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30일 월요일

[긴글] 한국민주주의의 허약한 정치구조적 기반



2008년 1학기. 최장집 교수님 [국가론] 기말페이퍼

한국민주주의의 허약한 정치구조적 기반
  
박성진 (박사과정) 


Ⅰ. 문제: 강력한 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 

1. 촛불정국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

현재 목도하고 있는 백일을 갓 넘긴 이명박정부의 초상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체제수준의 위기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운위될 정도로 현 정부의 정당성과 작동능력에 있어 심각한 훼손이 발생했다. 이것의 직접적 요인은 누구나 동의하듯 절차적, 내용적 기본을 갖추지 못한채 이뤄진 정부의 쇠고기합의와 이에 대응해 그 항의의 크기와 정도를 증대시켜온 시민들의 촛불집회이다. 대체로 그것은 광범한 시민들에 삶(여기서는 건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부정책의 내용과 과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 분노와 그리고 항의의 직접행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단지 ‘쇠고기’라는 먹거리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이란 단일 요인만으로, 불과 백일 전 선거에서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보냈던 동일한 시민들의 상당수가 거리로 몰려나와 “정권퇴진 구호”까지 서슴없이 외치게 된 현 사태를 설명할 순 없다. 그렇다면 사태를 여기까지 밀고 온 추동력은 무엇인가? 

이번 사태에 대해 이미 방송과 신문지면, 그리고 토론회 등을 통해 많은 논평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설명은 이명박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현 대통령의 대기업 CEO출신이란 배경, 국정운영과 기업운영간의 차이의 몰이해, 잇따른 페쇄적, 상층편향적 인적구성 그리고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과 행동거지 등의 개인적 스타일 등이 주로 지적된다. 다른 이들은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이슈에 주목한다. 쇠고기 이슈는 한 마디로 인체에 치명적인 광우병의 위험이 완전히 통제, 제거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를 들여오겠다는 정부의 결정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그것이 파괴적일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발표대로 그 확률이 극히 미미하다 할지라도, 늘 접하게 되는 먹거리에서 자신들과 가족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확산된 데 있다. 아울러 그것이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쉽게 그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많은 시민들의 직접 집단행동에 나서게 된 중요한 요인이다. 광우병쇠고기 의 위험과 불안 앞에는 돈의 힘을 빌려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극소수의 상층계급들을 제외한다면, 시민들 간의 연령, 지역, 성별, 소득에 있어 차이를 거의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은 보편적 성격을 갖는 이슈라는 설명이다. 

다른 사람들은 쇠고기이슈는 촉발요인에 불과하며 그것이 전부는 아님을 강조한다. 다른 이슈들 예컨대 대운하, 수도·의료 민영화 등 현 정부에서 계획되고 집행이 예정된 정책들이 하나같이 서민들의 불안과 우려를 자극했고 이것이 쇠고기 이슈를 기폭제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보다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춘 설명도 있다. IMF외환위기 이후 두 차례의 민주정부 동안 집권그룹들에 의해 언표화된 말과 달리 한국의 정치경제는 사실상 시장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로 지도되었고, 그로인해 시민들의 삶은 시장의 무자비함에 온전히 노출, 방치되어왔다. 그 결과는 중산층의 붕괴, 저소득층과 비정규직의 급증, 극소수 상층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노동인구의 소득과 고용불안 등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이다. 나아가 그것은 자살, 이혼, 강력범죄의 급증 등 사회해체 현상에 직면할 정도로 악화되어왔다. 유의미한 “정치적 제약” 없이 그리고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마저 생략된 채 지난 10년 민주정부들에 의한 사회경제정책의 문제들의 누적된 결과가 역설적으로 이명박정부의 집권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런 해석은 “민주파의 덫”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지난 10년 실제 진행돼 온 것은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근본주의적 정책과 그 결과였다는 점에서, 기실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의 문제의 핵심의 근원은 “더 많은 시장”에 있었는데, 새로 집권한 보수세력들이 이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채 “잃어버린 10년” “좌파정권 종식” 운운하며, 또 다시 “더 많은 시장”을 강조하며 과격하게 실행하니, 다수의 서민대중이 감내할 수 있는 어떤 임계점을 건드렸고 폭발했다는 것이다. 이상의 언급된 요인들 중 어떤 것이 보다 더 중차대한지 혹은 근본적인지 굳이 분간할 필요성은 크지 않다. 왜냐면 이들 모두가 현 사태의 한 측면들을 설명하고 있어서 뿐 아니라, 이번 사태는 이 모든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의 결과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난 6월10일 시청 앞에 운집한 수십만의 물리적으로 헤아리기 불가능한 ‘촛불’과 그 구성의 다채로움은 이명박대통령과 주변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혹은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단일의 지도(指導)나 특정의 이념과 이해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현재의 촛불집회라는 사태의 요인이 간명치 않고 복합적이라는 것, 그것이 어쩌면 여태껏 집권세력과 일부 보수신문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자충수를 남발하고 우왕좌왕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 글은 기존에 제시된 많은 해석들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그것이 작동하는 한국정치의 구조라는 정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거시적, 구조적인 설명을 제시하는데 있다. 이글은 기본적으로 이번 촛불집회를 “민주화이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의 결과이고, 그러한 현상을 표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규정한 최장집 교수의 이해와 맥을 같이한다(최장집 2008c, 1). 글은 문제를 정의하는 전반부와 대안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후반부로 구성된다. 먼저 전반부에서는 이번 촛불집회가 어떻게 절차적 수준에서의 한국 민주주의 작동의 문제로 설명될수 있나를 다룬후, 이에 대한 최장집의 구조적인 설명을 살펴본다.


