 가지 제언을 첨부한다.

<광우병대책위>
어쩌면 6월6일 집회장에 위치한 방송차량의 어정쩡한 위치는 대책위의 현재 입장을 잘 요약하는 듯하다. 스스로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이번 촛불시위는 특정의 단체가 지도할 수도 지도하려 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대책위가 할 일은 철저히 상황실과 행사진행의 역할에 한정되어야 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에게 전의경들에게 건넬 수 있게 장미꽃과 초코파이를 나눠주는 것은 어떨까? 집회 참여한 여성들을 위해 간이화장실을 임대하거나, 주변 건물들에 협조요청을 하는 건 어떨까? 방송차는 만약을 대비해 가장자리에 배치하되, 긴급한 상황 변경이나 미아찾기 등에 제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시민들을 방송차의 구호와 노래로 집중화시키기 시작하면, 금새 시민들의 자발성과 활력은 떨어지고, 재미없고 획일적인 소위 “권”들의 집회로 전락한다. 또한 그것은 스스로 지도부임으로 자임하는 것으로 비춰져 시민들의 불필요한 갈등과 요구를 집중시키는 요인이다. 광우병쇠고기에만 반대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공연단체에 거리 공연, 사진전 등의 개최를 부탁하면 어떨까? 그리고 주변에 음주가 과하신 분들 이 있으며 대책위가 구성한 자원봉사단들이 어르신들 모시고 얘기 들어주는 것은 어떨까? 그분들은 대체로 누군가와 얘기를 싶어 한다. 필자가 보기에 역할을 상황실로 한정할 때 의외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당의원들과 여당의원들을 소환해 보는 것은 어떨까? 굳이 발언할 기회를 막을 이유는 없다. 나와서 그들이 시민들에게 우리당은, 나 국회의원 아무개는 무엇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게 만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고라>
이따금 들어가 봐서 확신할 수 없지만, 또한 아고라의 입장이 하나로 요약되지도 않지만, “물리적 수단에 의한 청와대 진격”의 아이디어는 대체로 아고라를 중심으로 확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아고라의 자정력을 감암할 때, 또 6월8일의 경험으로 그 전술은 폐기되고 있는 중이리라 믿는다. 그 전술만 제외한다면 대체로 아고라는 지금까지의 활동들을 더욱 열심히 하면 될 듯 해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우려는 언급될 수 있다. 첫 번째는 폭력진압경찰의 신상명세를 올리는 등의 사적제제(보복) 행위이다. 이는 아무리 가해자라 할지라도 그 기본적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러한 행위를 한 네티즌 역시 범법자가 된다는 점에서 자제되어야 한다. 이미 올려진 것도 자신삭제해야 한다. 법치국가에서, 그 작동이 시원치 않을지라도, 어떠한 경우에서든 사적제제는 용납될 수 없음은 명확하다. 그것이 용납되면 예전 한화그룹의 김** 회장과 같은 행위도 동일한 논리로 허용되며 이는 “법이전”의 사회로 회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6.1 폭력사태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함께” 혹은 “국민대책위”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공격 등이다. 처음 필자에겐 이들에 대한 아고라의 적의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필자가 알게 된 적의의 이유 역시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왜냐면 아고라의 다함께 혹은 국민대책위의 적의의 내용은, 그들의 대오의 힘을 문화제로 소진한다던지, 혹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두행진을 몰고 간다던지, 청와대 진격투쟁의 요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뚱하게 그들을 프락치로 몰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과격한 투쟁전술을 받지 않는 이유는, 오랜 집회경험의 노하우로 그것이 위험하면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집회시위의 목적은 상대방에 대한 타격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선전과 다음으로는 집회참가자들간의 연대감의 형성에 있다. 그리고 이번집회의 경우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축제의 기능이 추가된다. 그들이 가진 이념과 사고가 보통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혹은 그 방식이 고리타분하고 참신하지 못해 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정부나 경찰의 프락치는 아니다. 아마도 지금은 시민들의 힘이 너무 강해 검찰과 경찰이 손을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힘이 사라진 뒤 예전처럼 공안정국이 형성된다면, 가장 먼저 타겟이 될 이들은 대책위와 다함께 사람들일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지도할 것, 특히 폭력시위를 주도할 것을 요구해선 안 된다. 그것은 참으로 위험하고도 무책임한 주장이다.

