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정부와 그 실적에 대한 대다수 시민들의 평가가 극도로 낮다면 (*나는 2012년이 2007년에 이어 그렇다고 생각한다) 유권자로서 시민의 과제와 선택은 단순하고 쉬워진다. 일단 악당을 쫓아내는데 전념하면 되기 때문이다(kicking the rascals out). 이는 선거가 '전망적 판단'이 아니라 '회고적 평결'을 중심으로 치러지게 됨을 의미한다. 유권자는 돌멩이(투표용지) 하나를 가지고 두 마리 새(나쁜 놈 심판하기와 좋은 놈 선택하기)중 무엇을 잡아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저 한 마리에 집중하면 된다.
집권당과 그 후보에 맞서는 반대당의 메시지와 전략도 마찬가지다. 그냥 차분하게 적절한 숫자와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그 끔직했던 지난 5년을 연장하기를 원하느냐?"를 반복해 물으면 된다. 그 뿐이다. 이럴 때 후보전술도 쉽다. 굳이 어렵게 '전환적' 리더를 찾아 헤멜 필요가 없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인물이 아니라, 그냥 '할 수' 있는 후보를 제출하는 것으로 족하다. 선거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중심으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악당쫒아내기' 또는 '회고적 심판'으로서의 선거는 그 반대의 경우보다 현대 민주정치에서 더 지배적 양상이다. 좀 과장해 말한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선거의 모습이고, 아주 특별한 시기에 예외적으로 선거는 '미래와 전망'에 관한 것이 된다. 이는 어쩌면 당연하다. 미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차있지만, 과거는 경험 해 아는 것이며, 사람들은 모르는 것 보다 아는 것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수많은 선거연구들을 통해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기도 하다. 또 적지 않은 민주주의 이론의 대가들은 현대 민주주의가 단순한 '심판기제'만으로도 충분히 작동가능함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선거는 참으로 의아하다. 현정부의 실정 비판도 인기 없는 현직 대통령도 보이지 않는다. 유권자 판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어쩌면 쓸모 있는 거의 유일한 원천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빈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크게 신뢰하기 어려운 후보들마다 떠들어 대는 '도래 할 미래'들이다. 설령 그 선의를 믿어준다 할지라도 미래는, 특히나 정치의 세계에서, 지극히 불확실한 것이며, 또 우리의 과거의 경험을 미루어 볼 때, 그 정보적 유용성은 크게 떨어진다.
더 황당한 사실은 '엉뚱한' 과거가 그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정부가 아니라 전-정부 그리고 전전전전전전-정부가 심판의 대상, 즉 판단의 근거로 제출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론 두 후보진영이 공급한 선거 프레임(유신부활저지 vs. 참여정부실패공동책임자)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국 시민들의 고육지책이기도 하다. 이명박도 없고 空約만 남은 상황에서 어쨋든 선택을 하기 위해, 뭔가 '단단한' 판단의 지푸라기를 찾아야 하는 시민들의 자연스런 귀결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또 "이명박 정부는 형편 없었다"라는 전제 하에서, 제1야당 민주당이 만들어가는 이번 대선 캠페인은 실패하고 있다. 첫째. 그 시작부터 이명박이 아니라 박정희에 집중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선거를 박근혜의 신뢰에 관한 것, 그래서 미래에 관한 선거로 만들어 버렸다. 둘째, 유권자 입장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기록(record)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현 정부 못지 않게 저조한 실적을 기록했던 전-정부와 분리될 수 없는 인물을 후보로 내세워 전-정부 심판의 회괴한 프레임을 자초한 점이다.
아주 젊은 친구들을 제외하고, 미래는 그것 만으로 유권자의 충분한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면, 이번 대선을 치르는 한국 유권자들은 그래서 양당이 판단 근거로 제출한 '엉뚱한 과거'의 정보적 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에 따라 크게 양분될 것 같다. 그 정보(박정희의 딸이라는 사실, 노무현의 비서실장이라는 사실)가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유권자들은 -아마도 이념적 양편향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중심에 놓고 판단하고 투표할 것이다. 그들의 최종 선택이 무엇일지, 그 합산의 상대적 크기가 어떨지를 가늠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엉뚱한 과거'에서 선택의 정보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유권자들이다. 대체로 이 그룹은 미디어를 통해 중도/온건/부동층으로 묘사되는 이들이다. 또 얼마전까지 안철수라는 대안에 머물렀을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이 그룹은 앞의 이념적 그룹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정치에 대해 더 큰 불신과 냉소를 가진 이들이다. 즉 대체로 "누가 해도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다. 그래서 이들은 空約 즉 '미래'의 정보적 가치에 대해 더욱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사실들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꽤나 큰 규모의 중간층 유권자들이 선택을 위한 아무런 의미 있는 판단의 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일반적으로 중간층 유권자들이 정치행위를 위한 유의미한 실마리를 갖지 못할 때, 그들의 쉬운 선택은 퇴장 즉 기권이다.