2. 절차적 민주주의 관점에 입각한 한 해석

이 글은 이번 광범한 사람들의 자발적 촛불집회를 “한국 민주주의의 작동방식과 내용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가지며, 이를 위한 “시민들의 느슨하지만 강렬한 연대 혹은 직접행동”으로 해석한다. 어쩌면 혹자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민주주의”란 단어를 빌리는 이런 시도에 대해 소위 “밥 먹여주지 않는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유권자들의 뿌리 깊은 회의와 불신을 간과한 게 아닌가라는 비판을 제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번 사태가 갖는 폭발성과 보편성의 추동력은 한국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깊이 관련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짐작하는 것과 달리 소위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관념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보다 여기서 한국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항의라 말할 때의 민주주의는 순전히 그것의 절차적 수준과 그 질에 국한된다. 민주화이후 심지어 그 이전시기에도 한국시민들에 있어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간의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한국의 시민들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준에서는 조금의 퇴보도 간과하지 않고 행동으로 나선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7년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와 이어진 노동계의 총파업이다. 물론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개정된 내용 역시 광범한 저항의 중요한 요인이었음에는 분명하지만, 노동계에 단기적 승리나마 안겨줄 수 있었던 핵심적 요인은 총파업에 대한 중산층들의 유례없는 지지였고, 이는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에 자행된 ”날치기”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에 영향받은 바 크다. 지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건 역시 동일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대다수 시민들에게 보수 야당들의 과반연합에 의한 다수의 폭정(tyranny of majority)으로 비춰졌고, 이에 대한 항의와 심판은 결국 당시 급조된 정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의회과반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번 사태가 민주주의의 문제라는 것이 비단 촛불집회 전반에 걸쳐 목격되는 경찰의 폭력과잉진압과 현 정권의 무리한 공안적 행태들에서 시민들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체취를 느껴서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의혹을 확신으로 전환시키는 한 상징에 가까운 것이다. 그보다는 시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이 최소한의 형식과 요건마저 갖추지 못한 채 결정되고 그러한 결정이후에도 끊임없이 미봉책과 속임수로 모면하려는 현 집권세력들의 한국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한 항의로 이해될 수 있다. 인수위시절부터 지속된 이명박정부의 행태가 시민들에게 각인시킨 한 가지 사실은, 현 정부에서 이뤄지는 중요한 의사결정의 당사자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 관료, 그리고 경찰-이 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민의 이익과 이해를 위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대의제 민주주의 절차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주권자인 시민들의 이해와 요구가 철저히 배제되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번 사태의 폭발성과 보편성의 핵심요인이라 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이번 촛불집회는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한국 시민들의 인식에 있어 두 가지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먼저 절차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시민들의 이해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 단계 더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시민들은 대체로 최소요건의 절차 즉,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 내지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 명백한 하자(날치기)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직접행동에 나서는 정도의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선거를 통해 정당하게 집권한 정부라 할지라도 그것의 권력행사와 주요 정책결정이 선거 뿐 아니라 선거간의 일상적인 정치과정에서도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책임지고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특기할만 하다. 