<노조, 학생 등 운동단체들에게>
최근 촛불시위의 변화는 그동안 관망하던 학생단위들 혹은 운동조직들의 조직적 결합과 때를 같이해 일어난 듯 보인다. 그러나 이번 촛불시위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지지 속에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했듯 이슈가 갖는 보편성과 참가자들의 합의에서 비롯된다. “고시무효”, “전면재협상”, “민주주의 지키자”, “이명박과 한나라당 반대”가 대표적이다. (※필자는 이명박 물러나라, 퇴진, 하야 등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구호를 문자 그대로 해석치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항의와 반대의 수준이 높다는 것과 아울러 그러지 않으려면 시민의 말을 들어라, 즉 정책을 바꿔라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또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전개는 우려할만하다. 그간 집회참가자의 느슨한 연대를 가능하게 했던 보편적 이슈에 온갖 단체에서 슬그머니 끼워 놓는 이슈들이 뒤섞인다는 것이다. 이는 준비되지 않는 참가자들을 기본적으로 불편하게 만든다.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 슬그머니 끼워진 이슈들에 대해 필자는 대체로 동의한다. 또한 외치는 구호는 오로지 “협상무효”, “고시철회” 뿐이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하나의 획일성에 불과할터이니말이다. 다양한 구호와 요구들이 넘실대는 것 그 자체는 장려할 만하다. 따라서 문제는 제기하는 이슈의 내용 그 자체나 참가자들의 공감도가 낮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 이슈들이 갖는 성격 즉 제시되는 방법의 문제다. 대표적으로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 반미 등의 소위 “반”자 돌림구호이다. 이런 이슈들은 찬성 혹은 반대라는 양자택일의 구도를 참가자에게 제시한다. 이를 둘러싼 갈등은 기본적으로 찬성과 반대라는 두 진영 간의 적대적이고, 화해할 수 없는 대결구도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 갈등은 따라서 전부 아니면 전부식의 제로섬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이슈가 압도하는 집회시위의 공간은 그래서 상대와의 공존이 아닌 절멸을 꾀하는 전쟁에 준하는 적대적 진영간의 전장으로 쉽게 전환된다. 여기서 가장 유력하고 효율적인 전술은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뿐이며, “청와대 진격투쟁”, 혹은 “공권력에 대한 고의적 타격”은 이런 인식의 결과물일 것이다. 이런 구호와 축제의 장은 쉽게 공존할 수 없다. 패러디와 해학이 넘실되던 그 광장은 비장미와 울분이 압도하게 된다.

하기에 이번 촛불집회를 수단으로, 특정 정파와 조직들의 이념과 가치의 선전의 장으로, 이해와 요구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해선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촛불시위에 참가해서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시민들의 힘과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겸손하게 배워라. 어떻게 물리력 없이도 과도하게 비장하고 엄숙하지 않으면서도, 큰 자기희생 없이 즐기면서도, 이 정부에 두려움과 타격을 줄 수 있는가를 배워가기를 희망한다. 이번 촛불시위에서 최소한 합의될 수 있는 요구는 결국 재협상과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시키라는 것 이상이기 어렵다.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면, 또한 이번 촛불시위를 계기로 그간 분리고립된 사회운동진영이 광범한 시민대중과 함께 동감하고 호흡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욕심내지 말고 조급해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꼭 말하고 싶은 자신들의 요구가 있다면, 시민들의 언어로 즉 “반”자 빼고 표현해 보라.

6. 마치며

예상했던 대로 필자가 돌아온 이후 사태는 과격하게 치달았다.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떨어져 나갔을는지 모른다. 내일부터 그동안 잠잠했던 보수파들의 공세가 거셀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 필자가 하루 종일 이글을 쓰던 오늘 우려했던 폭력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내린 비는 참으로 반가운 것이었다. 이 비가 최근 급격하게 변화해가는 촛불시위 참가자들의 불신과 갈등을 쓸어가고, 일부 시민 단체의 조급성과 과격성을 진정시키기를 희망한다. 사실 서두의 분석을 넘어서는 제언에 해당하는 부분은 어쩌면 과도하고 불필요한 것일는지 모른다. 또한 필자는 기본적으로 시민대중과 네티즌들의 건강함과 자발성을 대체로 신뢰하는 반면에, 기성 운동세력들의 이념적 급진성과 방식의 구태의연함에는 과도하게 비판적이다. 따라서 이글에서 언급된 운동세력에 대한 비판은 어쩌면 편파적이고, 주제넘고 무례한 것일 수 있다. 다만 한 시민의 진지한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길 소망해본다. 6월10일을 촛불시위가 얼마간의 우려를 씻고 시민저항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길 진심으로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6.10이 촛불시위의 사실상의 종결의 점이 될지 새로운 시작의 선이 되는가는 아마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  이글은 6월 8일 밤 쓰여졌다. 한참이나 망설이다 올린 것, 사실 이 순간에도 뉴스로 발행하는 것이 잘하는 건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이 글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운동(직접행동)일반의 한계와 정치의 부재가 만들어 낼 예정된 불길함, 특히 "비폭력"의 구호로 압축되는 중산층적 경향과 그것이 내포하는 급진성, 사회경제적 저변계층에 대한 잠재적 적의와 불편함 등이 지적되지 못했고, 아고라에서 발견되는 어떤 "위험한"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지적되지 못했다. 스스로 중산층적 경향의 시각으로 조직운동을 바라본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방어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맘에 안드는 것은 당일 나의 심리적 상태에 지나지케 영향받아 글이 너무 감성적이고, 방법에 있어 계도적이라는 것이다.  추후 글들을 통해 자기비판하고 보완한다. 아직 배우고 있으니 말이다.


‡전체주: 이글은 학술적 글이 아니라, 일반독자들을 대상으로 시기적 요구에 긴급히 대응하기 위해 현안분석과 제언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독해의 편의를 위해 참고문헌과 주는 과감히 삭제했다. 대표적으로 필자의 논의는 고려대학교 최장집 교수의 최근 책과 글,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의 글과 칼럼 등에 별도의 인용없이 크게 의존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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