이것이 필자가 꽤 오래전부터, 아마 10월 어느 날 TV토론에 나온 안철수 캠프의 핵심인사의 발언에서 "전혀 준비되지 않음"을 발견했을 때 부터, 그래서 이번 대선의 유일한 변수였던 '안철수'를 적어도 머리속으론 제거해야 했을 때, 이번 선거가 '조용한' 그래서 '불확실하지 않은' 선거가 될 것으로 예감한 근거이자 논리였다. 나의 이런 판단은 아마도 새누리당의 주요 전략가들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캠페인 초반 경제민주화와 복지이슈 등으로 '중간'을 향했던 그들이 어느 순간, 방향을 선회해 색깔론으로 포장된 안보이슈를 가져오고, 막말의 형식을 빌어 노무현을 불러오는 것은 구태도 실수도 아니다. 그것은 중도부동층의 동원 없는 '조용한' 선거를 치르겠다는 그들의 전략이다. 그러면 이긴다는 것이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것은 꽤 정확한 판단이다.
문제는 민주당이다. 왜냐면 새누리당과 달리 '집토끼'로 표현되는 이념적 열성 지지자들의 결집과 동원을 중심으로 선거를 치르면 패배하기 때문이다. 그 연원이 무엇에 있던, 양당간의 고정지지층 규모는 꽤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이쪽 지지층은 투표보다 더 재미난 것을 많이 가진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조용한' 선거는 조용히 지는 선거인 것이다. 안철수와의 단일화-그것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의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다. 현재 엉거주츰하게 옮겨온 안철수 지지자들 조차, 민주당이 기존의 접근과 행태를 고수한다면 오히려 떨어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단일화 효과는 두 후보가 모두 출마한 경우에 유권자들이 선두후보를 중심으로 집결해 만들어지는 '자연 단일화'를 크게 상회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이상의 결론은 초반 캠페인 전략과 후보전술을 통해 만들어진 필패의 구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후보는 어쩔 수 없으니, 남은 방법은 전략의 수정 뿐이다. 수정의 방향은 분명하다. 광범한 부동/중도층을 투표장으로 불러오는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 그들이 투표장에 갈 만한 충분한 근거(정보)를 제공해, 참여의 유인을 높여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수 있을까? 두 가지다. 먼저 어쨌든 회고적 심판의 기운을 다시 되살려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의 중심으로 불러와야 한다. 그리고 왜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다를 수 없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이는 저쪽 진영의 분열을 가져오는 부수적 효과도 일으킬 것이다.
둘째는 미래를 구체화 해야 한다. 여러번 강조했듯이 미래는 좀처럼 설득력을 갖기 힘든 정보다. 그래도 현재 후보의 절대적으로 부족한 기록을 감안한다며, 뭔가 현실감 있는 미래를 보여주는 것 이외의 뾰족한 수는 없다. 그래서 정책은 "북유럽식, 혁명적, 무상"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제한적이 되어야 한다. 지도자의 정부운영에 있어 변화된 시선과 약간의 정책과 예산배정상의 우선순위 조정만으로 시민 '아무개'의 삶이 구체적으로 얼만큼 바뀌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 문법은 이럴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하겠다"가 "서민의 삶을 비약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말하기 보다는(셀 수록 믿지 않는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울산의 자동차 공장 조립라인 비정규직 "모모모" 씨의 노동조건과 월급명세서가, 또 서울 외곽에 소형평수 전세아파트에 거주하는 2명의 어린 자녀를 가진 맞벌이 봉급생활자 가계의 가계부의 항목과 숫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줄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만질만한 미래다. 이것이 이미 등돌린 광범한 중도/부동 유권자들을 돌려 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선거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역사투쟁으로 접근하거나, 온갖 싸구려 코스프레를 동원한 이미지 정치에만 몰입한다면, 이번 선거 결론은 이미 나온것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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