여기에는 아마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첫째는 다음 선거에서의, 그것이 대통령이던 국회의원이던, 투표를 통해 현 정부를 심판할 기회가 너무도 멀리 있다는 절박함이다. 둘째는 행정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의회의 구성과 내용에 대한 실망이다. 알다시피 대선에 연이은 총선을 통해 집권여당이 과반을 차지하게 되었고, 제1야당인 민주당이 그간 보여준 무력함으로 인해 시민들은 그들을 의미 있는 정치적 반대세력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이 민주주의 작동에 대한 내용에 시민들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고, 이는 그 자체로 한국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학습하게 된 계기이자 성과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이번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더불어 이를 촉발시킨 이슈의 내용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간 정부와 여당 그리고 관료들이 관장사항으로 치부되었던 먹거리, 의료, 환경, 민영화 등의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이슈들에 한국유권자들이 처음으로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소위 “민생이슈”들이다. 한국유권자들의 삶과 관련된 구체적 이슈에 대한 정치적 반응은 다시 이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기존 정당을 자극하거나 혹은 새로운 정당을 출현시킬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역시 긍정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점은 “사회경제적 이슈를 매개로한 민주주의 작동방식에 대한 항의”가 대의제민주주의가 아닌 무언가, 즉 실질적 견지에서 체제수준의 변화에 대한 요구로 혼동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현 수준에서 볼 때 시민들 “다수”가 대의제민주주의, 자본주의경제체제, 심지어 신자유주의 혹은 무역개방 그 자체에 반대한다고 판단할 근거는 많지 않다. 따라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초점을 맞춘 보다 정치적인 해석은 이번 촛불집회를 대의제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의 예상되는 파괴적 결과에 대한 항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한국정치와 민주주의의 구조적 기반: 구조적 포퓰리즘

이번 촛불집회를 한국의 대의제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치 않는 것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로 이해할 때 앞서 소개한 대통령 개인, 개별이슈, 현 정부의 성격에 초점을 맞춘 개별적, 미시적 설명들은 그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문제를 대의제민주주의의 작동의 문제로 이해할 때, 그 원인은 더 이상 개별적인 것이기 보다는 한국정치구조와 제도의 근원적인 수준에서 발생하며, 비단 이명박정부만의 문제가 아닌 민주화이후 정부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이며 거시적인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그 제도들은 심각한 작동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나? 그리고 그것의 핵심내용은 무엇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 지난달 비평에 발표된 최장집의 설명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깊다(최장집 2008b)

그는 해당글의 서두에서 이번 사태의 중심에 “정당과 정당체제가 제대로 제도화 되지 못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며, 그것이 “리더십스타일이나 인적구성과 같은 개인적 구성요소들 보다는 더 큰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그가 구조적 측면에 집중하는 것은 “개인수준의 요소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요소이자 민주주의 제도가 작동하는 기반인 구조적 문제가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가 말하는 “정당정치를 약화시키는 구조적인 요인”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민주화이후 한국정치를 움직인 이슈의 문제이다. 둘째는 한국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있어 권위주의이다. 셋째는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구조의 문제이다. 먼저 이슈의 문제를 살펴보자. 그가 그간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이슈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정당의 제도화와 정치발전에 부정적 효과를 갖는 중심요인이자 제약요인으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 한국정치를 움직이며, 정당의 제도화와 정당간 갈등 및 경쟁을 포괄하는 “근본적” 두 이슈는 민족문제와 노동문제였다. 문제는 두 이슈가 제도정치에서 다뤄지는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그간 한국정치에서 민족문제는 과도하게 정치화 된 반면에, 노동문제는 거의 정치화되지 조차 못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두 이슈는 그 내제된 성격과 그것이 불러오는 정치경쟁과 갈등의 양상에서 큰 차이를 갖는다. 민족문제는 “나눌 수 없는 갈등”, 노동문제는 “나눌 수 있는 갈등”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전자의 이슈는 나눌 수 없는 이념적 열정과 가치관의 충돌을 핵심으로 하기에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영합적(zero-sum) 갈등을 만든다. 이와는 달리 후자는 기본적으로 나눌 수 있는 물질적 분배의 크기를 중심 내용으로 하기에 타협가능한 정합적(positive-sum) 갈등이 형성될 수 있는 이슈이다. 최장집은 민주화이후 한국정치에서 민족문제 즉 “남북문제‘, ‘대미관계‘를 둘러싼 갈등은 필요이상으로 격화돼 이데올로기적 적대를 조장하는 정치적 소재로 사용된 반면에, 보통사람들의 삶에 직결된 노동이슈는 제도내 정당정치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못해왔음을 강조한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노동문제가 한국의 생산체제가 자본주의체제에 기반하는한 제거될 수 없는 중심적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이 제도정치에서 다뤄지지 못한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사회경제적 문제가 다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경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슈는 관료와 테크노크라트들의 관장사항으로 전락해버리고, 이념적 극한대립을 야기하기 쉬운 민족문제가 정치의 중심에 위치할 때, 한국정치와 정당의 끊임없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

