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소 가벼운 감이 없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좋은 글. 그러고 보니 한겨례에 실린 칼럼들이 좋아졌다. 무슨 변화가 있었나? 예전에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들만 있었는데, 필진의 폭이 무척 넓어졌고, 그래서인지 읽을 것이 많다. 특징은 좋은 글들은 대체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쓴 것이라는 점이다. 제발 신문, 방송, 토론회 어디나 나와서, 자신들이 이미 내뱉은 말들과 그 기사들을 무한 반복해대는 좋은 대학 교수들 칼럼은 안 실었으면. 전혀 깊지 않은 생각을 무한히 찍어내는 이들.
2) "왜 한국남성은 폭탄주에 열광하나? " 좋은 관찰이 만들어낸 좋은 질문이다. 폭탄주가 다른 사회에서 좀 처럼 찾기 힘든 현상이니 만큼, 그것은 한국사회의 문제 내지 모순을 압축하는 좋은 소재일 가능성이 높다.
3) "빨리 취하기 위해서다" 그럼 "왜 빨리 취하려하나?" "서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다"는 연쇄적인 간결한 문답 역시 좋다. 간결하지만 그것은 한국사회와 한국시민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 틀림없다. 동 대를 살아내는 주변의 동료나 동반자들과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해 뭔가 얘기 나누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 한다는 것, 또 그런 곤혹스런' 상황을 만나느니 차라리 오바스런 주사와 인사불성을 택한다는 것, 여기에 이 시대 한국인들의 고단한 외로움이 담겨 있는게 아닐까? 요즘 크게 사회 문제가 되는 높은 자살율은 어쩌면 고단한 외로움의 누적이 한계점을 넘어 폭발한 결과들이 아닐까?
4) 이런 생각들은 부부관계 또는 성매매 문제로 이어진다. 국에는 왜 모텔(러브호텔)이 많은가? 왜 룸살롱, @@방 등의 갖는 종류의 성매매업소들이 그리도 많은가? 이는 한국 성인들 다수의 결혼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고, 야기 하는 것을 두려워 하게 되고, 차라리 망가져서 상대를 상처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대체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들 역시 혼자서는 살수 없는 인간이기에, 이야기를 갈망하고, 그 욕구를 해소할 상대를 찾아 거리를 해매이게 된 것은 아닐가? 한국의 밤거리는 러브호텔, 직간접적 성매매 업소들로 가득찬다. 한국만큼 쉽게, 또 부담없는 가격으로 성매매할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이는 한국인의 도덕성 또는 성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성산업과 관련하 법령/처벌 수준의 문제 역시 아니다.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느냐 마느냐? 또 얼마나 실효적으로 단속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밤거리를 가득 채우는, 이야기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린, 그러나 본능에 따라 이를 찾아나선 고단하고 외로운 한국 남성들의 행렬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떠나서 말이다). 어쩌면 한 사회의 성매매의 수요공급 곡선에서 수요곡선은 남성들의 외로움이 정상적으로 관린되는 수준의 함수이며, 그 공급은 젊은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보수의 수준의 함수인지도 모른다. 여러 변수들이 물론 있을테지만 말이다.
5) 이 글을 까페에서 읽으며 난 이렇게 트윗했다.
기억속에 난 누군가에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언제부턴지 난 그럴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했고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런만큼 난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야기. 날 움직인 힘이었구나. 너 얘기하고 싶었구나
그렇다 "인간은 이야기하려고 산다.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내가 왜 이렇게 아득한 곳에 가라앉게 되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난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대가 누구이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서, 난 생각할 수 있었고, 그것은 대체로 나쁘지 않은 것이기에, 그 생각을 토대로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이야기 할 상대 혹은 기회가 줄어들었을 때, 또 어떤 이유에서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게 되었을 때, 난 그 만큼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난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게다. 그것도 무척이나 많이. 어쩌면 것이 내가 지금 내려와 앉아 있는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나가는 길일 것이다. 비슷한 장면을 한때 좋아했던 하루끼 소설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너무 오래전이다. 그러구 보니 난 소설도 읽지 않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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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도대체 왜 한국 남자들은 이토록 폭탄주에 열광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빨리 취하고 싶어서다. 그럼 왜 빨리 취하려고 하는 걸까? 서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다.
(중략)
폭탄주가 한두 바퀴 돌아가다 보면 꼭 오버하는 인간이 나타난다. ‘사랑해!’ ‘우리가 남이가!’ ‘마셔마셔’ 어쩌구 하며, 껴안거나 러브샷과 같은 과도한 스킨십을 일삼는다. 이 인간은 동석한 모든 이가 빠짐없이 폭탄주를 마시도록 강요한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취해 아까 한 이야기, 하고 또 한다. 맨정신으로 듣고 있자면 정말 환장한다. 폭탄주의 끝은 참 스산하다. 온갖 종류의 ‘위하여!’를 남발하고, 넥타이 머리에 묶고 탁자 위에서 춤추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모두 사라진다.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술자리의 모든 뒤끝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술값을 책임져야 하거나, 망가진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두렵기 때문이다. 서로 나눌 이야기가 전혀 없는데, 멀뚱멀뚱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그 황당한 상황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폭탄주를 마시는 것이다. 두 눈동자가 흐릿해지고,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마구 헷갈리는 상황을 만들어야만 마음이 편해진다. 왜 이렇게 술을 마셔야 하는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식은 아니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 우린 서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소주 한 병에 파전 한 접시를 앞에 놓고 밤새 이야기했던 날들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은 이야기하려고 산다.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고츠키 같은 러시아의 심리학자는 생각을 ‘내적 언어’(inner speech)라고 정의한다. ‘내가 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생각이라는 것이다. 혼자 중얼거리는 현상은 이 내적 언어가 은연중에 튀어나오는 것이다. 힘들면, 생각이 복잡하면, 외로우면 사람들은 중얼거린다. 이야기가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러기 아빠들은 죄다 혼자 중얼거린다. 내 친구 재림이도 매번 혼자 중얼거린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소연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심리상담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삶의 의미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은 유능한 상담자의 필수 덕목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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