두 번째 측면은 정책결정의 행태적 측면에서 권위주의이다. 그가 볼 때 민주화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와 제도들이 작동하는 방식 즉 행태에서 민주화는 큰 진척을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그에게 쇠고기협상파동은 “한국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권위주의가 만들어 낸 결과”에 다름 아니다. 문제를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은 앞서 말했듯 비단 이번 쇠고기협상, 혹은 보수파 이명박 정부에 국한한 현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지난 정부에서 나타난 수많은 거대정책(mega-project)들, 예컨대 행정수도이전, 다양한 형태의 신도시 건설, 한미FTA, 의 입안과 집행 역시 이번 쇠고기협상과 거의 동일한 패턴을 가진 것이었고, 따라서 그는 그것을 “민주화에도 변하지 않는 특성”으로 이해한다. 그가 설명하는 정책결정과 집행에 있어 권위주의적 패턴은 소위 “박정희식 발전(성장)모델”을 이념혐으로 하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모습을 갖는다. 먼저 어떤 방식을 통해 하나의 권력이 수립되고, 최고결정권자는 소수의 테크노크라트들과 함께 국익(공익)을 정의하고, 이에 기반해 정책화, 프로그램화하여 일방적으로 발표한다. 이후 그 정책은 ”국익“으로 정의되기에 모든 국가, 준국가 기구들은 동원되어 홍보, 집행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 내 침해당하는 부분이익 혹은 반대의 목소리는 공권력과 주류언론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공격에 의해 억압되거나 규탄된다. 최초의 권력이 어떻게 수립되는가, 즉 쿠데타인지 선거인지를 제외한다면 이러한 내용을 갖는 방식이 권위주의의 그것과 어떤 의미있는 차이를 갖지 못한다. 민주주의체제하에서 권위주의적 작동방식의 승패는, 특정정부 혹은 리더에 대한 시민들이 얼만큼의 신뢰와 충성을 갖는지, 보수언론 혹은 공권력의 지원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혹은 해당정책이슈가 사회간 갈등라인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이런 방식이 민주주의체제하에서는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시기 만큼의 효율성을 이뤄내기 쉽지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셋째, 권력구조와 제도, 즉 강력한 국가와 대통령제의 문제이다. 대의제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선출해 통치를 위임하는 정치체제이다. 따라서 선거의 승리는 흔히 통치에 대한 국민적위임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최장집은 “통치의 권한부여‘ (authorization)과 ”국민적 위임“ (mandate)의 의미를 구분하며, 현 정부가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국민적 위임을 당연시 여기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인식은 한국의 강력한 국가와 대통령제가 만들어내는 조건에 영향 받은 바 크다. 한국에서 제도적, 헌법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잘 발달된 관료행정체제와 접맥돼 강력한 통치자로서의 인식이 확산돼있다. 여기에다 약한 입법부와 강한 집행부라는 권위주의시기 만들어진 권력구조는 민주화이후에도 여전히 크게 변화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이런 조건은 정치과정과 사회로부터의 정치적 제약이나 권력부서간의 상호견제와 균형에 구속되지 않는 대통령, 그의 권력행사와 권력관념을 만든다. 문제는 강력한 국가기구와 대통령 그리고 집행부의 압도적 우위라는 조건은 지난 노무현정부시기 열린우리당과 현정부 초기 한나라당에서 나타나듯이, 정당의 능력과 기능 그리고 대안적 리더쉽의 형성을 크게 제약하여 결국 정당의 자생력은 필연적으로 상실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 같은 성격을 갖는 제도적으로 강력한 대통령과 제도화의 수준에서 극도로 불안정한 허약한 정당체제가 만날 때 만들어진 특징적 현상을 “구조적 포퓰리즘”으로 개념화했다. 그것이 구조적인 것은 “강력한 대통령과 강력한 국가, 다원적 자율적 구조를 발전시키지 못한 채 국가헤게모니에 압도당하는 허약한 시민사회, 그리고 이에 기초해있는 허약한 정당체제”가 특징을 이루는 조건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때, 포퓰리즘적 행태는 항상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포퓰리즘인 것은 정치과정에 있어 사회의 이익과 요구의 투입의 기능을 수행하는 정당과 시민사회의 결사체들이 허약하고 중간매개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대통령이란 최고권력과 시민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형태로든, 투입의 방향에서든 산출의 방향에서든, 끊임없이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이렇게 이해할 때, 이번 쇠고기협상 뿐 아니라 지난 정부에서 결정된 한미FTA는 결국 시민사회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힘의 균형, 공론장에서 이성적 토론, 정당에 의한 정치적 경쟁 등 대의제민주주의가 내장한 의미있는 견제력이 부재하거나 작동않는 상태에서 역사적, 제도적으로 형성된 강력한 대통령과 국가권력이 결합할 때, 즉 구조적 포퓰리즘하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이번 쇠고기 협상 혹은 지난정부의 한미FTA 이외의 것이 되기 어렵다.

Ⅱ. 대안을 위한 사전적 탐색: Levy, Lowi, 최장집의 논의를 중심으로 국가-시민사회 비교적 관점에 위치시키기

앞서 이글의 전반부에서 이명박정부가 집권초기에 봉착한 소위 촛불집회정국이 한국의 정치와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강력한 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 혹은 구조적 포퓰리즘으로 요약될수 있는 한국정치와 민주주의의 구조적 조건의 결과임을 보았다. 이글의 후반부에서는 문제에 대한 대안마련을 위한 사전적 탐색을 위해 국가-시민사회의 관계, 정책결정과정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최장집, 레비(J. Levi)와 로위(T. Lowi)의 논의를 리뷰한다. 리뷰의 문제의식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먼저 한국의 국가-시민사회의 문제를 한국적 상황으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비교적 관점에 위치시켜 이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둘째, 이를 통해 한국의 국가-시민사회의 관계가 지향해야할 변화의 방향과 이니셔티브를 포착하는 것이다.

1.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의 부활
이번 촛불집회는 여러모로 지난시기 운동, 특히 87년 6월항쟁과 비교할 때 특기할만한 것으로 간주된다. 특정 조직과 단체가 주도하지 않는 자발성, 광범한 연령, 계층이 참가한다는 참여의 보편성과 광범함, 항의와 의사표현 방식에 있어 비폭력성과 첨단성 등이 지적되었다. 이런 요소들에 주목한 다양한 학자들이 “디지털 민주주의”, “직접(참여)민주주의”, “제4의결사체” 등의 별칭의 헌사로 이어졌다. 이런 시민들의 인상적이고 전례없는 움직임은 기존 제도정치권의 무력함과 곧잘 비교된다. 여야당 할 것 없이 한국의 제도정당들은 현정국의 거리에서, 의회에서 제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 사태에 대한 정치적 대안과 이를 위한 이니셔티브는 고사하고 의미있는 발언과 논평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집권여당은 청와대의, 야당은 거리의 움직임을 간신히 뒤쫒으며 이를 수습하느라 급급하다. 한국민주주의와 정치의 구조적 조건이 가능케 한, 의미 있는 정치적 제약과 사회적 합의로부터 벗어난 강력한 국가의 광폭함은, 다시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제도정치로부터 부활된 거리의 정치로 쏠리게 한다. “제2의민주화”, “부활된 거리의 정치”, “다시 운동인가”의 표제들이 진보, 개혁적 논의에 넘쳐난다.

먼저 시민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전적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시민사회 역시 민중, 시민 등의 개념과 아울러 민주화운동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민사회의 부활”로 일컬어졌던 현상의 한국판이었다. 그것은 민주화이행기 권위주의하에서 억압되고 탄압되던 시민권과 자율적 집단들이,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봉기와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민주화이행기 통해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정치공간과 이슈들을 회복하여, 다시 부활하게 된 시민사회를 의미한다. 최장집은 올해 초 열린 시민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지난 민주화 20년의 변화를 살펴보았다(최장집 2008a). 그는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민주화시기 “강력한 국가 대 강력한 시민사회”, 민주화이후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 최근 “국가에 선별적으로 흡수된 시민사회”에 묘사했는데, 그의 핵심은 결국 민주화이전과 이후에도 강력한 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의 지속이 민주화이후 보편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국가에 반하는 강력한 시민사회 내지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라는 규정은 당시 폭발적으로 분출된 “운동”에 영향받은 바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운동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는 국가에 대해 자율성을 갖는 사회적 영역을 지치한다. 그것은 공적권력이 행사되는 국가영역과도, 가족, 시장과 같은 사적영역과도 위계적으로 구별되는 국가와 사적영역 사이의 중간층위의 영역이다. 여기에 여러 수준 형태의 자율적 이익결사체, 공익적 기구들, 운동, 그리고 정당이 포함된다(최장집 2008a). 여기서 정당이 시민사회에 들어가느냐 아니냐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정의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필립 슈미터의 네 가지 요건중 하나인 국가권력을 찬탈하려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위배된다는 점에서, 정치사회를 구분해 위치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정당이 사적이익과 공적이익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해, 사적이익들이 공적문제로 전환하는 기능을 핵심으로 한다 할 때, 시민사회의 논의에서 배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문제는 한국의 시민사회, 그리고 그 담론 역시, “시민사회의 부활”이라는 민주화이행기의 강력한 운동의 분출에 크게 압도당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사회”란 단어가 민주화이후 운동이 점차 약해지면서 “시민운동” 이상의 적극적 의미를 갖지 못한채 그 사용빈도가 확연히 감소되어 온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는 한국에서 시민사회가 주로 “운동”에 국한해 협소하게 사용되어왔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촛불집회 정국에서 다시 주목받고 운위되곤 하는 “시민사회” 역시 이 같은 기존의 협소한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이번 촛불집회를 강력한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 그리고 강력한 대통령제라는 한국민주주의의 구조적 조건이 만들어 낸 작동방식의 문제로 이해할 때, 대안 혹은 해결은 구조적 조건들을 변화시키는 이외의 것이기는 어렵다. 그것은 결국 강력한 국가를 약화시키는 한편, 허약한 시민사회를 강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시민사회의 강화가 단순히 협소하게 운동으로서만 한정되어선 안 된다. 운동의 강력함은,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던 그것은 제도화되지 않은 시민들의 직접적 힘의 분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 직접적으로 강력한 시민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글에서 말하는 강한 시민사회는 보편적 기준에서 다양한 이익결사체와, 지역적, 사회적 중간매개 조직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 강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문제는 어떤 국가-시민사회의 관계를 만들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2. 시민사회 - 돈 많은 삼촌

좋은 시민사회가 좋은 정치 나아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데 별다른 이견이 있을 순 없다. 활력있는 시민사회는 민주정치 뿐 아니라 경제적 실적, 그리고 민주화/시장경제로의 이행에 필수적인 요인으로 다뤄지고 있다. 민주정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기여를 레비의 논의를 옮겨본다(Levi 1999, 1-3).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시민사회의 역할은 국가권력의 견제이다. 활력 있는 시민사회는 권력을 분산시켜, 시민들이 전제정에 맞서도록 하는 필수적인 보루를 제공한다. 또한 시민결사체들은 사회내 존재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코자 하는 국가의 욕망을 제어한다. 두 번째로 정책결정과정에 기여하는 바도 크다. 다양한 결사체들과 경쟁하는 이익들은 정책입안자들에게 더 많은 정보와 다양한 관점들을 제공한다. 국가의 정책이 (이익들간) 협의와 타협의 산물이 될 때, 그 정책의 정당성은 높아지고, 그 집행에 있어 순응도 역시 높아진다. 아울러 다양한 형태의 준공적 기구와 사회제도들은 국가의 부담, 소위 정부의 민주적 과부하를 감소시킨다. 세 번째로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적 가치의 학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시민적, 정치적 결사체의 참여를 통해 시민들은 타협과 주고받는 기술을 습득한다. 나아가 그것은 시민스스로의 시민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증대시키고 이는 다시 더욱 적극적인 정치적, 결사체적 활동에 나서게 만든다. 넷째, 좋은 시민사회는 좋은 경제에도 필수적인데, 활력 있고 잘 조직된 시민사회는 국가의 정책 이니셔티브가 시장적, 사회적, 지역적 결사체들의 이해와 잘 조응케 만들어 국가지시의 과도함을 제어한다. 다섯째, 시민사회는 단순히 국가행위에 저항하는데 그치지 않고, 공적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 대안적 기제를 제공한다. 중간매개 결사체들로의 공적책임의 이양은 중앙집권적 관료체계에서 나타나는 집단행동과 무임승차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는 기업활동에도 기여한다. 활력 있는 시민사회가 가져오는 신뢰와 호혜성의 증대는 기업의 거래비용을 낮추고, 내외적 유연성을 증대시킨다(Levy 1999, 2-3). 

그러나 이글이 주로 의존하는 레비의 논의의 핵심은 코헨과 로저스(Cohen & Rogers) 푸트남(Putnam), 겔너(Gellner)등 주류 시민사회 이론가의 논의에 더해, 시민사회의 덕(virtue)을 추가하는데 있기 보다는 하나의 맹점을 지적하는데 있다. 그의 논의는 1980, 90년대 프랑스 경제정책 결정과정에서 발견되는 국가-시민사회의 관계의 변환(transformation)과 정치적 시도를 경험적 대상으로 한다. 그가 요약하는 시민사회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 연구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참여, 시민적 개입과 대중동원의 덕성을 찬양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좋은 시민사회가 존재하게 되었는가의 이해에 있어 피동적(passive)이며 운명적(fatalistic) 입장을 갖는다. 즉 “모든 사람들이 좋은 시민사회를 사랑하지만 아무도 어떻게 그것을 건설할 수 있는지 예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Levy 1999, 4).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는 “돈 많은 삼촌”이다. 있으면 참으로 좋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운에 달려있다. 그가 보기에 시민사회에 대한 지배적 접근은 무엇보다도 시민사회를 재건설, 재형성, 혹은 규제할 수 있는 “정치의 가능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것의 피동적, 운명적, 그리고 반정치적 관점은 다음의 3가지 관점에 기초한 것이다. 첫째, 어떤 나라의 사회적 자본의 저량(stock)은 운명적(pre-determined)이며 불변한다. 즉 시민사회는 유전되어 온 것이지, 구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푸트남의 북부와 남부 이태리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한 공동체는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형성할 수 없고,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 힘에 의해 축복(혹은 저주) 받는다. 둘째, 시민사회는 단순하게 이분적(binary) 변수로 묘사된다. 셋째, 시민사회는 국가와 대체로 영합적(zero-sum)적 관계를 갖는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논의의 핵심은 “정치는 시민사회를 만들거나 영향을 끼칠 수 없고, 먼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반정치적, 반국가적인 지배적 이해에 도전하는데 있다. 그리고 1980, 1990년대 프랑스의 경제정책결정에서 변환과정은 이런 관점을 평가할 좋은 기회가 된다. 왜냐하면 그 시기 지시경제(dirigisme)로 압축되는 경제발전 모델은 독일을 이념형으로 한 결사체적 자유주의(associational liberalism)로의 대전환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기 때문이며, 그 핵심은 경제정책결정의 권한을 대폭적으로 사회적, 지역적, 시장적 결사체에 이양하는데 있다.
이글의 목적과 관련해 그의 논의는 두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한국과 유사한 국가-시민사회 관계를 지니는 프랑스의 시민사회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시도와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의 논의의 비교의 준거가 되는, 독일의 연방제, 북유럽의 코포라티즘, 일본의 경험은 프랑스 뿐 아니라 한국에도 중요한 참고지점이다.

3. 국가-시민사회의 다양성과 정치의 중요성

그의 경험적 논의의 결론은 다소 그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일는지 모른다. 왜냐면 결론적으로 그가 지시경제의 결사체적 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실패가 시민사회론자들의 주장처럼 숙명 혹은 먼 역사적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1980, 1990년대의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었음을 비교적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를 통해 시장적, 사회적, 지역적 다양한 결사체와 제도들은 결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정치적인 과정과 기획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 또 재형성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프랑스의 포스트-지시경제형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험난한 과제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시민사회론이 갖는 숙명론적 시각은 사회적, 지역적 제도들의 가소성과, 그것의 객관적 힘과 주관적 행태를 변모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시민사회를 재생하고 동원하는데 있어 국가와 정치의 역할을 개념화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하기에 그의 결론은, 국가가 필연적으로 시민사회의 적도 아니며, 그것의 제거가 시민사회를 되돌리는 데 적절한 처방이 되지도 못한다. 그보다는 국가의 적극적 보조적(supportive) 역할에 의해서 시민사회의 재생과 활성화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민사회를 재건설하는 것은 몰-국가적(state-free) 혹은 반국가적 과정이 아니며, 철저하게 의식적인 국가와 정치의 능력과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독일 연방주의>
레비에 따르면 독일은 특히 지방분권의 측면에서 프랑스가 지향한 결사체적 자유주의의 이념형적 모델이었다. 주지하다지피 독일의 주(Lander)와 주단위 공적, 사적 결사체들은 여러 공공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있어 막강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어, 지방분권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레비는 전후 독일의 상황은 시민사회 지배적 관점과 달리 축복받은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이후 지정학적, 민주적, 선거적 요인들과 정치의 고도의 계산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밝힌다. 독일의 경험에서 그는 독일의 주는 독일 정치와 정책결정과정에서 중요한 힘(forces)이 되었고, 그것은 역사로부터 출현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과정은 단순히 국가의 철수가 아니라 공격적인 국가지원의 변환을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즉 불길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주가 강력한 경제적 행위자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데 있다는 것이다.

<북유럽 코로라티즘>
두 번째 비교의 사례는 북유럽의 코포라티즘이다. 그것은 국가가 비국가 행위자에게로 준공적 기능들을 이양하는 메커니즘으로 요약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노조, 사용자 단체들은 인플레 억제, 노동훈련, 해고조절, 신기술 도입, 복지국가 개혁, 건강-안전-노동입법의 수립과 집행 등의 다양한 준공적 권위를 수행한다. 이에 고무된 스트릭과 칼은 이것을 국가와 시장 규제를 대체하는 진정한 사적이익정부(private interest government)로 묘사하기도 했다. 레비는 이러한 코포라티즘 역시 결코 자기발생적(self-generating)인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데, 무엇보다도 자율적결차체들의 형성에 국가의 개입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코포라티즘적 제도를 상징하는 중앙임금교섭의 안착은 결국 국가가 사회적 파트너들에게 임금자제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복지프로그램, 제도적 자원(법적, 조직적, 행정적)의 지원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독일의 장인제도의 역사적 기원역시, 국가가 독점적으로 특정의 조직에서 배타적 권한과 지원을 부여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독일의 장인제도는 정교한 국가의 노력과 디자인에 의해 조직되고 유지되어 온 것이다. 저자기 보기에 프랑스의 전환의 실패는 국가가 법적, 재정적, 정책적 자원을 지원하여 그런 실행에 책임 있는 조직을 키우기 위해 헌신하기 보다는, 단순히 경제적 규제로부터 철수하고, 그 빈공간을 기업과 노동조직 채워주기를 기다렸다는데 있다.

<일본 국가주의>
레비의 논의에서 독일과 북유럽 경험은 국가가 시민사회의 적이기보다는 중요하고 권한부여적 동맹(ally)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등장한다면, 일본의 경험은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상보성(complementarity)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즉 그것은 국가-시민사회의 관계가 상쇄적 관계에 있지않고 양자의 권력이 함께 증대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프랑스와 일본 모두 국가중심적 경제계획모델의 두 사례이지만, 프랑스와 달리 일본의 산업정책이 말해주는 것은 잘 조직된 재계와 지역 파트너와 협력과 국가주의적 발전전략이 양립가능하다는 것임을 지적한다.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나? 저자가 보기 양국의 정책결정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다른데, 그것은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분할된 시민사회를 가진 반면에, 일본은 특히 재계를 중심으로 구조적, 제도적으로 강력한 시민사회라는 환경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일본재계의 결사체는 바로 수직적, 수평적으로 촘촘히 형성된 계열(Keiretsu)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국가의 의식적 정책의 산물이었음은 물론이다. 프랑스 관료들이 산업결사체들은 약화시키고, 우회하고, 무시한데 반해, 일본의 입안가들 재계 결사체와 지역파트너들을 유용한 동반자로 여겼다. 즉 일본의 광범한 국가개입, 특히 경제부문으로의, 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이 일본 재계로부터 용인되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다시 재계의 이익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며, 국가개입 자체가 공적, 사적 그리고 행정적 행위자들간의 정교하고 꾸준한 협상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레비의 논의에서 일본은 재계와 결사체간의 파트너쉽을 확충시킴으로써 경제와 사회에 개입하는 능력을 키워 온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에반스의 논의를 빌러 베버적 자율적 관료국가는 단순히 효율적 경제정책을 산출하는 것만으로 불충분하며, 그것은 반드시 사회적 이익(재계)과 긴밀한 결속을 가져야, 즉 배태(embedded)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Ⅲ 전체결론을 대신하며

결론은 글의 내용을 재요약하기 보다는 빠진 부분을 짚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번 촛불집회를 한국민주주의와 정치구조라는 구조적 조건에 집중해 접근할 때, 결국 문제의 초점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글은 레비의 논의의 중심으로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몇 가지 모델과 특히 시민사회를 재형성 하는데 있어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쳤다. 하기에 논의가 빠진 부분은 강력한 국가와 강력한 대통령제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이런 변화를 만들어갈 최초의 이니셔티브로서의 정당에 대한 논의, 그리고 이에 대한 비교적, 경험적 분석일 것이다. 


참고문헌

최장집. 2008a. "민중에서 시민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04』강의안(1/26∼2/23).
최장집. 2008b. "이명박정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나? 민주주의하에서 국가, 대통령제, 정당의 문제“, 계간 비평 19호(여름호).
최장집. 2008c. “촛불집회가 제기하는 한국민주주의의 과제”. 경향신문사 주최 긴급 시국대토론회 『촛불집회와 한국민주주의』개회사 (2008/6/16).
Levy, Jonah 1999. Tocqueville's Revenge - State, Society, and Economy in Contemporary France. Ha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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